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매주 한 명씩, 사관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는지를 봅니다. 첫 번째는 이이입니다.

율곡 이이(李珥)의 부고는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9자로 끝납니다. 그런데 같은 죽음을 기록한 다른 실록에는 같은 사람의 부고가 916자로 실려 있습니다. 102배 차이입니다.
말풀이
졸기(卒記) · 조선의 부고 기사입니다. 벼슬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실록에 그 사실을 적으면서, 사관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짧게 덧붙였습니다. 그 덧붙인 인물평을 졸기라고 부릅니다. ‘졸(卒)’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졸기는 사관이 고르고 다듬어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편집된 글입니다. 무엇을 적을지 고른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고, 이 연재가 보려는 것이 바로 그 고름의 흔적입니다.
I. 이 사람
이이(李珥), 1536~1584년.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입니다.
죽을 때 맡고 있던 벼슬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였고, 나이는 마흔아홉이었습니다.
말풀이
자(字) · 어른이 된 뒤에 쓰던 또 하나의 이름입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이 있어서, 친구나 손윗사람이 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호(號) · 본인이 짓거나 주변에서 붙여 준 별명 같은 이름입니다. 흔히 살던 곳이나 좋아하는 것에서 따왔습니다. ‘율곡’은 밤나무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시호(諡號) · 죽은 뒤에 나라가 정해서 내려 주는 이름입니다. 글자마다 뜻이 정해진 규정집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시호 두 글자는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나라의 최종 평가에 가깝습니다.
본관(本貫) · 그 집안이 뿌리를 둔 지역입니다. 같은 이씨라도 본관이 다르면 남남으로 보았습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 관리를 뽑고 자리를 옮기는 일을 맡은 관청인 이조의 우두머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인사 업무를 총괄하는 장관에 해당합니다.

II. 아홉 글자
『선조실록』에 실린 이이의 졸기에는 인물평이 아예 없습니다. 죽었다는 사실만 적혀 있습니다. 한문 원문 전체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甲午/吏曹判書李珥卒。
기호까지 포함하면 12자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사관이 쓴 것은 9자뿐입니다.
| 부분 | 글자 수 | 무엇인가 |
|---|---|---|
| ○ | 1 | 기사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표시. |
| 甲午 | 2 | 날짜를 나타내는 간지. 사관이 썼습니다 |
| / | 1 | 날짜와 본문을 가르는 기호. 자료로 만들면서 넣었습니다 |
| 吏曹判書李珥卒 | 7 | 본문. 사관이 썼습니다 |
| 。 | 1 | 마침표. 실록 원본에는 구두점이 없었습니다 |
이 연재는 사관이 쓴 글자만 헤아립니다. 지금 원문에 붙어 있는 점과 쉼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영인본을 저본으로 표점 작업을 하면서 넣은 것입니다. ○와 /도 기사를 나누기 위한 표시일 뿐, 사관이 인물평으로 적은 글자가 아닙니다. 보통 글자 수를 헤아리는 프로그램들이 공백이나 문장 기호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핵심을 얘기하자면 이이의 부고는 아홉 자입니다.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갑오일.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죽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이의 학문은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큰 갈래를 이루었고, 서인(西人)은 그를 학문의 뿌리로 받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부고에 그가 쓴 책 이름 하나 없습니다. 『선조실록』만 보면 이이가 무엇을 썼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III. 916자가 담은 것
이이의 죽음에 대해 조선은 기록을 하나 더 갖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입니다. 거기 실린 이이의 졸기는 916자입니다. 9자의 102배입니다.
두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먼저 눈에 걸리는 것이 날짜입니다. 『선조실록』은 선조 17년 1월 16일에 이이의 죽음을 적었고, 『선조수정실록』은 같은 해 1월 1일에 적었습니다. 보름이 어긋나 있습니다.
이유는 수정실록의 편집 방식에 있습니다. 뒤에 다시 쓴 실록은 여러 자료를 모아 한 달치를 하나로 묶고, 그 묶음을 그달 초하루에 몰아 적었습니다. 「지워진 실록」 1화에서 1592년 이순신 기사를 헤아려 보니 여섯 건이 모두 초하루에 놓여 있었습니다. 5월 1일, 6월 1일, 7월 1일 하는 식입니다. 같은 사건을 『선조실록』은 5월 23일, 6월 21일, 7월 9일처럼 흩어진 날짜에 적었습니다.
이이가 정월 초하루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달 기록이 거기 모여 있을 뿐입니다. 날짜별로 적은 『선조실록』 쪽이 실제 죽은 날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문장이 같습니다. 수정본도 이조판서이이졸(吏曹判書李珥卒), 그 일곱 자로 문을 엽니다. 그 뒤로 900자가 넘게 흘러갑니다.
이어지는 것은 임종 장면입니다. 아래 번역은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이이는 병조판서가 된 뒤 온 힘을 다해 국사에 힘쓰다가 병을 얻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중해지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고 약을 쓰게 하였다. 당시 서익(徐益)이 순무어사로 관북 지방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은 그에게 이이를 찾아가 변방의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이 말하였다. “병세가 이제 조금 나아지고 있는데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나지 않겠다고 사양하시기를 청합니다.” 이이가 말하였다. “내 이 몸은 오직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 때문에 병이 다시 심해진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운명이다.” 이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서익을 맞이하고, 변방에 대한 여섯 조목의 방략을 입으로 불러 주어 받아 적게 하였다. 글을 다 쓰자 숨이 막혀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으나 하루가 지난 뒤 죽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병조판서(兵曹判書)는 국방을 맡은 관청의 우두머리입니다. 순무어사(巡撫御史)는 임금이 지방으로 보내 민심과 군사 상황을 살피게 하던 임시 파견 관리이고, 관북(關北)은 지금의 함경도입니다. 방략(方略)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계획을 뜻합니다.
곧이어 장례 장면이 나옵니다.
백관과 동료·친구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 호위 군사와 서울의 백성들, 낮은 관직의 관리와 아전·종들까지 모두 달려와 제사를 올리고 곡하였다. 가난한 골목의 평민들까지 서로 조문하며 눈물을 흘려 말하였다. “백성들에게 복이 없구나.” 발인하던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전송하였다. 횃불이 하늘을 밝힐 정도였고 그 행렬이 수십 리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수십 리에 걸친 횃불 행렬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IV. 청백이라는 말이 없다
이이는 서울에 자기 집 한 채가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조차 없었다. 친구들이 수의와 부의 및 장례 비용을 마련하였고, 또 작은 집까지 사서 가족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 뒤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사관은 이이가 청렴했다고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빈 곳간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록 원문 전체를 담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이 졸기 916자 안에 청백(淸白)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청백리, 들어보셨죠? 청백은 벼슬아치가 재물에 손대지 않고 깨끗하다는 뜻을 지닌 대표적인 칭찬어입니다. 같은 뜻으로 쓰이는 염(廉) 자도, 검소하다는 뜻의 검(儉) 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실록 전체에 등장하는 졸기 2,179건에서 검색해 보면 청백은 40번 나옵니다. 청렴을 가리키는 여러 말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인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평가는 조선에서 최고 등급의 인물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이의 졸기에는 그런 칭찬의 말이 없습니다. 사관은 칭찬의 말 대신 집도 없고, 곡식도 없고, 장례비조차 없고, 유산도 없는 집안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가지만 정확히 해 두겠습니다. 맑을 청(淸) 자 자체는 두 번 나옵니다. 다만 둘 다 청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는 청현(淸顯), 곧 명예롭게 여겨지던 벼슬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청명(淸明), 곧 마음이 맑다는 성품 서술입니다. 사관은 이 글자를 재물에 깨끗했다는 평가어로는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사관이 이이에게 쓴 칭찬어는 다른 계열입니다. 신이(神異), 총명(聰明), 지성효순(至性孝順). 나면서부터 남달랐고, 머리가 밝아 일곱 살에 경전을 이해했고,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는 뜻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는 형용사를 쓰지 않고 장면을 놓는 쪽을 골랐습니다.
이 대목을 처음 쓸 때 필자는 청백을 “졸기 전체에서 가장 많이 쓰인 칭찬어”라고 적었습니다. 틀린 서술이었습니다. 필자가 만든 어휘 사전에 효행 계열의 단어가 들어 있지 않아서, 그쪽을 아예 헤아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5편에서 벼슬하지 않은 인물의 졸기를 읽다가 사전을 넓혔고, 다시 헤아려 보니 효우(孝友)가 41번으로 청백 40번보다 한 번 더 많았습니다. 청백은 청렴 계열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이지, 전체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이의 졸기에 청백이 없다는 사실도, 그 자리에 빈 곳간을 놓았다는 관찰도 그대로입니다. 틀린 것은 “가장 많이”라는 한 마디였습니다. 도구를 넓히지 않으면 도구가 보여 주는 것만 보게 된다는 것을 이 편을 고치면서 배웠습니다.
V. 이 부고는 언제 쓰였나
수정본 이이 졸기 안에는 이이가 죽은 뒤의 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입니다. 부고를 읽다 보면 시간이 자꾸 앞으로 흘러갑니다.
첫 번째는 작은 글씨로 끼워 넣은 주석입니다.
【부인 노씨(盧氏)는 임진왜란 때 죽었는데, 조정에서 그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습니다. 이이는 1584년에 죽었습니다. 자기 부고 안에서 8년 뒤의 일을 전해 듣고 있는 셈입니다. 정문(旌門)은 충신이나 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 집 앞에 세워 주던 문입니다.
두 번째는 졸기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당파 싸움이 크게 성하였다. 한쪽 세력을 제거하고는 조정이 이제 바로잡혔다고 하였으나, 그들 내부에서도 서로 어긋나고 갈라져 마침내 사분오열되었고 국가에 끝없는 화를 끼쳤다. 임진왜란에 이르러서는 변경의 방어가 스스로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이가 평소 미리 걱정하여 앞서 말했던 일들은 하나도 어긋남 없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이것은 부고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적는 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죽은 뒤 수십 년을 겪고 나서 되돌아본 글입니다. 살아 있을 때 그가 옳았다는 판정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편찬 주체를 봐야 합니다. 두 실록은 같은 시대를 다뤘지만, 쓴 사람들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光海君) 때 편찬됐습니다. 이때 실록을 만드는 일을 주도한 것은 북인이었습니다. 북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당파입니다. 살아 있을 때 이이는 동인 계열의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던 쪽의 후예가 자신의 부고를 쓴 셈입니다. 그 부고가 9자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효종 8년(1657) 1월, 그 일을 맡고 있던 관청이 이름을 바꾸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광해조일기』를 수정할 때 쓰던 찬수청(纂修廳)이라는 이름을 선조의 실록에까지 그대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임금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이름이 실록수정청(實錄修正廳)입니다. 이이가 죽고 70여 년 뒤의 일입니다.
그때 붓을 잡은 이들은 서인이었습니다. 그를 문묘에 모시자고 오래 주장해 온 쪽도 서인이었습니다. 다만 그 주장이 실현되는 것은 한참 뒤입니다. 이이가 성혼(成渾)과 함께 문묘에 오르는 것은 수정실록이 완성되고 25년이 더 지난 숙종 8년(1682) 5월의 일입니다. 그날 반포된 교서에도 세 조정에 걸쳐 거듭 청해 온 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자리마저 고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사가 이루어지고 7년 뒤인 1689년 3월 18일,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내쳐집니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직후입니다. 그리고 다시 5년 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돌아온 그해 5월에 예조가 두 사람을 도로 모실 절차를 아룁니다. 그 일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지방 향교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말풀이
당파(黨派) · 생각과 이해가 같은 관리들이 모여 이룬 무리입니다. 선조 때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고, 뒤에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이이는 서인 쪽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탄핵(彈劾) · 관리의 잘못을 임금에게 적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년에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임금으로 세운 사건입니다. 이 일로 정권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갔습니다.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입니다. 여기에 함께 모셔지는 것은 학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예우였고, 그래서 누구를 넣을지가 늘 다툼거리였습니다. 모시는 것을 종사(從祀), 빼내는 것을 출향(黜享)이라 했습니다.
기사환국(己巳換局)·갑술환국(甲戌換局) · 환국은 정권이 통째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들어섰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뒤집혔습니다.
그를 미워한 사람들이 쓴 기록과,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 다시 쓴 기록. 그 사이에 102배가 있습니다.
다만 이 값이 온전히 당파 사이의 거리인지는, 다른 인물들을 함께 놓고 다시 봐야 합니다.
VI. 다른 인물들은 어땠나
늘어난 것은 이이만이 아니었고, 오히려 줄어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두 판본 모두에 졸기가 실린 인물은 35명입니다. 그 가운데 25명이 늘었고 10명이 줄었습니다. 아래 표의 ‘배율’은 원본에 견주어 수정본이 몇 배가 되었는지를 뜻합니다. 1보다 크면 늘어난 것이고, 1보다 작으면 줄어든 것입니다.
| 인물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배율 |
|---|---|---|---|
| 이이 | 9자 | 916자 | 101.8배 |
| 노수신 | 10자 | 269자 | 26.9배 |
| 심의겸 | 8자 | 183자 | 22.9배 |
| 이황 | 39자 | 706자 | 18.1배 |
| 정철 | 120자 | 1,022자 | 8.5배 |
| 성혼 | 68자 | 228자 | 3.4배 |
| 조식 | 578자 | 445자 | 0.8배 |
| 유성룡 | 605자 | 300자 | 0.5배 |
| 최흥원 | 126자 | 34자 | 0.3배 |
늘어난 쪽에 서인 계열이 몰려 있습니다. 정철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고, 심의겸은 동인과 서인이 갈라질 때 서인 쪽에 섰던 사람입니다. 이이와 함께 문묘에 오른 성혼도 3.4배 늘었습니다. 반대로 절반으로 줄어든 유성룡은 남인이었고, 북인 계열 학자들이 스승으로 받든 조식도 줄었습니다. 이이의 부고가 아홉 글자에서 916자가 되는 동안, 유성룡의 부고는 605자에서 300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 설명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이황은 남인이 학문의 종주로 받든 인물인데도 18.1배 늘었습니다. 35명 가운데 여섯째로 큰 배율입니다.
이이의 졸기 안에 실마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이가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공부방을 세우고 주자를 모시면서,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함께 모셔 학문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대목입니다. 서인이 쓴 이이의 부고 안에서도 이황은 스승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황이 당파의 경계 바깥에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실마리일 뿐이고, 그래서 이황의 졸기가 늘었다는 것은 저의 짐작입니다.
그리고 35명 전부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당파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섞여 있습니다. 배율이 10배를 넘는 사람은 모두 12명인데, 그 12명의 원본은 하나같이 40자를 넘지 않습니다. 반대로 줄어든 10명 가운데 8명은 원본이 100자를 넘습니다. 원본 글자 수가 작으면 수정본에서 어떻게 쓰든 배율은 커지기 십상입니다. 10자짜리에 100자를 보태면 11배가 되지만, 500자짜리에 100자를 보태면 1.2배에 그칩니다.
그렇다고 원본의 글자 수가 작다고 수정본에서 반드시 늘어난 것도 아닙니다. 심수경의 졸기는 원본이 13자인데 수정본에서 10자로 오히려 줄었습니다. 빈자리가 있다고 모두 채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본 졸기가 왜 이렇게 짧았을까요? 『선조실록』을 쓰는 데 사용할 사초를 임진왜란 때 대부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조실록』은 즉위년부터 선조 25년 3월까지 25년치가 26권인데 비해, 왜란 이후 16년치는 195권입니다. 왜란 전에 죽은 사람은 원본 기록 자체가 짧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 표에서 두 가지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사초가 없어서 채운 것과, 사초가 있는데도 고쳐 쓴 것입니다. 배율이 커진 12명은 없어진 기록의 크기에 가깝습니다. 원본이 넉넉했던 서인 정철이 8.5배로 늘고, 남인 유성룡이 0.5배로 줄어든 점은 선택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분량과 어휘는 필자가 DB에서 프로그램을 돌려 헤아린 값이고, 누가 실록을 만들었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 둘을 잇는 문장,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썼다”는 인과는 저의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늘렸는지, 왜 줄였는지를 적어 두지 않았습니다.
말풀이
사초(史草) · 사관이 그날그날 적어 두던 기록입니다. 실록을 만들 때 쓰는 재료이므로, 사초가 없어지면 그 시기의 실록은 얇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록수정청(實錄修正廳) · 이미 만들어진 실록을 다시 쓰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입니다. 효종 8년(1657)에 이 이름으로 정해졌고, 그 전에는 찬수청(纂修廳)이라 불렀습니다.
권(卷) · 실록을 묶은 단위입니다. 한 권의 두께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권수를 비교하면 대략의 분량 차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3편에서 이황의 졸기를 따로 다뤘습니다.

원고를 덜어내는 일보다 무서운 것은 늘리는 일입니다. 덜어낸 자리는 표가 나지만, 채워 넣은 글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에 원문을 끝까지 읽고 나서 마음에 남은 것은 부인 노씨의 세주 14자였습니다. 거기에 임진왜란이 들어 있었습니다. 1584년의 부고에 1592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채워 넣은 글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9자짜리 부고를 916자로 다시 쓴 사람들이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이가 몰랐던 결말을 알고 있었고, 그 결말을 아는 눈으로 그의 일생을 다시 배열했습니다. 그게 복원인지 개작인지, 필자는 모르겠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17년(1584) 1월 16일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17년(1584) 1월 1일 · 원문 보기
『효종실록』 8년(1657) 1월 12일 · 원문 보기
『숙종실록』 8년(1682) 5월 21일 · 원문 보기
『숙종실록』 15년(1689) 3월 18일 · 원문 보기
『숙종실록』 20년(1694) 5월 25일 · 원문 보기
본문의 인용문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국역본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글자 수는 한문 원문에서 부호와 띄어쓰기를 뺀 값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교감으로 고치거나 채워 넣은 글자(〔 〕와 [ ] 안쪽)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집계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41만여 건)를 직접 돌린 것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편. 다음은 황희입니다. 이이와 정반대로, 사관이 할 말이 너무 많았던 사람입니다. 연재 전체 목차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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