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본 갑신정변 — 사흘, 65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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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4일 밤, 서울 한복판에서 사흘짜리 정변이 일어났다. 우리가 갑신정변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음력으로는 고종 21년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이다.

『고종실록』은 이 사흘에 기사 여덟 건, 한문 원문 658자를 쓴다. 같은 해 10월과 11월 두 달을 통째로 세면 기사 150건에 13,965자이다. 정변이 실제로 일어난 사흘은 그중 4.7퍼센트이다.

그런데 이 실록은 조선의 사관이 쓴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이 만들었고, 원고는 모두 일본인 교수의 감수와 일본인 장관의 결재를 거쳐 인쇄되었다. 우리가 읽는 갑신정변은 그 검토를 통과한 갑신정변이다.

그래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 글에서는 먼저 실록이 무엇을 어떻게 적었는지 세어 보고, 그 다음에 그것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따져 본다.

이 글의 숫자는 이렇게 헤아렸다
글자 수는 모두 한문 원문을 카운팅한 값이다. 한글 번역문이 아니다. 구두점과 띄어쓰기, 교정부호는 빼고 한자만 헤아렸다. 인용한 번역은 모두 AI를 이용했고, 그 결과를 필자가 감수하고 다듬었다.

I. 경우궁의 사흘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실록의 문장으로 따라가 본다.

첫째 날. 10월 17일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 잔치가 열린다. 새로 지은 건물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고, 우정국의 책임자인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한다.

宴將終, 見牆外火起。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담장 밖에서 불이 이는 것이 보였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불을 끄러 먼저 나간 사람은 민영익(閔泳翊)이었다. 문밖에서 칼을 맞고 대청으로 되돌아와 쓰러진다. 자리가 흩어지자 김옥균(金玉均)·홍영식·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다섯 사람이 대궐로 달려가 임금에게 변고를 알리고, 자리를 옮겨 피하시라고 청한다.

말풀이
우정국(郵政局) 1884년에 세운 우편 업무 관청이다. 책임자를 총판(總辦)이라 했다.
낙성(落成) 건물을 다 짓는 일이다. 낙성연은 그것을 축하하는 잔치다.
이차(離次)·이어(移御) 임금이 평소 거처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다.

임금이 옮겨 간 곳이 경우궁(景祐宮)이다.

경우궁은 어떤 곳인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824년 한성 북부 계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에 세워졌다. 궁궐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 규모가 작았다. 정변 이듬해에 경우궁은 인왕동으로 옮겨졌고, 1908년에는 육상궁(毓祥宮)에 합쳐졌다. 지금 수빈 박씨의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 있다.

둘째 날. 18일, 임금은 경우궁에 그대로 머문다. 그날 두 번째 기사에서 일곱 사람이 죽는다.

玉均等, 使生徒及壯士, 殺左營使李祖淵、後營使尹泰駿、前營使韓圭稷、左贊成閔台鎬、知中樞府事趙寧夏、海防總管閔泳穆、內侍柳載賢于前堂。 김옥균 등이 생도와 장사를 시켜,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해방총관 민영목, 내시 유재현을 앞채에서 죽이게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8일

이어지는 문장에 임금의 말이 직접 실려 있다. 거듭 소리 내어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 하고 하교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 곁에 남은 것은 김옥균의 무리 십수 명뿐이어서 기거가 자유롭지 못했고 수라마저 때를 놓쳤다고 적는다.

그 다음 기사는 새 정부의 인사 발령이다. 서광범을 승진시키고, 김옥균을 호조참판으로, 홍영식을 우의정으로, 김홍집(金弘集)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는다. 사흘짜리 혁명 내각의 출범이 여느 인사 기사와 똑같은 문투로 적혀 있다.

말풀이
친군 사영(四營) 당시 서울을 지키던 군대로 전영·후영·좌영·우영 넷으로 나뉘었다. 각 지휘관을 전영사·후영사·좌영사·우영사라 했다.
좌찬성(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 벼슬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정2품 벼슬이다. 실제 맡은 일 없이 품계를 유지하는 자리로 쓰였다.
해방총관(海防總管) 바다 방어를 맡은 직책이다.
내시(內侍)·중관(中官) 궁중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관원이다.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두 가지 표기다.

셋째 날. 19일에 상황이 뒤집힌다.

是日申刻, 淸兵分入宮門, 放銃砲, 我左右營兵隨之, 日兵儘力禦之。 이날 신시(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청나라 병사가 궁문으로 나뉘어 들어와 총포를 쏘았고, 우리 좌영과 우영의 병사가 뒤따랐으며, 일본 병사가 힘을 다해 막았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임금은 후원을 거쳐 북묘(北廟)로 피했다가, 한밤중에 청나라 장수 오조유(吳兆有)의 진영으로 옮겨 간다. 그 사이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가 죽는다.

말풀이
흠차(欽差) 황제가 특별히 파견한 사신이다. 여기서는 청나라에서 온 관원을 가리킨다.
英植等挽御衣, 請勿往。 홍영식 등이 임금의 옷을 붙잡고 가지 마시라 청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넷째 날. 20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과 생도 십여 명은 일본 공사관에 몸을 숨겼다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인천으로 가서 일본으로 달아난다.

II. 일본군이 나오는 문장들

이제 같은 사흘을 다른 각도로 본다. 실록에서 일본군이 등장할 때 어떤 동사가 따라붙는지 모아 보면 한 방향으로 모인다.

날짜문장동사
10월 17일日本公使竹添進一郞率兵來護衛護衛 (호위하다)
10월 19일日兵儘力禦之禦 (막다)
10월 19일日公使率兵辭宮辭 (하직하다)
10월 20일率兵, 保護居留民, 出城保護 (보호하다)

네 번 모두 일본군은 지키는 쪽에 있다. 궁궐에 들어오는 장면은 호위이고, 싸우는 장면은 막는 것이며, 나가는 장면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거류민을 보호한다.

바로 그 옆에 청나라 병사가 있다.

淸兵分入宮門, 放銃砲 청나라 병사가 궁문으로 나뉘어 들어와 총포를 쏘았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같은 문장 안에서 한쪽은 들어와서 쏘고, 다른 쪽은 힘껏 막는다.

20일 기사는 순서가 더 눈에 띈다.

時城中軍民, 疾視日本人, 逢輒毆鬪, 多有殺傷。 日本公使竹添進一郞率兵, 保護居留民, 出城。 이때 성안의 군사와 백성이 일본 사람을 미워하여, 마주치면 곧 때리고 싸워 죽거나 다친 이가 많았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병사를 거느리고 거류민을 보호하며 성을 나갔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0일

먼저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오고, 그 다음에 일본 공사가 보호하는 장면이 온다. 이 순서대로 읽으면 원인은 조선 쪽에 있고 일본 쪽은 대응하는 자리에 선다.

여기까지는 실록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적혔는지는 뒤에서 따로 다룬다.

III. 임금의 명이라 적힌 밤

일본군이 궁궐에 들어온 근거를 실록은 한 구절로 정리한다.

玉均等, 以上命求日本公使來援 김옥균 등이 임금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도울 것을 요구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上命은 임금의 명령이다. 일본군이 대궐로 들어온 것이 조선 국왕의 명령에 따른 일이었다는 뜻이 된다.

이 대목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다투어지는 문제다. 임금이 정말 그렇게 명했는지, 김옥균 쪽이 명령을 받아 낸 것인지, 아니면 임금의 이름을 빌린 것인지를 두고 기록마다 말이 다르다. 그런데 실록은 다투지 않는다. 의심을 담는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고 以上命 세 글자로 끝낸다.

한문에는 남의 명령을 사칭한다는 뜻을 담는 글자가 따로 있다. 稱을 써서 稱上命이라 적으면 “임금의 명이라 일컫고”가 된다. 실록은 그 글자를 쓰지 않았다.

IV. 이름이 지워진 자리와 박힌 자리

정변이 끝나고 여드레 뒤인 10월 26일, 이 달에서 가장 긴 기사가 나온다. 725자이다. 정변 사흘 전체(658자)보다 길다.

죽은 신하들을 위한 임금의 교서 여섯 편이 나란히 실려 있다. 민태호에게 내린 첫 번째 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日前之變, 尙忍言哉? 며칠 전의 변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6일

여섯 편 모두 같은 항목을 되풀이한다.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고, 제문은 임금이 직접 짓고, 시호를 서둘러 내리고, 장례 비용을 넉넉히 보내고, 관을 내리고, 아들은 상복을 벗는 대로 벼슬에 쓰라고 한다.

같은 항목이라도 값은 갈린다. 민태호·조영하·민영목 셋은 정승으로, 윤태준·이조연·한규직 셋은 좌찬성으로 올린다. 그리고 사흘 뒤 시호가 내려지는데, 여섯 사람이 마흔 글자짜리 기사 하나에 들어 있다.

贈諡, 贈領議政閔台鎬 忠文·趙寧夏 忠文·閔泳穆 文忠、贈左贊成尹泰駿 忠貞·李祖淵 忠貞·韓圭稷 忠壯。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9일

영의정을 추증받은 셋은 충문·충문·문충이고, 좌찬성을 추증받은 셋은 충정·충정·충장이다. 추증한 벼슬의 층이 시호의 글자에서 한 번 더 반복된다. 앞의 셋에게는 문(文)이 들어가고 뒤의 셋에게는 들어가지 않는다.

한규직의 충장(忠壯)은 2년 뒤 충숙(忠肅)으로 고쳐진다. 일곱 사람 가운데 시호가 다시 매겨진 사람은 그뿐이고, 실록에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마흔 글자 안에 유재현은 없다.

말풀이
치제(致祭)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제사를 지내 주는 일이다.
추증(追贈) 죽은 사람에게 생전보다 높은 벼슬을 내리는 일이다.
시망(諡望) 시호 후보이다. 봉상시에서 후보를 올리면 임금이 고른다.
절혜(節惠) 시호를 내리는 일이다. 시호는 죽은 뒤에 그 사람의 일생을 두 글자로 평가해 붙이는 이름이다.

그런데 725자 안에 김옥균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죽인 쪽을 부르는 말은 네 가지뿐이다.

  • 흉역(凶逆) — 흉한 역적
  • 흉당(凶黨) — 흉한 무리
  • 흉도(凶徒) — 흉한 무리
  • 흉봉(凶鋒) — 흉한 칼끝

흉도는 낯익은 말이다. 열흘 전 우정국 기사에서 민영익을 찌른 자들을 부른 그 말이다. 실록은 그날도 칼을 든 자가 누구인지 적지 않았다.

이름을 적는 자리는 따로 있다. 10월 21일, 승정원이 올린 글이다.

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亟令拿鞫正刑焉。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을 속히 잡아다 국문하고 형을 집행하게 하소서.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1일

다섯 이름이 모두 박혀 있다. 슬퍼하는 글에서는 이름을 지우고, 처형을 청하는 글에서는 이름을 박는다. 같은 실록, 닷새 차이다.

말풀이
계사(啓辭)·차자(箚子)·상소(上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형식과 격이 조금씩 다르다.

한 가지 더 셀 것이 있다. 18일 기사 끝에 옥균당(玉均黨)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옥균의 무리라는 뜻이다.

실록에서 당(黨0은 드문 글자가 아니다. 전체 기사 413,577건 가운데 10,012건에 들어 있고, 등장 횟수로는 16,967회이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도 82회 나온다. 그런데 둘이 붙은 자리는 실록 전체에서 이 한 번뿐이다.

왜 한 번뿐인지는 이 숫자만으로 말할 수 없다. 사람 이름 뒤에 곧바로 黨을 붙이는 어법 자체가 드문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세어 본 결과까지만 적어 둔다.

이듬달 11월 1일에는 김옥균 등의 가족을 관직에서 지우는 기사가 나온다. 110자이다.

V. 동원부기와 관 널

이 편에서 가장 조용한 대목이다.

10월 26일 교서 여섯 편에는 관을 내리는 구절이 들어 있다.

東園副器一部擇送 동원부기 한 부를 골라 보내라.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6일

동원부기(東園副器)는 나라에서 만들어 내리는 관이다. 그리고 하루 뒤인 10월 27일에 이런 기사가 있다. 전문이다.

命中官柳載賢身死, 棺板一部題給。 중관 유재현이 죽었으니 관 널 한 부를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7일

14자다. 그중 죽음을 가리키는 말은 신사(身死) 2자이고, 나머지 12자는 관 값이다.

東園副器一部擇送 — 동원부기 한 부를 골라 보내라 (10월 26일, 여섯 사람에게)
棺板一部題給 — 관 널 한 부를 내어 주라 (10월 27일, 유재현에게)
둘 다 관이다. 둘 다 “한 부”로 센다.

일곱 사람은 같은 밤 같은 방에서 함께 죽었다. 갈린 자리는 26일이 아니라 죽음이 처음 적힌 18일에 이미 있다. 여섯 사람 앞에는 좌영사·좌찬성·지중추부사 같은 관직이 붙고, 한 사람 앞에는 내시(內侍)라는 신분이 붙는다.

말풀이
동원부기(東園副器) 나라에서 만들어 신하에게 내리는 관(棺)이다.
관판(棺板) 관을 짜는 널빤지이다.

실록 전체에서는 어떤가

동원부기(東園副器)가 나오는 기사는 실록 전체에 65건이다. 그리고 전부 순조 2년(1802) 이후다. 그 앞의 왕대 스물다섯 곳에는 한 건도 없다.

실록건수
순조실록5
헌종실록7
철종실록8
고종실록42
순종실록3

받은 사람은 영의정·우의정, 판중추부사, 부원군, 부마, 옹주, 부부인이다. 기사 제목이 아예 「김조순의 졸기」, 「영의정 조인영의 졸기」처럼 졸기인 경우가 많다. 졸기는 사관이 남기는 짧은 인물평이다. 사관이 인물평을 쓰는 사람에게 나라가 관을 내린다는 뜻이 된다.

말풀이
졸기(卒記) 사람이 죽었을 때 사관이 남기는 짧은 인물평이다.

관판(棺板)은 다른 쪽에 나타난다. 고종실록에서 관 널을 받은 사람은 후궁, 궁인, 유모, 내시, 하급 관원과 병졸이다.

다만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1890년 지중추부사 윤자덕(尹滋悳)이 죽었을 때, 정2품인데도 관 널을 받는다.

棺板一部擇給, 令度支葬需從厚輸送。 관 널 한 부를 골라 주고, 탁지부로 하여금 장례 비용을 넉넉히 보내게 하라.
— 『고종실록』 고종 27년(1890) 10월 16일

윤자덕은 제문도 임금이 직접 짓고 시호도 받는다. 관만 관 널이다. 그러니 이 경계는 신분 하나로 딱 나뉘는 것이 아니라 품계 어디쯤에 걸쳐 있다. 맞지 않는 사례를 숨기지 않고 적어 둔다.

21년 뒤에 같은 일이

1905년 12월, 을사조약에 분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잇따른다. 실록이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자.

날짜사람관추증된 벼슬
11월 30일민영환(閔泳煥), 시종무관장東園副器상상(上相), 곧 정승
12월 1일조병세(趙秉世), 특진관東園副器시호 충정(忠正)
12월 4일이상철(李相哲), 학부 주사棺板학부 협판
12월 4일김봉학(金奉學), 상등병棺板비서감승

닷새 사이다. 같은 이유로 죽었고 같은 실록에 실렸는데, 대신 두 사람에게는 나라가 만든 관이 가고 주사와 병사 두 사람에게는 널이 간다. 장례비도 갈린다. 민영환과 조병세에게는 각각 돈 1,000원과 쌀 30석이, 이상철에게는 400원과 10석이, 김봉학에게는 200원과 5석이 간다.

1884년의 계단이 1905년에 그대로 다시 놓인다. 한 번이면 그날의 사정이라 하겠지만 두 번이면 규칙이다.

유재현의 뒷일

유재현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는 모두 다섯 건이다. 1886년 「충문공 민태호 등과 전사한 관군에게 치제하도록 하다」에 이름이 올라 있고, 1901년과 1902년에도 충신을 표창하고 시호를 주자는 논의에 이름이 나온다.

죽은 직후에 벌어진 간격이 세월이 지나며 얼마간 좁혀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뒷일을 빼고 “버려졌다”고만 쓰면 틀린 글이 된다.

VI. 기록은 언제 두꺼워지는가

마지막으로 분량이다. 정변 당일인 10월 17일의 기사는 두 건, 165자이다. 그 달에 기사가 있는 날이 27일인데, 총량으로 줄을 세우면 17일은 정확히 한가운데인 열네 번째다.

기록이 부풀어 오르는 때는 사건이 끝난 뒤다.

1884년 10~11월, 달력 하루당 한문 원문 글자수138자219자337자258자정변 이전정변 사흘정변 이후이듬달10월 1~16일10월 17~19일10월 20~29일11월 전체
한문 원문 글자수를 기사가 없는 날까지 포함한 달력 일수로 나눈 값이다.

그런데 두꺼워진 방식이 짐작과 다르다.

구간달력일기사글자하루 글자하루 건수기사당 글자
정변 이전 (10월 1~16일)16282,2001381.879
정변 사흘 (10월 17~19일)386582192.782
정변 이후 (10월 20~29일)10523,3663375.265
이듬달 (11월)30627,7412582.1125

정변 직후 열흘은 기사 하나하나가 오히려 짧아진다. 79자에서 65자로 줄었다. 늘어난 것은 건수다. 하루 1.8건이 5.2건이 됐다. 10월 21일 하루에만 열한 건이다.

그 열한 건을 늘어놓으면 성격이 보인다. 우정국을 없애고, 사면을 베풀고, 관직을 제수하고, 인천으로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승정원과 양사와 홍문관이 차례로 역적을 처형하라는 글을 올린다. 행정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다. 실록이 사건을 더 자세히 적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사건 뒤의 공문서가 쏟아진 것이다.

11월에는 다시 방향이 바뀐다. 기사당 125자로 길어지는데, 상소문을 통째로 옮겨 실었기 때문이다. 11월 26일 하루에 상소가 열한 건 들어오고 그날 총량이 2,309자이다. 그중 송백옥(宋伯玉)의 상소 하나가 1,764자로, 두 달을 통틀어 가장 긴 기사다. 정변 사흘 전체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11월 24일에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이 458자로 실린다. 일본과 맺은 사후 처리 조약이다.

말풀이
한성조약(漢城條約) 정변 뒤인 1884년 11월, 조선과 일본이 사후 처리를 두고 맺은 조약이다.

VII. 제목에 대한 답

이 글의 제목은 「일제가 본 갑신정변」이다. 그렇게 붙일 수 있는 근거와, 그 제목이 닿지 못하는 지점을 함께 적어 둔다.

『고종실록』은 1927년 4월부터 1935년 3월까지 이왕직에서 편찬했다. 이왕직은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관리하려고 둔 기구다. 편찬위원장은 이왕직 장관인 일본인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였고, 실제 총책임을 맡은 감수위원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였다. 편찬위원이 쓴 원고는 반드시 감수부의 손질을 거쳐 위원장의 결재를 받고 간행되었다.

근거는 여기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장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검토를 통과한 문장이다. 일본군이 네 번 모두 지키는 쪽에 서 있는 것도, 일본군의 궁궐 진입이 임금의 명 한 구절로 정리된 것도, 실린 채로 인쇄되었다. 통과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책의 갑신정변은 일제가 보기에 실려도 좋은 갑신정변이다.

닿지 못하는 지점은 이렇다. 통과시킨 것과 써넣은 것은 다르다. 이 실록의 원자료는 사초가 아니라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을 비롯한 기록 2,455책이고, 거기서 24만 5,356매를 옮겨 적은 뒤 다시 골라 쓴 편집물이다. 이상명(以上命) 세 글자가 1930년대 편찬실에서 들어간 것인지, 1884년 원사료에 이미 있던 것인지는 이 책만 보아서는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셋을 갈라 둔다.

첫째, 센 값. 두 달 13,965자, 정변 사흘 658자, 725자와 14자, 동원부기(東園副器) 65건, 옥균당(玉均黨) 1회. 카운팅 프로그램으로 DB를 헤아려서 나온 숫자이다.

둘째, 확인되는 사실. 이 책이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이왕직에서 만들어졌고, 일본인 교수가 감수하고 일본인 장관이 결재했다는 것. 실록 부록의 편찬위원 명단에 적혀 있다.

셋째, 해석. 앞의 둘을 인과로 잇는 순간부터가 해석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실록이 이렇게 적었고 일제가 그대로 내보냈다”까지이고, “일제가 이렇게 고쳐 썼다”는 아직 아니다. 그 판별은 승정원일기를 같은 날짜로 펼쳐 나란히 놓아야 가능하다. 이 연재가 다음 시즌에 하려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한 가지는 지금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동원부기와 관 널로 갈리는 이 차등은 일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순조 때부터 나타나 1905년까지 이어지고, 그 사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조정이 계속 그렇게 해 왔다. 이 대목에서 편찬 주체를 탓하면 과녁을 잘못 잡는 것이다.

VIII. 편집장의 메모

부고 지면을 다뤄 본 사람은 안다. 부고에서 가장 먼저 정해지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칸의 크기다. 누구에게 몇 단을 줄지가 정해지고 나면 그 안에 들어갈 말은 거의 저절로 따라온다. 다섯 단짜리 칸에는 생애가 들어가고 한 줄짜리 칸에는 이름과 날짜만 들어간다. 쓰는 사람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칸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다.

1884년 10월에 일곱 사람의 칸은 죽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21년 뒤에도 같은 칸이 그대로 있었다. 지면을 새로 짜는 사람은 지난 호의 판형을 그냥 받아 쓴다. 바꿀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그렇다. 편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누가 무엇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채 지난 판형이 계속 굴러가는 일이다.

기록을 의심할 때 우리는 보통 지워진 문장을 찾는다. 그런데 지면을 만들어 본 쪽에서 보면 문장이 지워지기 훨씬 전에 칸이 먼저 정해진다. 무엇을 썼는지보다 얼마를 줬는지를 먼저 보는 편이 빠르다.

출처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1 · 2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8일 2 · 3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1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0일 2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1일 8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6일 1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7일 3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1890) 10월 16일 8
  •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1월 30일 2
  •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2월 1일 3
  •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2월 4일 1

인용한 번역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글자수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띄어쓰기·교정부호를 제외하고 한자만 셌다. 달 단위 집계와 어휘 빈도는 국사편찬위원회 공공데이터 원문(413,577건)을 내려받아 만든 로컬 색인에서 뽑았고, 구간 합계는 손으로 검산했다.

『고종실록』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 이왕직에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 사관이 사초를 바탕으로 만든 이전 실록들과 성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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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실록」의 두 번째 편이다. 판본이 둘인 기록을 다룬 편으로는 이순신: 두 실록의 거리가 있고, 사관이 고른 낱말 하나를 파고든 편으로는 이이 졸기와 황희 졸기가 있다. 전체 목록은 연재 안내에서 볼 수 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