김일손 졸기는 실록에 없습니다. 조회 결과가 0건입니다. 처형된 사람이니 예상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글은 실록에 남았습니다. 김일손이 사초에 옮겨 적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입니다. 407자 전문이 『연산군일기』 본문에 실려 있고, 그것도 이 글을 태워 없애라는 명령이 적힌 바로 그 사초, 그 자리에 같이 실렸습니다.
이번 편에서 묻는 것은 그의 부고가 왜 없는가가 아닙니다. 없애려던 글이 어떻게 남았는가입니다. 답은 없애는 방식에 있습니다. 어떤 글을 죄로 삼으려면 그 글의 어느 대목이 왜 죄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밝히려면 그 대목을 조사 문서에 그대로 옮겨 적어야 합니다. 없애려고 벌인 조사가, 없애려던 글을 한 번 더 베껴 쓰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조사 문서가 그대로 실록에 실렸습니다.
I. 이 사람
김일손(金馹孫)은 1464년에 태어나 1498년(연산군 4)에 처형됐습니다. 서른다섯이었습니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입니다. 탁영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가져온 말로,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는 뜻입니다.
실록 색인에 그의 이름이 붙은 기사는 146건입니다. 그중 확인되는 자리를 순서대로 놓으면 이렇습니다. 1486년 생원에 뽑히고, 1491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정7품)로 있다가 좌천되고, 1494년 평안도 도사(都事, 종5품)에서 늙은 어미를 이유로 물러나고, 1495년 충청도 도사로 시국의 이익과 병폐 26조목을 올립니다. 같은 해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이 되어 수륙재(水陸齋)를 금하라는 논쟁을 겨울 내내 끌고 갑니다.
수륙재는 물과 뭍을 떠도는 영혼을 위해 올리는 불교 의식입니다. 조선은 유교를 나라의 원칙으로 삼았지만, 왕실은 장례를 치를 때 이 재를 계속 지냈습니다. 1495년은 성종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입니다. 왕실이 재를 올리려 하자 사간원 관원들이 나라의 제사에 불교 의식을 쓸 수 없다며 막아섰고, 김일손이 그 앞줄에 있었습니다. 열흘 넘게 같은 사안으로 아뢰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청합니다. 뜻을 굽히지 않고 자리를 거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관직 이력에서 읽히는 유일한 성격입니다.
부가정보의 관직 이력 테이블은 이번 편에 쓰지 않았습니다. 앞쪽 항목 일곱 건이 모두 1481년으로 찍혀 있는데, 김일손이 생원에 뽑힌 것은 1486년입니다. 열일곱에 도사와 경차관을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위의 이력은 기사 색인에서 직접 확인되는 것만 골랐습니다.
II. 부고는 0자, 기사는 146건
김일손 졸기는 없습니다. 지난 두 편도 그랬습니다. 다만 성격이 다릅니다.
7편의 정인홍은 영의정까지 지냈는데 죽음의 기록이 다섯 글자였습니다. 8편의 이이첨은 졸기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기사 안에 838자짜리 인물평이 들어 있었습니다. 둘 다 없거나 숨어 있는 쪽이었습니다.
김일손의 경우 기록은 많습니다. 1498년 7월의 『연산군일기』 30권에는 그의 이름이 거의 날마다 나옵니다. 다만 그것은 그를 갈무리하는 글이 아니라 그를 심문하는 글입니다. 부고는 죽은 사람을 갈무리하는 문서이고, 조서는 죽이기 위해 캐묻는 문서입니다. 김일손에게는 뒤쪽만 남았습니다.
III. 태우라는 명령 바로 옆자리
먼저 이 편의 결론에 해당하는 장면을 놓겠습니다. 1498년 7월 17일 자리에 기사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책장을 넘길 필요도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8책 30권 9장 B면, 곧 같은 책의 같은 면에서 앞 기사가 끝나고 뒤 기사가 시작됩니다.
앞 기사는 전라도 도사 정종보(鄭宗輔)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전체가 49자입니다.
전라도 도사 정종보(鄭宗輔)에게 유시하였다. “도내에서 간행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 판목을 즉시 불태워 없애라.” 또 예조에 전교하였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김종직의 문집을 소장한 자가 있으면 즉시 내어 바치게 하라. 바치지 않는 자는 무겁게 논죄하라.”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 · kja_10407017_001
명령은 두 겹입니다. 이미 새겨진 판목은 즉시 소훼(燒毁), 곧 태워 없애라는 것이 하나입니다. 민간에 감춰둔 책은 즉시 수납(輸納), 곧 거두어 바치게 하고 내지 않는 자는 무겁게 논하겠다는 것이 둘입니다. 책을 없애는 절차로는 빈틈이 없습니다.
바로 뒤 기사가 문제입니다. 전체 1,403자로, 이날 하루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놓았습니다.
흐름은 이렇습니다. 먼저 임금이 전지(傳旨), 곧 명령문을 내립니다. 김종직이 보잘것없는 선비로 세조 때 과거에 붙어 성종 때 경연에 들어가고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며, 병으로 물러날 때도 성종이 곡식을 내려주었다고 짚습니다. 그렇게 임금의 은혜를 입은 사람인데, 그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선왕 때의 일을 거짓으로 적고 스승의 조의제문까지 실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이 기사의 몸통입니다. 조의제문이 서문까지 407자 전문으로 실립니다. 이어서 임금의 명령문은 그 글의 구절을 하나씩 짚어가며 무엇을 가리키는지 풀이합니다. 그리고 세조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말을 덧붙인 뒤, 삼품 이상의 관원과 대간(臺諫), 홍문관은 형벌을 의논해 올리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관원들이 무리를 지어 의견을 올립니다. 이 부분이 507자로 기사에서 가장 깁니다. 대역죄로 논단해 관을 열고 시신을 베자는 쪽이 가장 많고, 율문대로 처리하자는 쪽, 이미 죽은 사람이니 벼슬을 빼앗고 자손을 벼슬길에서 막자는 쪽으로 갈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106자에서 기사가 갑자기 장면으로 바뀌는데, 그 대목은 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태우라는 명령과 태워야 할 글이 한 자리에서 이웃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엿새 전으로 돌아가야 보입니다.
IV. 여섯 조목을 잘라 올린 날
7월 11일, 임금이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들이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실록청 당상 네 사람이 막아섭니다.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안침(安琛)입니다.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직접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곧은 기록[直筆]이 없어질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1일 · kja_10407011_001
사관 제도의 핵심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임금이 자기 시대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면 사관은 다음부터 곧게 쓸 수 없습니다. 이 논리는 조선에서 여러 번 되풀이됩니다. 2편에서 본 단종 즉위년의 사초 논쟁도 그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사초를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를 두고 아홉 사람이 다투었고, 그 회의록이 실록 안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원칙이 먼저 제시됩니다.
임금이이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들이라고 다시 명합니다. 당상들이 두 번째로 아뢰는데, 이 대목이 이번 편의 핵심입니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과연 조종조(祖宗朝)의 일에 관계되어 문제가 되는 내용이 있고, 그 가운데는 신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신들은 그것이 망령된 기록이라고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습니다. (…)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된 일이라 반드시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면, 신들이 마땅히 조사할 만한 부분만 따로 잘라서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필요한 일은 조사하실 수 있으면서도, 임금이 사초를 직접 보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맞을 것입니다.”
같은 기사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극돈 등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여섯 조목을 단취(斷取)해 봉해 들였습니다. 국역 제목의 절취는 원문에서 단취, 곧 잘라서 취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기사 안에 이 글자가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그렇게 하겠다는 제안으로, 한 번은 그렇게 했다는 서술로 나옵니다.
이 장면의 구조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사초 전체는 임금이 볼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문제가 되는 부분만 골라 뽑아 올린다. 원칙을 지키려는 절충이 곧 발췌본을 만드는 작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발췌본은 원본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사초 전체 안에서라면 여러 기사 중 하나였을 여섯 조목이, 봉투 하나에 담겨 문제 항목으로 확정되어 임금 앞에 놓입니다.
무오사화는 여기서 문이 열립니다. 막아선 사람과 골라낸 사람이 같은 네 사람입니다.
덧붙일 것 하나. 이극돈이 김일손과 사이가 나빴다거나 자기 비리가 사초에 적혀 있어 앙심을 품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이 기사에는 없습니다. 이 기사가 보여주는 것은 동기가 아니라 절차입니다. 이 편에서는 절차만 다룹니다.
V. 지우려면 먼저 옮겨 적어야 한다
7월 13일에는 김일손의 공초가 기사 하나로 남습니다(kja_10407013_001). 무엇을 적었느냐고 묻고, 그가 답하고, 그 답이 다시 기록됩니다. 사초를 문제 삼는 절차는 사초의 내용을 한 번 더 문서로 만드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7월 17일의 기사에서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납니다. 조의제문을 그대로 베껴 적은 대목이 이 기사에 두 곳 있습니다. 전문 407자가 한 번, 그 뒤의 구절 풀이 168자가 한 번입니다. 합하면 575자로, 기사 전체 1,403자의 41퍼센트입니다.
풀이 쪽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 대목은 “그가 말한 ○○이란 …이다”라는 형식으로 조의제문의 구절을 여섯 번 다시 인용합니다. 조룡(祖龍)은 진시황이니 세조를 시황에 견준 것이고, 왕(王)은 초 회왕의 손자 심(心)이니 의제를 노산군에 견준 것이고, 관군(冠軍)을 함부로 죽였다는 대목은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벤 일을 가리킨다는 식입니다.
죄를 논단하려면 무엇이 죄인지 지목해야 합니다. 지목하려면 그 구절을 다시 적어야 합니다. 없애기 위한 문서가 원문을 한 번 더 옮겨 쓰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지우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워진 실록」 2화에서 광해군일기 두 판본을 대조했을 때, 정초본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사관이 자기 이름을 걸고 쓴 사신왈(史臣曰)이었습니다. 없어진 비율이 59.1퍼센트로 전체 기준 15.1퍼센트의 네 배에 가까웠습니다. 그쪽은 편찬하는 손이 직접 덜어낸 경우이고, 이쪽은 죄를 밝히려는 손이 옮겨 적은 경우입니다. 지우는 절차와 심문하는 절차는 기록에 정반대로 작용합니다.
8편과 짝이 되는 자리
8편의 이이첨은 제목에 이름이 없는데 내용이 남은 경우였습니다. 졸기라 부르지 않은 기사 안에 838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9편의 김일손은 없애려 한 글이 없애는 절차 덕분에 남은 경우입니다. 둘 다 실록의 목차만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심문이 기록을 지키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도는 정반대였습니다. 다만 절차의 형식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사의 구성에서 읽어낸 해석이며, 사관이 그렇게 적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VI. 남은 네 글자
1,403자짜리 7월 17일 기사 안에서, 김일손이 쓴 글로 남은 것은 한자 네 자입니다.
일손이 그 글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충성과 분개한 마음을 이 글에 담았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 · kja_10407017_002
사초에 스승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김일손이 붙인 평은은 이우충분(以寓忠憤), 충성과 분개한 마음을 이 글에 부쳤다는 뜻입니다. 충(忠)과 분(憤) 두 글자가 핵심입니다. 그가 이 글을 우연히 베낀 것이 아니라 뜻을 알고 편들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전지는 이 네 글자를 그대로 끌어와 죄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래서 남았습니다. 죄를 무겁게 하려고 끌어온 네 글자가, 그의 문장 중 실록 본문에 실린 유일한 대목이 됐습니다. 1편의 이이에게 사관은 청백(淸白)이라는 최다 칭찬어를 쓰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주었고, 2편의 황희에게는 비난어 대신 제기(祭器) 이름을 빌려 에둘렀습니다. 사관이 말을 고르는 방식을 따라온 연재입니다. 김일손에게는 고를 말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고른 네 글자가 남았습니다.
VII. 362자와 248자와 0자
세 사람이 이 사건으로 엮여 있습니다. 부고의 길이는 이렇습니다.
김종직 362자 — 『성종실록』 1492년, 지중추부사 김종직의 졸기
이극돈 248자 — 『연산군일기』 1503년, 광원군 이극돈의 졸기
김일손 0자 — 없음
부관참시된 스승에게는 졸기가 있고, 처형된 제자에게는 없습니다. 이상해 보이지만 이유는 단순합니다. 김종직은 1492년에 벼슬자리에서 죽었고, 그때 사관이 362자를 썼습니다. 6년 뒤에 판정이 뒤집혀 관을 열고 시신을 베었지만, 이미 쓰인 문장은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김일손의 1498년 자리는 처음부터 국문 기사로 채워졌습니다.
부고는 죽은 자리에 놓이는 기록입니다. 뒤에서 채워 넣을 수 없습니다.
3편의 이황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졸기는 실제로 죽은 해가 아니라 한 해 앞선 자리에 놓여 있고, 죽을 때 없던 시호가 그 안에 이미 붙어 있습니다. 자리는 죽음을 따라가고 문장은 나중에 쓰이니 이런 어긋남이 생깁니다. 자리가 아예 다른 것으로 채워지면 문장이 들어설 곳이 없어집니다.
그 뒤의 이력이 이를 보여줍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김일손은 신원됐고, 순조 대에 이조판서가 추증됐습니다. 처형된 지 300년이 훌쩍 지난 뒤입니다. 벼슬은 그렇게 올라갔지만 졸기는 끝내 생기지 않았습니다. 명예는 뒤에서 회복할 수 있어도, 부고는 뒤에서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1503년, 이극돈의 졸기 248자가 실립니다. 김일손이 쓴 사초에서 여섯 조목을 단취해 봉해 올린 사람입니다. 그 기사의 인명 색인에 김일손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죽은 사관에게는 부고가 없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의 부고 안에 이름만 색인어로 남았습니다.
VIII. 이 글을 실록에 남겨둔 쪽은 누구인가
한 단계가 더 있습니다. 조서에 남는 것과 실록에 실리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1498년의 국문 기록은 그해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가 편찬된 것은 중종반정 이후입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쪽이 그의 재위를 정리하면서, 조의제문 407자가 실린 그 기사를 그대로 두기로 한 것입니다.
편찬 주체가 바뀌면 같은 인물의 기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지워진 실록」 1화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두고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새 편찬진이 앞선 판본의 문장을 덜어낸 경우가 아니라, 없애려던 글을 그대로 둔 경우입니다.
7월 17일 기사의 마지막 106자가 그 시선을 드러냅니다. 관대한 의견을 낸 이유청(李惟淸) 등의 이름에 임금이 붓으로 줄을 긋고 잡아오라 명하자, 나장 십여 명이 쇠사슬을 들고 뛰어들어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섰다는 대목입니다. 이 장면은 판결의 내용과 상관이 없습니다. 심문 조서에 들어갈 문장도 아닙니다. 누군가 그 자리를 보고 적었고, 편찬하는 쪽이 그것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읽는 이 글은 두 번의 선택을 거친 것입니다. 앞의 선택은 지우기 위해 옮겨 적은 것이고, 뒤의 선택은 남기기 위해 두어둔 것입니다. 같은 글자가 정반대의 목적을 두 번 통과했습니다. 다만 뒤쪽 선택의 동기까지는 기록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짐작입니다.
편집장의 메모
출판사에서 문제가 된 원고를 처리할 때 가장 이상했던 순간은 늘 같았습니다. 이 대목을 빼자고 결정하려면 먼저 그 대목만 따로 뽑아 회의 자료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삭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사본을 한 부 더 만드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발췌본은 원고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읽힙니다. 앞뒤가 잘려 나갔으니까요.
1498년 7월 11일에 실록청 당상들이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자기 사초를 안 본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여섯 조목만 잘라 봉했고, 그 봉투가 26일 뒤에 35살 사관의 사형 판결서가 됐습니다. 기록을 없애려는 힘이 가장 꼼꼼하게 일할 때, 그 힘은 자기도 모르게 정본을 하나 만들어 둡니다.
출처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1일 · kja_10407011_001 — 원문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3일 · kja_10407013_001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 · kja_10407017_001 — 원문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 · kja_10407017_002 — 원문
- 『성종실록』 1492년 · kia_12308019_004 (김종직 졸기 362자)
- 『연산군일기』 48권, 연산군 9년(1503) 2월 27일 · kja_10902027_004 (이극돈 졸기 248자)
- 인용문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 글자 수는 실록 원문을 로컬 인덱스로 직접 집계한 값입니다.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은 제외했습니다. 구간 분할은 필자의 판단입니다.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9편. 다음은 김종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