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宣祖) 시대를 적은 실록은 하나가 아니라 『선조실록(宣祖實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렇게 둘을 나란히 남겼다. 덕분에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사람을 쓴 두 기록을 펼쳐 놓고 비교할 수 있다.
두 실록은 기사 수부터 크게 차이가 난다. 『선조실록』은 26,679건이고, 『선조수정실록』은 1,867건이다. 나중에 쓴 쪽이 1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 14분의 1은 기사 건수를 비교한 값이다. 그런데 그 줄어든 지면에서 도리어 자리를 넓힌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이다.
말풀이
수정실록(修正實錄) · 먼저 만든 실록이 잘못되었다고 보아 뒷날 다시 쓴 실록이다. 앞의 것을 폐기하지 않고 둘 다 남겨 두었다.
사관(史官) 또는 사신(史臣) · 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그때그때 적어 두던 관리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실록의 재료가 되었다.
I. 실록이 두 개가 된 사정
같은 시대의 실록이 둘이 된 것은 기록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光海君)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라 재료가 온전하지 않았다. 전쟁 통에 사관이 적어 둔 기록이 상당수 불타 없어졌고, 편찬을 맡은 이들은 남아 있는 문서와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긁어모아 채워 넣어야 했다. 그래서 시기에 따라 기록의 촘촘한 정도가 들쭉날쭉하다.
『선조실록』을 편찬하고 나서 얼마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다. 1623년,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인조(仁祖)를 세운 사건이다. 이 반정을 주도한 쪽이 서인(西人)이었고, 광해군 때 조정을 이끈 쪽은 북인(北人)이었다. 서인과 북인은 조선 중기 관료들이 갈라져 있던 정치 집단, 곧 당파(黨派)의 이름이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앞선 정권이 만든 『선조실록』을 미덥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다시 썼다. 그 결과물이 『선조수정실록』이다.
편찬을 이끈 사람은 이식(李植)이라고 전해진다. 다만 이 대목은 후대 연구자들이 정리한 설명이고, 실록 본문에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둔다. 같은 임금의 시대를 두 번 쓴 실록은 선조 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종·숙종·경종 대에도 다시 쓰거나 고쳐 붙인 실록이 있다. 다만 원본과 수정본의 분량이 이만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II. 분량은 줄었지만, 한 사람은 늘었다
기사 개수가 14분의 1로 줄었지만, 이순신이 등장하는 기사 비율은 두 배 많아졌다.
두 실록에서 이순신의 이름이 붙은 기사를 세어 보았다. 『선조실록』은 26,679건 가운데 172건, 『선조수정실록』은 1,867건 가운데 25건이다. 이것을 전체 기사 수로 나누면 0.64퍼센트와 1.34퍼센트가 나온다.
필자는 이 비율을 밀도(密度)라 부르기로 한다. 전체 기사 가운데 그 사람이 나오는 기사가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값이다. 건수만 보면 172건에서 25건으로 줄었지만, 지면 자체가 훨씬 더 크게 줄었기 때문에 비율은 올라간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 수치는 헤아려서 나온 값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말은 해석이다. 두 실록은 다루는 기간이 같으므로 비율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다. 다만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가 상대적으로 촘촘하고 그 이전 기사는 성글다. 전쟁으로 기록이 없어진 탓이다. 그러니 숫자만으로 편찬자의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 숫자는 어디를 들여다볼지 알려 줄 뿐이다. 그래서 이제 그 내용을 본다.
III. 두 개의 첫 등장
두 실록은 이순신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장면부터 다르게 골랐다.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처음 나오는 대목은 1587년, 처벌 기록이다. 두만강 하구의 섬 녹둔도(鹿屯島)를 지키다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 내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비변사에서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오게 하는 일을 공사(公事)로 아뢰었다. 전교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자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병사(兵使)에게 장형을 집행하게 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하는 것이 좋겠다.”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10월 16일 · kna_12010016_001
말풀이
비변사(備邊司) · 국방과 군사를 의논하던 관청이다. 뒷날에는 나라의 큰일을 대부분 여기서 결정했다.
공사(公事) · 관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공식 문서다.
전교(傳敎)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지시다.
병사(兵使)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줄임말로, 한 도의 육군을 거느리던 사령관이다.
백의종군(白衣從軍) · 벼슬과 품계를 떼고 벼슬 없는 사람의 차림으로 군대를 따라다니며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하던 처분이다.
딱딱한 글이다. 다만 한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임금은 이들을 전투에서 패한 자들과 같이 다루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처벌하되 차등을 두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판단을 받았는지는 한 글자도 없다.
『선조수정실록』이 고른 첫 장면은 다르다. 2년 뒤인 1589년, 전라도 정읍 수령으로 임명되는 기사인데 여기에는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있었는데, 이광이 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아뢰어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실과 몸가짐을 살펴보고 손님이자 벗처럼 대하였다. 이 때문에 이순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2월 1일 · knb_12212001_021
여기서 감사(監司)는 한 도를 다스리는 관찰사이고, 조방장(助防將)은 그 도의 방어를 돕는 무관직이며, 현감(縣監)은 작은 고을의 수령이다.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의 재능을 남다르게 보아 조정에 아뢰었다는 것, 뒷날 영의정에 오르는 유성룡이 이웃에 살며 그 됨됨이를 지켜보고 아랫사람이 아니라 벗으로 대했다는 것, 그래서 이름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마지막 한 문장이 특히 그렇다. 과거에 붙고 나서 14년 만에 겨우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는 말이다. 늦었다는 뜻이고, 그럼에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쪽은 매를 맞고 병졸로 내려간 하급 장교를 골랐고, 다른 쪽은 윗사람이 알아보아 이름을 얻어 가는 인재였다는 얘기를 골랐다.
IV. 옥포, 같은 전투 두 개의 기록
차이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곳은 임진왜란 첫 승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이다.
『선조실록』부터 보자.
전라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때맞추어 수군을 출동시켜 다른 도의 바다까지 깊이 들어가 왜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머리 두 급을 베었으며, 적에게 빼앗겼던 물건도 많이 되찾았다. 비변사에서 공을 논하여 상을 내릴 것을 청하자, 임금이 자급을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23일 · kna_12505023_005
말풀이
수사(水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줄임말이다. 한 도의 수군을 거느리던 사령관으로 정3품이었다.
급(級) · 싸움터에서 베어 온 적의 머리를 세는 단위다. 전과를 헤아리는 근거로 쓰였다.
자급(資級) · 관리의 등급이다. 이것을 한 단계 올려 주는 포상을 가자(加資)라고 한다.
두 문장이다. 전투 하나가 전과와 포상으로 정리되어 끝난다. 적의 배는 40척 남짓 깨뜨렸는데, 적을 벤 것은 겨우 2명이다.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라 적의 목을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사정이 이 대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같은 전투를 『선조수정실록』은 전혀 다르게 적었다. 한문 원문 글자 수로 세면 46자와 476자, 열 배가 넘는다.
기사는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도를 구원하러 가서 거제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는 문장으로 열린다. 그런데 뒤에 붙은 것은 전과가 아니라 사정이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전선과 장비를 모두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육지로 피하려 했다는 대목이다.
이때 옥포의 만호(萬戶) 이운룡(李雲龍)이 막아선다. 만호는 수군의 진(鎭)을 맡아 지키던 무관으로, 수사보다 아래 자리다.
“사또께서는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으셨으니 의리상 마땅히 맡은 지역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입니다. 이곳을 잃으면 전라도와 충청도가 위태로워집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흩어졌지만 다시 모아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호남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 knb_12505001_020
양호(兩湖)는 호남과 호서, 곧 전라도와 충청도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사또는 자기보다 윗자리의 수령이나 장수를 부르던 호칭이다.
원균이 그 말을 따라 율포 만호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지원을 청한다. 전갈을 받은 전라도 쪽 장수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우리 도를 지키기에도 힘이 모자란데 남의 도까지 갈 겨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 두 사람은 달랐다.
“적을 토벌하는 데 어느 도의 적이냐를 따질 수 없습니다. 적의 기세를 먼저 꺾어 놓으면 우리 도 역시 지킬 수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두 사람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진격을 권했다고 적혀 있다. 이순신이 크게 기뻐했다는 문장이 뒤를 잇고,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이 뱃길의 길잡이를 자청해 앞장섰다는 대목이 붙는다.
이 대목에는 손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문에 적힌 것은 언양(彦陽) 현감 김영담(金泳潭)이다. 고을 이름도 사람의 성도 틀렸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원문을 정리하면서 광양(光陽)과 어영담(魚泳潭)으로 바로잡아 두었다. 다시 쓴 실록도 완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고친 방식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틀린 글자를 바로잡으면서 원래 글자를 지우지 않고 나란히 남겨 두었다. 그래서 실록이 무엇이라 적었는지와 오늘날 무엇이라 읽는지를 함께 볼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이 『선조실록』을 없애지 않고 남긴 것과 같은 태도다.
그다음이 전투다. 옥포에서 왜선 30척을 만나 깨뜨리고 남은 배를 모두 불태웠으며, 이어 노량진에서 다시 13척을 태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온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전투를 지휘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였고, 그제야 군중에서 이순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부상보다 뒤에 놓인 것이 그것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 가도록 지휘를 놓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다. 이순신이 스스로 생각해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구조가 자세히 적혀 있다. 배 위를 판자로 덮어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사람 하나 지날 만한 십자 모양의 좁은 길만 남긴 뒤, 나머지에는 칼과 송곳을 빽빽이 꽂았다는 것, 앞은 용의 머리로 만들어 그 입에 총구멍을 내고 좌우에 여섯 개씩 총구멍을 두었다는 것, 싸울 때는 띠풀로 덮어 칼과 송곳을 감추었다가 적이 뛰어오르면 찔리게 했다는 것까지 나온다. 『선조실록』에는 한 줄도 없는 내용이다.
왜선 40여 척 격파, 머리 두 급, 되찾은 물건, 그리고 포상. 두 문장.
원균의 함선 자침과 1만 군사 해산, 이운룡의 항변, 이영남의 지원 요청, 장수들의 반대, 정운과 송희립의 눈물, 어영담의 길잡이 자청, 옥포 30척과 노량 13척, 어깨의 탄환, 거북선의 구조까지.
여기서 숫자를 비교해 보자. 『선조실록』은 40여 척이라 했고, 『선조수정실록』은 30척과 13척으로 나누어 적었다. 합하면 43척이다. 크게 다르지 않다. 뒤에 쓴 쪽이 전과를 부풀린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것을 장소와 순서로 풀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 않았다. 대신 주고받은 말을 살려 적고, 반대와 설득으로 갈등을 세우고, 부상 장면을 하루의 끝에 놓았다. 같은 사실이 이야기가 되는 데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순서와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야 한다. 먼저 쓴 실록에서는 이것들이 지워진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적히지 않은 것일까. 이 편의 자료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인된다. 원균이 배를 가라앉히고 군사를 해산한 일도, 부하 장수가 그것을 막아선 일도, 『선조실록』에는 자리가 없었다.
V. 두 기록이 만나는 자리
두 실록은 마지막 문장에서 같은 곳에 도착한다.
『선조실록』은 임금이 자급을 올려 주라고 명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선조수정실록』은 조정이 승전 보고를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자급을 더해 주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가선대부는 종2품에 해당하는 품계다. 두 기록 모두 이 전투의 결말을 승진으로 적은 것이다. 표현이 다를 뿐 사실은 하나다.
기록에서 벌어진 차이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에 이르는 길이었다.
한 가지 덧붙인다. 이번에 확인한 1592년 『선조수정실록』 기사는 여섯 건인데, 모두 그달 초하루에 적혀 있다. 5월 1일, 6월 1일, 7월 1일, 8월 1일 하는 식이다. 반면 『선조실록』 기사는 5월 23일, 6월 21일, 7월 9일처럼 날짜가 흩어져 있다. 뒤에 쓴 실록이 여러 자료를 모아 한 달치를 하나로 묶어 정리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다. 『선조실록』에는 옥포해전 기사가 보고가 올라온 5월 23일에 놓이고, 『선조수정실록』에는 5월 1일에 놓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VI. 누가, 왜 다시 썼는가
앞서 본 대로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이 주도해 만들었고,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뒤 서인 정권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서인 계열이 높이 평가하던 인물들, 그중에서도 유성룡과 이순신을 둘러싼 이야기가 수정본에서 두드러지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다만 이 글에서 비교해 보는 것은 그 견해 자체가 아니다. 두 실록이 이순신을 다룬 밀도와 옥포해전의 두 서술이 그 사정을, 설명이 아니라 실제 문장으로 보여 준다는 점, 여기에 이 글의 값어치가 있다.
개정판을 내면서 원고를 다시 손보라고 하면, 편집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디에 지면을 더 줄지, 어느 부분을 줄일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 줄어드는 개정판이라면 더욱 그렇다. 『선조수정실록』을 만든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 수가 14분의 1로 줄어든 실록에서 그들은 이순신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로 골랐다. 배 40여 척과 머리 2급으로 끝났던 하루가, 눈물과 부상과 거북선이 있는 하루로 다시 적혔다. 사실은 그대로인데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글에서 인용한 기사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6일 · kna_12010016_001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 12월 1일 · knb_12212001_021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23일 · kna_12505023_005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 · knb_12505001_020
『효종실록』 효종 8년 1월 12일 · kqa_10801012_003
인용문은 모두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기사 수와 밀도는 실록 원문 DB에서 직접 헤아린 값이다. 옥포해전을 다룬 두 기사의 글자 수 46자와 476자는 원문에서 부호와 띄어쓰기를 뺀 글자 수다.
집계에 쓴 실록 원문 41만여 건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것이다.
「지워진 실록」 1화다. 2화에서는 광해군일기 중초본, 곧 지우기 전 원고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실록을 본다. 연재 전체 목록은 목차 페이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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