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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기 3 · 이황 — 39자, 그리고 1년 어긋난 자리

    졸기 3 · 이황 — 39자, 그리고 1년 어긋난 자리

    졸기 1편에서 저는 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선조실록』의 졸기와 『선조수정실록』의 졸기 분량을 인물별로 나란히 놓고 얼마나 늘고 줄었는지 비교했습니다. 그 표에서 한 사람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이황(李滉)입니다. 남인 학맥의 비조(鼻祖)인데 서인이 다시 쓴 실록에서는 13.5배로 늘었습니다. 저는 “예외”라고 적어두고 넘어갔습니다.

    이번에 그 칸의 분모를 열어봤습니다. 배율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열어보니 다른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I. 이 사람

    •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 죽을 때 벼슬: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으뜸 벼슬로 실무가 없는 명예직에 가깝습니다. 이황은 말년에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했고 죽을 때도 향리에 있었습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습니다.

    II. 분모를 열어보니

    『선조실록』의 이황 졸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辛丑/右贊成李滉卒, 字景浩, 七十。 贈領議政, 諡文純, 學者稱退溪先生。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
    — 『선조실록』 3권 43장 B면

    맨 앞의 ○는 기사가 시작된다는 표시이고, 신축(辛丑) 뒤의 빗금은 날짜와 본문을 가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둘째 줄, 대괄호 안의 여덟 글자가 이 편의 첫 단서입니다. 선종소경대왕실록 권3 마침. 졸기 바로 다음이 권의 끝입니다.

    옮기면 이렇습니다.

    신축일. 우찬성 이황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이며, 일흔 살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순이며, 학자들은 퇴계 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

    구두점을 빼면 한자 39자입니다. 무엇으로 이루어진 39자인지 덩어리로 나눠 세어봤습니다.

    졸기 39자의 구성날짜辛丑2자누가 죽었나右贊成李滉卒6자자와 나이字景浩, 七十5자추증과 시호贈領議政, 諡文純7자세상의 호칭學者稱退溪先生7자학문은 어디에 있나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12자 · 31%가장 긴 대목은 인물평이 아니라 "여기 없다"는 지시다.

    사관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 적혀 있나에 가장 많은 글자를 썼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조선 최대의 유학자입니다. 사후에 문묘에 종사되고 서원이 전국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 죽음이 정사에서 39자를 받았습니다.

    III. 어긋난 것들

    39자만 놓고 보면 그저 짧은 기록입니다. 서지 정보를 함께 보면 짧은 것보다 이상한 점이 나옵니다.

    첫째, 권의 맨 끝입니다. 앞서 원문에서 본 대로입니다. 서지로는 3권 43장 B면이고, 43장이 이 권의 마지막 장입니다. 졸기 뒤로 기사가 더 없습니다. 권을 닫기 직전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 해가 1년 어긋나 있습니다. 이 졸기는 선조 2년(1569) 12월조에 실려 있습니다. 이황이 죽은 것은 선조 3년(1570) 12월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는 이 기사의 날짜를 ‘미상’으로 처리해두었습니다.

    셋째, 그런데 날짜 자체는 맞습니다. 원문 첫머리의 신축(辛丑)은 그날의 일진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이 선조 3년 12월 초하루를 갑오(甲午)로 적었으니, 거기서 세면 신축일은 그달 8일이 됩니다.

    이 계산은 검증이 됩니다. 뒤에 나올 추증 기사가 같은 달 19일이고 간지로 임자(壬子)라 적혀 있는데, 초하루를 갑오로 놓고 세면 임자일이 정확히 19일입니다. 두 판본의 간지가 서로 맞물립니다. 졸기의 신축일은 선조 3년 12월 8일이고, 이황이 죽은 날로 알려진 날과 같습니다.

    날짜는 정확한데 해가 틀렸습니다.

    넷째, 시호가 이미 적혀 있습니다. 이게 가장 분명한 흔적입니다. 졸기 본문에 `諡文純` 세 글자가 있습니다. 시호는 문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같은 『선조실록』을 따라가 보면, 죽은 지 3년이 지난 1573년 11월까지도 양사(兩司)와 사헌부가 이황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거듭 청하고 있습니다. 시호는 그 뒤에 정해졌습니다.

    죽은 자리에 놓인 문장이 3년 뒤의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이 39자는 죽음을 지켜본 사관이 그날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한참 뒤에 누군가가 되짚어 쓴 문장입니다.

    다섯째, 관직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右贊成`이라 했고, 『선조수정실록』은 숭정대부 판중추부사라 했습니다. 우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벼슬입니다.

    IV. 열하루와 1년

    같은 『선조실록』 안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선조 3년 12월 19일자입니다. 이것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壬子 / 都目政。 上特贈李滉領議政。 蓋追褒鉅儒名賢也。
    임자일. 都目政(정기 인사)이 있었다. 임금이 특별히 이황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이는 무릇 당대의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추모하여 높이 기린 것이었다.
    — 『선조실록』 4권 23장 A면

    도목정은 관원을 한꺼번에 심사해 자리를 정하는 정기 인사입니다. 그날의 인사 기록 끝에 이 세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죽은 날이 12월 8일, 추증이 12월 19일. 열하루입니다. 조정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기록과 이 추증의 기록이 실록에서는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선조실록』이 놓아둔 자리실제사망 12.8추증 12.19열하루1569실록졸기선조 2년 12월조 · 권3 끝추증선조 3년 12월 19일 · 권41569열하루 사이의 일이 실록에서는 권을 넘어 1년 넘게 벌어져 있다

    권도 다르고 책도 다릅니다. 졸기는 2책 3권, 추증은 3책 4권입니다. 추증 기사만 읽으면 무엇에 대한 추증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한 해 앞 권의 맨 끝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V. 왜 이렇게 됐는가

    여기서부터는 확인되는 사실을 놓고 잇는 해석입니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사초를 잃었습니다. 사관 몇이 사초를 불태우고 달아났고, 선조 즉위년부터 왜란 직전까지 25년치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가 이 불균형입니다.

    『선조실록』 221권의 분포즉위년~25년 3월약 25년분26권왜란 이후~승하약 16년분195권기간은 앞이 더 긴데 분량은 뒤가 7.5배다. 임진왜란 이전 사초가 소실된 결과다.

    25년치가 26권, 16년치가 195권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열람 목록을 보면 이황이 죽은 선조 3년에는 열두 달 중 다섯 달(4·5·7·8·12월)의 기사만 남아 있습니다.

    실록청이 꾸려진 것은 1609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39년 뒤입니다. 편찬자들 앞에 그날의 사초는 없었습니다. 이황이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신축일이라는 날짜도 어디선가 얻었고, 나중에 내려진 시호도 알고 있었지만, 그 신축일이 어느 해 12월인지는 확정하지 못한 채 39자를 적어 권 끝에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초를 잃었다는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고, 39자와 1년의 어긋남과 시호의 시차는 센 값이며, “확정하지 못한 채 권 끝에 붙였다”는 것은 제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그 자리에 놓았는지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VI. 사관이 가리킨 곳

    39자의 마지막 대목으로 돌아옵니다.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 —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

    앞에서 세어본 12자입니다. 39자 가운데 가장 긴 덩어리이고, 전체의 31%입니다.

    졸기는 인물평을 적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사관이 한 줄로 판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판정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을 가리킵니다. 내가 여기 적지 않아도 그의 학문은 문집에 있고, 그 문집은 이미 세상에 전한다는 말입니다.

    세 편이 쌓이니 결이 보입니다.

    • 이이 — 청렴을 말할 자리에서 청백(淸白)을 쓰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줬습니다.
    • 황희 — 부정을 말할 자리에서 보궤(簠簋)라는 제기를 빌려 에둘렀습니다.
    • 이황 — 인물평을 쓸 자리에서 문집을 가리켰습니다.

    앞의 둘은 쓸 말을 고르지 않은 것이고, 이황의 경우는 쓰기를 넘긴 것입니다.

    다만 평가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본 추증 기사의 끝 문장이 그것입니다.

    蓋追褒鉅儒名賢也 — 이는 무릇 당대의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추모하여 높이 기린 것이었다.

    거유(鉅儒)와 명현(名賢), 네 글자입니다. `蓋~也`는 사관이 사태를 요약하거나 총평을 내릴 때 쓰는 형식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이황에 대한 평가는 졸기에 없고 여기에 있습니다. 인물평을 적는 자리는 문집으로 넘기고, 정기 인사 기록의 끝에 네 글자를 붙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두 기사가 이렇게 갈라져 있습니다. 죽음에는 판정이 없고, 예우에는 판정이 있습니다. 그 둘은 원래 열하루 사이의 일인데, 실록에서는 권을 넘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집을 가리킨 그 손짓이, 뒤에 뜻밖의 방식으로 되돌아옵니다.

    VII. 87년 뒤, 그 문집으로

    『선조수정실록』이 완성된 것은 1657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87년 뒤입니다.

    수정하자는 말은 훨씬 앞서 나왔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 반정 넉 달 뒤의 경연 자리입니다. 이수광이 아룁니다.

    宣祖朝實錄, 纂定於賊魁之手, 羞辱甚矣。 宜令改纂。
    선조조실록은 역적의 우두머리 손에서 편찬되었으니 수치와 모욕이 심합니다. 마땅히 다시 편찬하게 하소서.

    이어서 이정귀가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합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가 계축년의 화를 입어 쫓겨났는데, 이이첨이 정국을 잡은 뒤 초고를 모두 없애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묻습니다.

    然則今欲改正, 將何所據?
    그렇다면 이제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근거로 삼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편에서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대목입니다.

    如《政院日記》, 可考。 且聞外間有朝報, 自戊辰至戊子云, 而間或缺失, 當參以聞見。 朝臣衰老, 漸忘故事, 須速改正。
    《정원일기》 같은 것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들으니 민간에 조보가 있어 무진년부터 무자년까지의 기록이 있다고 하나, 간혹 빠진 곳이 있으니 견문을 함께 참고해야 합니다. 조정 신하들이 늙고 쇠해 옛일을 점차 잊고 있으니, 속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8월 18일

    승정원일기가 있고, 민간에 도는 조보가 있고, 그것마저 빠진 데가 있으니 사람들의 견문을 보태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늙어 옛일을 잊어가고 있다.

    실록을 다시 쓰겠다는 자리에서 나온 답이 사람의 기억입니다. 1623년입니다. 이황이 죽은 지 53년째입니다.

    그런데도 일은 빨리 되지 않았습니다. 수정이 실제로 결정된 것은 18년 뒤인 1641년, 대제학 이식의 상차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식은 1643년 적상산성 사고에 내려가 고칠 곳을 뽑아 왔고, 1646년 파직된 뒤 이듬해 죽었습니다. 작업은 중단됐다가 1657년에야 다시 열려 그해 가을 끝났습니다. 이정귀가 “신하들이 늙어간다”고 말한 지 34년 뒤입니다.

    무엇으로 썼을까요. 사초는 없었습니다. 편찬자들이 모은 것은 집안에 전하는 사초와 비문, 행장, 야사, 잡기 같은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선조실록』의 사관이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고 가리킨 바로 그 자리에서, 후대의 편찬자들이 재료를 가져왔습니다. 39자가 비워둔 곳을 채운 글의 출처가, 39자가 지목한 곳입니다.

    덧붙임
    그렇게 다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이황 졸기는 죽음과 조정의 예우를 적은 뒤, 이황이 병중에 아들에게 남긴 당부를 옮깁니다. 나라에서 지내는 장례를 사양하라는 것, 무덤 길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 작은 돌 앞면에 여덟 글자만 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늘그막에 도산에 숨은 진성 이씨의 묘. 관직이 하나도 없는 여덟 글자입니다. 비문을 줄이라고 한 사람의 기록이, 그 사람을 되찾으려는 실록에서 열 배 넘게 늘어났습니다.

    VIII. 그래서 배율표는

    처음 물었던 13.5배로 돌아갑니다. 이제 분모가 무엇인지 압니다. 사초 없이 적힌 39자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1편에서 이황의 원본을 74자로 세었습니다. 그 74자에는 졸기 뒤에 붙은 권말 표기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 열다섯 자가 들어 있습니다. 권의 마지막 기사라서 생긴 일입니다. 졸기만 세면 구두점을 포함해 쉰여덟 자, 한자만 서른아홉 자입니다. 배율을 재는 자리에 실록의 마침표가 섞여 들어간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배율은 편찬자가 이황을 얼마나 높였는지를 재는 숫자가 아닙니다. 상당 부분은 원본에 무엇이 없었는지를 재고 있습니다. 이황이 예외로 보였던 것은 제가 그 숫자를 당파 하나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1편의 표를 원본 글자수 쪽에서 다시 보면 두 무리가 갈립니다. 크게 늘어난 이이·노수신·심의겸·이황은 원본이 열 자에서 일흔 자 남짓뿐이었습니다. 반대쪽 정철·김명원·최흥원·유성룡은 원본이 백오십 자를 넘습니다. 앞의 무리에서는 무엇을 쓰든 배율이 커집니다. 뒤의 무리에서 서인 정철이 7.8배로 늘고 남인 유성룡이 0.5배로 줄어든 것, 그쪽이 선택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사초가 없으면 채우고, 사초가 있으면 고른다. 1편의 표는 그 둘을 한 숫자에 담고 있었고, 저는 뒤엣것만 보고 결론을 냈습니다.

    다만 이 대목은 아직 표본을 다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서른다섯 명 전체로 넓혔을 때도 같은 갈림이 유지되는지 확인한 뒤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1편은 이 문제를 반영해 고쳐 두었습니다.

    IX. 편집장의 메모
    교정지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틀린 문장이 아니라 맞는 문장입니다. 틀린 문장은 걸리지만, 맞는데 이유가 틀린 문장은 그대로 인쇄됩니다. 1편의 배율표가 그랬습니다. 숫자는 다 맞았고 결론도 대체로 맞았는데, 둘을 잇는 이유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39자를 읽으면서 오래 걸려 있던 대목이 있습니다. 사관은 쓸 수 없을 때 지어내지 않았고, 대신 어디에 있는지를 적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저자에게 가장 자주 부탁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채우지 말고, 모른다고 쓰거나 아는 사람을 가리켜 달라고요.

    87년 뒤의 편찬자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재료를 찾았습니다. 출처를 밝혀둔 문장은 당장은 초라해 보여도 나중에 길이 됩니다. 빈칸을 그럴듯하게 메운 문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39자가 오래 남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3권 43장 B면 · 원문 보기

    『선조실록』 4권 23장 A면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4권 · 원문 보기

    『인조실록』 인조 1년 8월 18일 · 원문 보기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3편. 다음은 정철입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두 실록이 정반대로 쓴 졸기를 나란히 놓겠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졸기 2 · 황희 — 삭제되지 않은 문장

    졸기 2 · 황희 — 삭제되지 않은 문장

    지난 편의 이이는 열두 글자였습니다. 이번에는 정반대입니다. 사관이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중 무엇을 남길지를 두고 아홉 명이 모여 다퉜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록이 실록에 남았습니다.

    I. 이 사람

    황희(黃喜), 1363~1452.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입니다.

    재상으로 스물네 해를 지냈고, 죽을 때 아흔이었습니다. 졸기는 시호의 뜻까지 풀어 적어두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멀리 미치는 것이 익(翼), 재상으로서 능히 끝을 잘 마치는 것이 성(成)입니다.

    황희 초상화
    황희 초상화

    II. 한 문서 안의 두 문장

    부고에 칭찬을 늘어놓고 끝에 아쉬운 점 한 줄 붙이는 일은 흔합니다. 황희의 졸기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앞쪽에서 사관은 이렇게 씁니다.

    황희는 너그럽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무거워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풍채가 크고 뛰어났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을 검소하게 다스렸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못 박습니다. 재상으로 있은 스물네 해 동안 조정 안팎이 우러러보며 모두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고.

    그런데 몇 문단 뒤에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너그러워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부족하였고, 청렴하고 절조 있는 지조가 모자랐다. 오랫동안 정권을 맡아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았다.

    모두가 어질다고 했다는 문장과, 비난이 적지 않았다는 문장이 한 문서 안에 있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그랬다”는 형식입니다. 어느 쪽이 그 사람들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III. 사관이 고른 단어

    지난 편을 기억하실 겁니다. 실록 전체 졸기 2,179건에서 청백(淸白)은 40회로 가장 많이 쓰인 칭찬어였습니다. 이이의 졸기에는 그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에 남은 곡식이 없었다는 장면이 놓여 있었습니다. 청렴하다고 쓰는 대신 빈 곳간을 보여준 것입니다.

    황희의 졸기에서 사관은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재물을 탐한다”고 옮긴 대목의 원문은 `頗有簠簋之誚`입니다. 보(簠)와 궤(簋)는 제사 때 곡식을 담는 그릇입니다. 뇌물도 부정도 아니고 제기(祭器)입니다.

    옛 문헌에서 관리의 부정을 지목할 때, 죄를 직접 말하지 않고 “제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에둘러 말하는 관용이 있었습니다. 대신에 대한 예우입니다. 사관은 그 오래된 표현을 꺼내 씁니다. 뇌물이라 쓰지 않고, 그릇을 빌려 씁니다.

    이이에게는 칭찬어를 쓰지 않고 장면을 놓았고, 황희에게는 비난어를 쓰지 않고 옛말을 놓았습니다. 두 번 다 사관은 직접적인 단어를 피했습니다.

    IV.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적었나

    비난만 적고 끝냈다면 소문에 그쳤을 겁니다. 사관은 근거를 셋 댑니다. 셋 다 가족입니다.

    처남. 처남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자, 황희는 풍문에서 나온 일이라며 글을 올려 그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들. 아들 치신(致身)이 몰수당한 과전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받게 해 달라고 글을 올려 청했습니다.

    그리고 황중생. 황중생(黃仲生)이라는 자를 서자로 삼아 집에 드나들게 했는데, 중생이 사형죄를 범하자 비로소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성을 조(趙)로 바꿔버렸습니다.

    사관은 이 대목을 이 한 줄로 닫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해하였다.

    애석하다는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V. 같은 사관이 적어둔 다른 장면

    그런데 같은 졸기에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황희가 죽자 조회를 사흘 멈추고 관에서 장례를 마련했습니다. 조선에서 이건 최고 등급의 국가 예우입니다.

    그리고 사관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관리와 아전, 여러 관청의 하인들까지 모두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고 사관이 직접 적었습니다.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을 적은 그 사관이, 관청의 하인들까지 제 돈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적었습니다.

    VI. 이것보다 센 기록이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졸기 안의 이야기입니다. 실록에는 이보다 훨씬 격한 황희 기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호문(李好問)이라는 사관이 남긴 사초입니다.

    황희가 죽고 다섯 달 뒤, 『세종실록』을 편찬하던 자리에서 지춘추관사 정인지가 그 사초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회의가 열립니다. 참석자는 황보인, 김종서, 허후, 정창손, 신석조, 최항 등 아홉 명. 여기에 기주관으로 성삼문과 이예가 있었습니다.

    이 회의록 덕분에 이호문이 무엇을 적었는지가 조목별로 남았습니다.

    첫째, 출생. 황희는 황군서(黃君瑞)의 얼자, 곧 첩의 아들이라는 것.

    둘째, 매관매직. 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 재물이 거만(鉅萬)에 이르렀다는 것.

    셋째, 노비. 황희는 물려받은 종이 없고 장인에게 받은 것도 한둘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부리는 종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

    넷째, 황금 대사헌. 김익정(金益精)과 잇달아 대사헌을 지내면서 두 사람 모두 승려 설우(雪牛)에게 금을 받았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 불렀다는 것.

    여기에 박포(朴苞)의 아내와 얽힌 이야기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VII. 아홉 명의 검증

    정인지가 먼저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정하여야겠다.”
    —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첫째 조목만 인정됩니다. 그런 말이 전부터 있었고 황희 본인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는 겁니다. 나머지는 아무도 들은 바가 없다고 합니다.

    허후가 이어받아 황금 대사헌 대목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적어놓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여덟아홉 명 중 어째서 한 사람도 들어본 적이 없느냐는 겁니다. 소문이라면 소문을 들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는 것도 밝힙니다. 그러면서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삭제하자고 합니다.

    김종서도 거듭니다. 규문 안의 은밀한 일이라면 모를까 나머지는 이목에 퍼졌을 텐데 왜 아무도 모르느냐고. 김익정은 자기 재종형인데 청렴을 지킨 사람이라 뇌물을 받았을 리 없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같은 기사

    VIII. 그 방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

    이 회의에는 눈여겨볼 규범이 하나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관계를 스스로 밝힙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고 말한 뒤 그의 사람됨을 평가했습니다. 김종서는 김익정이 자기 재종형이라고 말한 뒤 그가 뇌물을 받았을 리 없다고 했습니다. 판단을 내놓기 전에 자기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인지를 먼저 대는 것 — 이건 이해관계를 고지하는 절차입니다. 그들은 그 절차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밝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황희가 죽고 닷새 뒤, 임금이 그를 세종 묘정에 배향할지를 의정부에 물었습니다. 찬성한 사람이 김종서, 정분, 허후였습니다. 황희는 전쟁의 공은 없으나 임금을 도와 이룬 공이 크고 대신의 체모를 갖추었으니 배향해도 사람들의 이목에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 뒤, 황희의 비리 기록을 지우자고 앞장선 사람이 허후와 김종서입니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황희를 세종의 사당에 모셔야 한다고 공언한 처지였습니다. 그 기록이 사실로 굳으면 자기들이 올린 배향 건의가 흔들립니다. 판정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판정 대상에 이해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친척 관계는 밝히면서, 다섯 달 전 자신들이 황희를 사당에 모시자고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회의록 어디에도 그 말은 없습니다.

    이호문의 기록이 근거 없다는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홉 명이 아무도 들은 적 없다는 진술에는 무게가 있고, 곧 나올 성삼문의 관찰은 오히려 그들 편을 듭니다. 다만 검증의 형식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마저 기록에 남아, 우리가 지금 그것을 세고 있습니다.

    IX. 종이 색깔

    삭제하자는 쪽이 우세했는데도 반론이 나옵니다. 최항과 정창손이 말합니다. 이 건은 명백하니 지워도 무방하지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나중의 폐단을 막기 어렵다고. 고치기 시작하면 어디서 멈추겠느냐는 겁니다.

    성삼문과 이예는 다른 각도에서 찌릅니다. 나쁜 기록은 사서라며 남겨두고 좋은 기록은 못 믿겠다며 지운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성삼문이 결정적인 관찰을 내놓습니다.

    “오랫동안 연진(烟塵)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 같은 기사

    사초 뭉치는 세월에 절어 다 누렇게 변했는데, 문제의 그 한 장만 하얗다는 겁니다.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뜻입니다. 종이 색으로 위조를 잡아낸 셈입니다.

    결국 이날 삭제된 것은 황희 대목이 아니라 다른 인물(권제)의 졸기 한 줄이었습니다.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기록은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것을 읽고 있습니다.

    X. 편집장의 메모

    교정지를 앞에 놓고 이 문장을 뺄지 말지 정하는 회의는 지금도 있습니다. 근거가 약하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빼는 순간, 다음번에는 무엇을 근거로 남길 거냐는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1452년의 그 방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지워도 되지만, 한 번 열어놓으면 막기 어렵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본 적 없다는 「황금 대사헌」이 육백 년을 살아남았습니다.

    고치지 않기로 한 것도 편집입니다. 그날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출처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2월 8일 ·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 원문 보기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 원문 보기

    졸기 인용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며, 어휘 집계도 한문 원문 기준입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2편.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졸기 1 · 이이 — 12자짜리 부고

    졸기 1 · 이이 — 12자짜리 부고

    졸기(卒記)는 조선의 부고 기사입니다. 사관이 한 사람의 죽음에 붙인 짧은 인물평이고, 그래서 편집된 텍스트입니다. 이 연재는 매주 한 명씩, 사관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는지를 봅니다. 첫 번째는 이이입니다.

    I. 이 사람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입니다.

    죽을 때 벼슬은 이조 판서였고, 향년 마흔아홉이었습니다.

    율곡 이이 초상화
    율곡 이이 초상화

    II. 사관이 쓴 문장

    『선조실록』에 실린 이이의 졸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6일

    한문 원문으로 열두 글자입니다. `吏曹判書李珥卒` 앞에 날짜 간지가 붙어 있을 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을 쓴 사람의 부고가 한 줄입니다. 참고로 저 두 책의 이름은 수정본 졸기 맨 끝에 적혀 있습니다. 『선조실록』만 읽으면 이이가 무엇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대해 조선은 기록을 하나 더 갖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입니다. 거기 실린 이이의 졸기는 1,315자입니다. 109배입니다.

    수정본에서 이이는 앞서 병조 판서로 일할 때 과로로 병을 얻었고, 병이 깊어진 뒤에도 관북으로 떠나는 어사를 굳이 맞아 변방 대책 여섯 조목을 불러줍니다. 자제들이 말리자 이렇게 답합니다.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받아쓰기가 끝나자 호흡이 끊어졌고,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III. 사관이 고른 단어

    수정본 졸기에서 사관이 이이에게 쓴 말은 신이(神異), 총명(聰明), 지성효순(至性孝順) 같은 것들입니다. 나면서부터 남달랐고, 총명해서 일곱 살에 경서를 통달했고,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졸기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청백(淸白)입니다.

    실록 전체의 졸기 2,179건을 원문으로 세어보면, 청백은 40회로 사관들이 가장 많이 쓴 칭찬어입니다. 청렴하다는 말은 조선에서 인물평의 최고 등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이의 졸기에는 청백도, 염(廉) 자도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사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고,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른 뒤 작은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청렴하다고 말하는 대신 빈 곳간을 보여준 것입니다. 형용사를 쓰지 않고 장면을 놓는 쪽을 골랐습니다.

    IV. 누가 썼는가

    여기서 편찬 주체를 봐야 합니다. 두 실록은 같은 시대를 다뤘지만, 쓴 사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대에 편찬됐습니다. 이때 실록청을 주도한 것은 북인이었습니다. 북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당파이고, 동인과 서인이 갈라설 때 이이는 서인 쪽으로 분류된 인물입니다. 살아 있을 때 이이는 동인 계열의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후예가 자신의 부고를 쓴 셈입니다. 그 부고가 열두 글자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다시 쓰기 시작해, 효종 8년(1657)에 이르러 “선조조 실록을 수정하는 관청을 실록수정청이라 부르라”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이이가 죽고 7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이번에 붓을 잡은 서인들에게 이이는 학문적 종주였습니다. 그를 문묘에 모시자고 오래 주장해온 쪽도 서인이었습니다.

    미워한 사람들이 쓴 기록과,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 다시 쓴 기록. 그 사이에 109배가 있습니다.

    다만 그 숫자가 온전히 당파의 거리인지는, 다른 인물들을 함께 놓고 다시 봐야 합니다.

    V. 다른 인물들은 어땠나

    이이만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두 판본 모두에 졸기가 실린 인물 35명을 원문 글자수로 대조하면 이렇습니다.

    두 판본의 졸기 분량 배율 — 늘어난 쪽과 줄어든 쪽
    = 1배 (변화 없음)이이109.6배노수신29.5배심의겸23.3배이황13.5배정철7.8배유성룡0.5배김명원0.3배최흥원0.2배
    두 판본 모두에 졸기가 실린 35명 중 일부. 이이의 막대는 지면 관계로 잘려 있습니다.
    인물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배율
    이이12자1,315자109.6배
    노수신13자383자29.5배
    심의겸11자256자23.3배
    이황74자996자13.5배
    정철184자1,426자7.8배
    유성룡873자428자0.5배
    최흥원186자44자0.2배
    김명원155자39자0.3배

    늘어난 쪽에 서인 계열이 몰려 있습니다. 정철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고, 심의겸은 동서 분당이 시작될 때 서인 쪽에 섰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절반으로 줄어든 유성룡은 남인이었습니다. 이이의 부고가 열두 글자에서 1,315자가 되는 동안, 유성룡의 부고는 873자에서 428자가 됐습니다.

    다만 이 패턴이 모든 칸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이황은 남인의 학문적 종주였는데도 13.5배 늘었습니다.

    그리고 표를 오래 들여다보면 당파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섞여 있습니다. 왼쪽 열을 보십시오. 크게 늘어난 넷은 원본이 열 자 남짓에서 일흔 자 남짓밖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반면 줄어든 셋과 정철은 원본이 이미 백오십 자를 넘습니다. 원본이 거의 없으면 무엇을 쓰든 배율이 커집니다.

    원본이 왜 없었는가.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사초를 잃었습니다. 즉위년부터 선조 25년 3월까지 25년분이 26권인데, 왜란 이후 16년분은 195권입니다. 기간은 앞이 더 긴데 분량은 뒤가 일곱 배 넘게 많습니다. 왜란 전에 죽은 사람은 원본 기록 자체가 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표는 두 가지를 겹쳐 재고 있습니다. 사초가 없어서 채운 것과, 사초가 있는데도 고쳐 쓴 것. 앞의 넷은 부재의 크기에 가깝고, 원본이 넉넉한 쪽에서 서인 정철이 7.8배로 늘고 남인 유성룡이 0.5배로 줄어든 대비가 선택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분량과 어휘는 세어본 값이고, 편찬 주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 둘을 잇는 문장,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썼다”는 인과는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늘렸는지, 왜 줄였는지를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3편에서 이황의 졸기를 직접 열어보며 따로 다뤘습니다. 『선조실록』의 이황 졸기는 권의 맨 끝에, 그것도 1년 어긋난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분량과 어휘는 세어본 값이고, 편찬 주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 둘을 잇는 문장,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썼다”는 인과는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늘렸는지, 왜 줄였는지를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VI. 편집장의 메모

    원고를 덜어내는 일보다 무서운 건 늘리는 일입니다. 덜어낸 자리는 표가 나지만, 채워 넣은 문장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열두 글자짜리 부고를 1,315자로 다시 쓴 사람들이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도 적지 않았던 것들을 적었을 뿐일 겁니다. 다만 무엇을 적을지 고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그게 복원인지 개작인지,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실록도 답을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17년(1584) 1월 16일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17년(1584) 1월 1일 · 원문 보기

    『효종실록』 8년(1657) 1월 12일 · 원문 보기

    글자수·어휘 집계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41만여 건)를 직접 세었습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편. 다음은 황희입니다. 이이와 정반대로, 사관이 할 말이 너무 많았던 사람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이순신: 두 실록의 거리

    이순신: 두 실록의 거리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조선시대 실록 중 유일하게 같은 시기를 다룬 두 개의 공식 기록이다. 두 실록의 차이는 단순한 오류 수정을 넘어, 편찬 주체(서인 vs 북인/남인)의 당파적 시각 차이도 담고 있다.

    광해군 때 쓰인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각종 공문서, 승정원일기 잔편, 야사, 각지에서 올린 장계 등 원형에 가까운 26,679건의 기사를 담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 정권 아래 이식(李植) 등 서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담고 있는 기사는 1,867건으로 원본의 14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문맥이 정갈하고 인물에 대한 전기가 상세하다. 반면 서인 편향적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분량이 줄어든 실록에서 한 인물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졌다. 이순신(李舜臣)이다.

    ‘李舜臣’ 판본별 언급 밀도
    선조실록0.64% (172/26,679건)선조수정실록1.34% (25/1,867건)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데이터셋 기준 색인어(한자) 밀도

    분량은 14분의 1로 줄고, 밀도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누군가 편집실에서, 지면이 좁아진 만큼 어디에 무게를 실을지 다시 골랐다는 뜻이다.

    두 개의 데뷔

    같은 사람의 첫 등장을, 두 실록은 다르게 골랐다.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1587년, 처벌 기록이다. 녹둔도(鹿屯島) 방비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는 전교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10월 16일

    감정도 서사도 없다. 처벌 명령이 두 문장으로 끝난다.

    선조수정실록이 고른 첫 장면은 다르다. 1589년, 정읍 현감(井邑縣監) 임명 기사인데, 여기엔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2월 1일

    처벌받은 하급 장교와, 유성룡(柳成龍)이 이웃으로 지켜보다 이름을 알린 인재. 실록이 인물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방식이 이렇게 갈린다. 사관이 어떤 문을 골라 인물을 등장시키느냐가 이미 그 인물에 대한 해석이다.

    옥포, 두 장의 보고서

    가장 뚜렷한 차이는 1592년 5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 기록에서 나온다. 같은 전투를 두 실록이 얼마나 다르게 썼는지, 분량으로만 봐도 열 배 넘게 차이 난다.

    선조실록은 전과 보고서에 가깝다.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은 주사(舟師)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23일

    격파 사실, 포상 결정. 두 문장으로 전투 하나가 처리된다.

    선조실록 (original)

    적선 격파 → 포상. 사실 나열형 두 문장.

    선조수정실록 (revised)

    원균의 도주 시도 → 부하 장수의 항의 → 정운·송희립의 눈물어린 설득 → 참전 결정 → 어깨 관통상을 입고도 하루 종일 지휘 → 거북선 발명 서사까지, 서너 배 긴 분량으로 전개.

    선조수정실록은 같은 전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형세를 보고 전함을 침몰시킨 뒤 육지로 피하려 하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한다. 그 설득에 원균이 지원을 요청하고, 처음엔 다들 난색을 표하던 중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이 나서 출전을 권한다.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이 대사 이후,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며 출전을 결정한다. 전투 중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종일 지휘를 멈추지 않았고, 싸움이 끝난 뒤에야 사람을 시켜 탄환을 파냈다는 대목이 이어진다. 곧이어 이순신이 직접 구상해 만들었다는 거북선의 구조 설명까지 붙는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없던 사실을 지어낸 게 아니라, 있었을 장면에 서사를 입힌 것이다 — 대사를 만들고, 갈등을 세우고, 부상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누가, 왜 다시 썼나

    앞서 보았듯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 아래 편찬되었고, 원본인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 북인 계열이 주도해 만든 실록이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실록을 못마땅해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고, 선조 대의 경우 그 결과물이 통째로 다시 쓰였다. 이순신·유성룡 계열의 서사가 수정본에서 두드러지는 데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밀도 숫자와 옥포해전의 서술 차이가, 그 배경을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제 문장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이 대조의 값어치다.

    편집장의 메모

    개정판을 낼 때 원고를 다시 손보라고 하면, 편집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디에 지면을 더 줄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 줄어드는 개정판이라면 더 그렇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4분의 1로 줄어든 지면에서, 그들은 이순신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로 골랐다. 사실은 그대로인데 이야기가 달라졌다 — 이게 편집이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