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선조실록

  • 졸기 1 · 이이 — 12자짜리 부고

    졸기(卒記)는 조선의 부고 기사입니다. 사관이 한 사람의 죽음에 붙인 짧은 인물평이고, 그래서 편집된 텍스트입니다. 이 연재는 매주 한 명씩, 사관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는지를 봅니다. 첫 번째는 이이입니다.

    I. 이 사람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입니다.

    죽을 때 벼슬은 이조 판서였고, 향년 마흔아홉이었습니다.

    율곡 이이 초상화
    율곡 이이 초상화

    II. 사관이 쓴 문장

    『선조실록』에 실린 이이의 졸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6일

    한문 원문으로 열두 글자입니다. `吏曹判書李珥卒` 앞에 날짜 간지가 붙어 있을 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을 쓴 사람의 부고가 한 줄입니다. 참고로 저 두 책의 이름은 수정본 졸기 맨 끝에 적혀 있습니다. 『선조실록』만 읽으면 이이가 무엇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짜에 대해 조선은 기록을 하나 더 갖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입니다. 거기 실린 이이의 졸기는 1,315자입니다. 109배입니다.

    수정본에서 이이는 앞서 병조 판서로 일할 때 과로로 병을 얻었고, 병이 깊어진 뒤에도 관북으로 떠나는 어사를 굳이 맞아 변방 대책 여섯 조목을 불러줍니다. 자제들이 말리자 이렇게 답합니다.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받아쓰기가 끝나자 호흡이 끊어졌고,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III. 사관이 고른 단어

    수정본 졸기에서 사관이 이이에게 쓴 말은 신이(神異), 총명(聰明), 지성효순(至性孝順) 같은 것들입니다. 나면서부터 남달랐고, 총명해서 일곱 살에 경서를 통달했고,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졸기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청백(淸白)입니다.

    실록 전체의 졸기 2,179건을 원문으로 세어보면, 청백은 40회로 사관들이 가장 많이 쓴 칭찬어입니다. 청렴하다는 말은 조선에서 인물평의 최고 등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이의 졸기에는 청백도, 염(廉) 자도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사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고,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른 뒤 작은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청렴하다고 말하는 대신 빈 곳간을 보여준 것입니다. 형용사를 쓰지 않고 장면을 놓는 쪽을 골랐습니다.

    IV. 누가 썼는가

    여기서 편찬 주체를 봐야 합니다. 두 실록은 같은 시대를 다뤘지만, 쓴 사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대에 편찬됐습니다. 이때 실록청을 주도한 것은 북인이었습니다. 북인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당파이고, 동인과 서인이 갈라설 때 이이는 서인 쪽으로 분류된 인물입니다. 살아 있을 때 이이는 동인 계열의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후예가 자신의 부고를 쓴 셈입니다. 그 부고가 열두 글자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다시 쓰기 시작해, 효종 8년(1657)에 이르러 “선조조 실록을 수정하는 관청을 실록수정청이라 부르라”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이이가 죽고 7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이번에 붓을 잡은 서인들에게 이이는 학문적 종주였습니다. 그를 문묘에 모시자고 오래 주장해온 쪽도 서인이었습니다.

    미워한 사람들이 쓴 기록과,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 다시 쓴 기록. 109배라는 숫자는 그 사이의 거리입니다.

    V. 다른 인물들은 어땠나

    이이만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두 판본 모두에 졸기가 실린 인물 35명을 원문 글자수로 대조하면 이렇습니다.

    두 판본의 졸기 분량 배율 — 늘어난 쪽과 줄어든 쪽
    = 1배 (변화 없음)이이109.6배노수신29.5배심의겸23.3배이황13.5배정철7.8배유성룡0.5배김명원0.3배최흥원0.2배
    두 판본 모두에 졸기가 실린 35명 중 일부. 이이의 막대는 지면 관계로 잘려 있습니다.
    인물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배율
    이이12자1,315자109.6배
    노수신13자383자29.5배
    심의겸11자256자23.3배
    이황74자996자13.5배
    정철184자1,426자7.8배
    유성룡873자428자0.5배
    최흥원186자44자0.2배
    김명원155자39자0.3배

    늘어난 쪽에 서인 계열이 몰려 있습니다. 정철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고, 심의겸은 동서 분당이 시작될 때 서인 쪽에 섰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절반으로 줄어든 유성룡은 남인이었습니다. 이이의 부고가 열두 글자에서 1,315자가 되는 동안, 유성룡의 부고는 873자에서 428자가 됐습니다.

    다만 이 패턴이 모든 칸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이황은 남인의 학문적 종주였는데도 13.5배 늘었습니다. 당파를 넘어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던 인물이라 서인 편찬자들도 함부로 줄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이건 짐작입니다.

    분량과 어휘는 세어본 값이고, 편찬 주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 둘을 잇는 문장, 그러니까 “그래서 이렇게 썼다”는 인과는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늘렸는지, 왜 줄였는지를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VI. 편집장의 메모

    원고를 덜어내는 일보다 무서운 건 늘리는 일입니다. 덜어낸 자리는 표가 나지만, 채워 넣은 문장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열두 글자짜리 부고를 1,315자로 다시 쓴 사람들이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도 적지 않았던 것들을 적었을 뿐일 겁니다. 다만 무엇을 적을지 고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그게 복원인지 개작인지,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실록도 답을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17년(1584) 1월 16일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17년(1584) 1월 1일 · 원문 보기

    『효종실록』 8년(1657) 1월 12일 · 원문 보기

    글자수·어휘 집계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41만여 건)를 직접 세었습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편. 다음은 황희입니다. 이이와 정반대로, 사관이 할 말이 너무 많았던 사람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이순신: 두 실록의 거리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조선시대 실록 중 유일하게 같은 시기를 다룬 두 개의 공식 기록이다. 두 실록의 차이는 단순한 오류 수정을 넘어, 편찬 주체(서인 vs 북인/남인)의 당파적 시각 차이도 담고 있다.

    광해군 때 쓰인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각종 공문서, 승정원일기 잔편, 야사, 각지에서 올린 장계 등 원형에 가까운 26,679건의 기사를 담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 정권 아래 이식(李植) 등 서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담고 있는 기사는 1,867건으로 원본의 14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문맥이 정갈하고 인물에 대한 전기가 상세하다. 반면 서인 편향적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분량이 줄어든 실록에서 한 인물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졌다. 이순신(李舜臣)이다.

    ‘李舜臣’ 판본별 언급 밀도
    선조실록0.64% (172/26,679건)선조수정실록1.34% (25/1,867건)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데이터셋 기준 색인어(한자) 밀도

    분량은 14분의 1로 줄고, 밀도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누군가 편집실에서, 지면이 좁아진 만큼 어디에 무게를 실을지 다시 골랐다는 뜻이다.

    두 개의 데뷔

    같은 사람의 첫 등장을, 두 실록은 다르게 골랐다.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1587년, 처벌 기록이다. 녹둔도(鹿屯島) 방비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는 전교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10월 16일

    감정도 서사도 없다. 처벌 명령이 두 문장으로 끝난다.

    선조수정실록이 고른 첫 장면은 다르다. 1589년, 정읍 현감(井邑縣監) 임명 기사인데, 여기엔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2월 1일

    처벌받은 하급 장교와, 유성룡(柳成龍)이 이웃으로 지켜보다 이름을 알린 인재. 실록이 인물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방식이 이렇게 갈린다. 사관이 어떤 문을 골라 인물을 등장시키느냐가 이미 그 인물에 대한 해석이다.

    옥포, 두 장의 보고서

    가장 뚜렷한 차이는 1592년 5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 기록에서 나온다. 같은 전투를 두 실록이 얼마나 다르게 썼는지, 분량으로만 봐도 열 배 넘게 차이 난다.

    선조실록은 전과 보고서에 가깝다.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은 주사(舟師)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23일

    격파 사실, 포상 결정. 두 문장으로 전투 하나가 처리된다.

    선조실록 (original)

    적선 격파 → 포상. 사실 나열형 두 문장.

    선조수정실록 (revised)

    원균의 도주 시도 → 부하 장수의 항의 → 정운·송희립의 눈물어린 설득 → 참전 결정 → 어깨 관통상을 입고도 하루 종일 지휘 → 거북선 발명 서사까지, 서너 배 긴 분량으로 전개.

    선조수정실록은 같은 전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형세를 보고 전함을 침몰시킨 뒤 육지로 피하려 하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한다. 그 설득에 원균이 지원을 요청하고, 처음엔 다들 난색을 표하던 중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이 나서 출전을 권한다.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이 대사 이후,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며 출전을 결정한다. 전투 중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종일 지휘를 멈추지 않았고, 싸움이 끝난 뒤에야 사람을 시켜 탄환을 파냈다는 대목이 이어진다. 곧이어 이순신이 직접 구상해 만들었다는 거북선의 구조 설명까지 붙는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없던 사실을 지어낸 게 아니라, 있었을 장면에 서사를 입힌 것이다 — 대사를 만들고, 갈등을 세우고, 부상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누가, 왜 다시 썼나

    앞서 보았듯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 아래 편찬되었고, 원본인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 북인 계열이 주도해 만든 실록이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실록을 못마땅해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고, 선조 대의 경우 그 결과물이 통째로 다시 쓰였다. 이순신·유성룡 계열의 서사가 수정본에서 두드러지는 데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밀도 숫자와 옥포해전의 서술 차이가, 그 배경을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제 문장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이 대조의 값어치다.

    편집장의 메모

    개정판을 낼 때 원고를 다시 손보라고 하면, 편집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디에 지면을 더 줄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 줄어드는 개정판이라면 더 그렇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4분의 1로 줄어든 지면에서, 그들은 이순신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로 골랐다. 사실은 그대로인데 이야기가 달라졌다 — 이게 편집이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