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세 편 동안 같은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1편 · 이이(李珥)에서 사관(史官)은 청백(淸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이 비었다는 장면을 놓았습니다. 2편 · 황희(黃喜)에서 사관은 그의 부정을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사 그릇을 뜻하는 보궤(簠簋)를 빌려 에둘렀습니다. 3편 · 이황(李滉)에서 사관은 그를 평하지 않았습니다. 서른아홉 자를 적고, 나머지는 문집을 보라고 했습니다.
칭찬을 피하고, 비난을 피하고, 평가 자체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연재의 축을 “사관은 언제 직설을 피하는가”로 잡았습니다.
4편은 그 반대편을 만나는 편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정철(鄭澈)의 졸기(卒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가혹한 인물평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드디어 피하지 않은 사관을 보겠구나 싶었습니다.
원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알았습니다.
그 가혹한 문장은 본문이 아니라 주석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실록 41만 건을 통틀어 단 한 번 쓰인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I. 이 사람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입니다. 죽을 때의 봉호는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이었습니다.
두 얼굴로 기억됩니다. 한쪽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쓴 국문 가사문학의 정점이 있고, 다른 쪽에는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지휘한 서인(西人)의 영수가 있습니다. 1591년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됐고, 임진왜란으로 풀려나 다시 쓰였다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온 일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강화(江華)에 우거하다 1593년 12월에 죽었습니다.
향년은 실록이 적어 두었습니다. 쉰아홉입니다.
그가 죽은 뒤 두 개의 졸기가 쓰였습니다. 하나는 그를 숙청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다른 하나는 그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썼습니다.

II. 여덟 자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정철 졸기 전체를 옮깁니다. 길지 않으니 그대로 보시는 편이 빠릅니다. 실록이 세 덩어리로 나눠 적은 그대로 나눠 놓았습니다.
kna_12612021_002○寅城府院君 鄭澈卒。
인성부원군 정철이 졸했다.
【澈被論, 在江華卒。】
정철은 탄핵을 받고 강화(江華)에서 죽었다.
【史臣曰: “澈, 褊性妄言, 輕踈浮躁, 喜調好謔, 自招怨尤。 至於崔永慶之繫獄也, 與永慶不相能, 國人之所共知, 而旣身秉國權, 執法者又皆所知, 而卒致之死, 假手之言, 惡得免乎? 加以短於應務, 脫於處事, 體察兩湖, 人心未厭, 奉使天朝, 失於專對, 罪戾相尋, 曁身之沒而不止焉。”】
사신(史臣)은 이렇게 말했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망언을 일삼았으며, 경솔하고 조급했다. 희롱과 농담을 좋아해 스스로 원망을 불렀다. 최영경(崔永慶)의 옥사에 이르러서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였다. 더욱이 이미 국정을 맡고 있었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도 모두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남의 손을 빌렸다는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 처리에는 서툴고 처신에는 빈틈이 있었다. 양호(兩湖, 충청·전라)를 순찰했을 때는 민심이 흡족하지 않았고, 천조(天朝,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외교 답변을 잘못했다. 죄과가 잇따라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첫 줄이 본문입니다. 여덟 글자입니다. 인성부원군 정철이 졸했다 — 그것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 】 안에 있습니다. 세주(細註), 곧 주석입니다. 첫 번째 주석 일곱 자가 그가 논박을 받고 강화에 있다가 죽었다는 정황을 적고, 두 번째 주석 106자가 사관의 논평(史論)입니다.
한자만 세면 이렇습니다.
정철이 죽었다는 사실을 적는 데 여덟 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데 106자. 그리고 그 106자는 본문 바깥에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미리 밝혀둡니다. 실록에서 사관의 논평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표기됩니다. 정철만 특별히 밖으로 밀려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편의 관심은 그 형식이 특별하냐가 아니라, 형식이 정확히 무엇을 나누고 있느냐입니다. 죽음은 본문에, 평가는 주석에. 실록은 이 두 가지를 같은 자리에 놓지 않았습니다.
III. 사관이 쓴 문장
주석 안의 106자를 봅니다.
첫 문장이 사람을 규정합니다. 褊性妄言, 輕踈浮躁, 喜調好謔, 自招怨尤 — 넉 자씩 끊어지는 네 마디입니다. 성품, 말, 몸가짐, 취향을 차례로 짚고 마지막에 결론을 붙입니다. 원망을 스스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망언을 일삼았으며, 경솔하고 조급했다. 희롱과 농담을 좋아해 스스로 원망을 불렀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21일
澈, 褊性妄言, 輕踈浮躁, 喜調好謔, 自招怨尤。
이어서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사관의 서술 방식이 바뀝니다. 형용사를 버리고 사실을 세 개 늘어놓습니다.
- 정철과 최영경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온 나라가 함께 알던 바다 —
國人之所共知 - 그때 정철은 이미 국정을 맡고 있었다 —
旣身秉國權 -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모두 그와 아는 사이였다 —
執法者又皆所知
그리고 최영경이 끝내 죽었다는 사실을 놓은 뒤, 딱 한 번 묻습니다. 남의 손을 빌렸다는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 假手之言, 惡得免乎.
사관은 정철이 최영경을 죽였다고 쓰지 않았습니다. 정황 셋과 결과 하나를 놓고 독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1편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이의 졸기에서 사관은 청백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줬습니다. 여기서도 사관은 살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정황을 보여줍니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방법이 같습니다.
마지막은 실무 평가입니다. 일 처리에 서툴고(短於應務) 처신에 빈틈이 있었으며(脫於處事), 양호(兩湖, 충청·전라)를 순찰했을 때 민심이 흡족하지 않았고, 천조(天朝,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전대(專對, 사신이 홀로 응답하는 외교 임무)를 그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과가 잇따라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닫습니다.
이 졸기의 원본에는 최영경이 옥에 갇힌 대목이 繫嶽으로 적혀 있습니다. 옥(獄)이 아니라 큰 산(嶽)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표점본은 이 자리에 (嶽)〔獄〕라는 교정 표시를 달아 두었습니다. 조선의 실록에도 오자가 있고, 그 오자가 교정되지 않은 채 사고(史庫)에서 400년을 있었습니다.
IV. 사관이 고른 단어 — 한 건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연재에는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실록 전체의 졸기 2,179건에서 인물평 어휘를 세는 사전입니다. 칭찬 쪽에는 청백(淸白)·관후(寬厚)처럼 사관이 즐겨 쓰는 말을, 폄하 쪽에는 탐비(貪鄙)·간사(奸邪)·용렬(庸劣) 같은 말을 갈래별로 모아뒀습니다.
『선조실록』의 정철 졸기에 이 사전을 대봤습니다.
한 건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가혹하다고 알려진 인물평에서, 제 폄하 어휘 사전이 0건을 냈습니다.
이유는 원문을 다시 보면 분명합니다. 사관이 쓴 말은 편성(褊性)·망언(妄言)·경소(輕踈)·부조(浮躁)입니다. 좁고, 함부로 말하고, 성글고, 들떠 있다 — 전부 사람됨에 관한 말입니다. 제 사전에 담긴 말은 탐욕·간사·무능·포악·변덕, 곧 관리의 죄목입니다.
사관은 정철을 나쁜 관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좁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멍의 정체는 사전을 다시 열어보고 알았습니다. 칭찬 쪽에는 “성정·기품” 갈래가 있습니다. 관후(寬厚)·온아(溫雅)·침의(沈毅) 같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폄하 쪽에는 그 칸이 없습니다. 사관은 양쪽 모두에서 사람됨을 평하는데, 제 사전은 한쪽만 받고 있었습니다.
V. 도구가 정확히 반대로 걸린 자리
같은 사전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쪽에도 대봤습니다. 이쪽은 정철을 옹호하는 졸기입니다.
폄하 어휘가 한 건 걸렸습니다. 탐비(貪鄙)입니다. 제 사전의 폄하 목록에서 실록 전체 16회로 상위에 있는 말,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뜻입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1597년 유성룡(柳成龍)이 탄핵을 받아 뇌물을 탐했다는 무고를 당했을 때, 그가 탄식하며 한 말입니다.
“예전에 논하는 자들이 계함(季涵)을 공격하면서 하지 않은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탐욕스럽고 비루하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찌 내가 처신한 것이 그만 못하단 말인가?”—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12월 1일
往時論者, 攻季涵無所不至, 猶不以貪鄙目之, 豈吾處身, 不及彼耶?
계함은 정철의 자(字)입니다. 여기서 세 겹이 겹칩니다.
- 부정문입니다. 정철이 탐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인용입니다. 사관의 평가가 아니라 유성룡이 한 말입니다.
- 칭찬입니다. 문맥 전체는 정철의 청렴을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기계는 세 겹을 전부 놓칩니다. 그런데 원문을 끝까지 읽고 나니 문제가 이보다 큽니다. 이 졸기 두 건에서 청렴과 탐욕에 관한 말은 넷이었습니다.
| 어휘 | 누구에 대한 말인가 | 제 사전은 |
|---|---|---|
| 염귀(廉劌) | 정철 — 청렴이 지나쳐 모가 났다 | 없어서 못 셈 |
| 탐비(貪鄙) | 정철 — 그렇게 불리지는 않았다 | 셌는데 뜻이 반대 |
| 탐사(貪邪) | 정철이 미워한 대상 | 없어서 못 셈 |
| 탐회(貪賄) | 유성룡에 대한 무고 | 없어서 못 셈 |
넷 중 하나만 걸렸고, 하필 그 하나가 정반대였습니다. 나머지 셋 중 둘은 애초에 정철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사전을 부지런히 늘려 탐사와 탐회를 넣어뒀다면, 이 졸기의 폄하 점수는 3점이 됐을 것입니다. 사전이 촘촘할수록 더 크게 틀리는 구조였습니다.
저는 어휘 사전을 만들 때 파일 맨 위에 이렇게 적어뒀습니다. “단순 문자열 포함 여부다. 부정문이나 인용된 남의 평가도 함께 잡힌다. 숫자는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니다. 상위 몇 건은 반드시 원문을 직접 읽을 것.” 스스로 경고를 적어놓고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철의 졸기 두 건은 그 경고가 실제로 일어난 사례입니다. 원문을 읽지 않았다면 저는 이번 편에서 정반대의 글을 썼을 것입니다.
VI. 1,022자의 변론
『선조수정실록』의 정철 졸기는 한자만 1,022자, 표점을 포함하면 1,426자입니다. 읽어보면 졸기라기보다 변론서에 가깝습니다.
먼저 죽음을 적는 방식부터 다릅니다.
“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에 있다가 죽었다”
在江華卒 — 원인 없음
“강화에 머물다가 술병으로 죽었으니, 나이 쉰아홉이었다”
病酒卒 — 원인 명시
그를 되찾으려는 쪽이 술병을 적었습니다. 그를 미워한 쪽은 적지 않았습니다.
변론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편찬자는 먼저 세상의 평가를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한때 정철을 논하던 자들이 그를 간적(奸賊)이라 불렀고, 소문에 휩쓸려 모든 사람이 한목소리로 그를 참된 소인(小人)이라 했으며, 평소 그를 알던 사람들조차 의심했다는 대목까지 씁니다.
그리고 정의를 세웁니다.
“그러나 예부터 소인이라 하는 자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애를 굳히는 것이고, 둘째는 아첨하는 것이며, 셋째는 권세 있는 자에게 붙는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12월 1일
然自古稱小人者有三焉, 一曰固寵也, 二曰諂媚也, 三曰附會也。
고총(固寵)·첨미(諂媚)·부회(附會). 정의를 세운 뒤 항목별로 반증을 댑니다.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일화를 놓습니다. 정철이 유배에서 돌아와 빈청(賓廳, 대신들이 모이던 궁중의 방)에 앉아 있을 때, 별감(別監)이 궁중에서 술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여러 재상에게 함께 먹으라는 명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 자리의 구사맹(具思孟)과 신잡(申磼)이 궁중과 혼인으로 얽힌 사이여서, 귀인(貴人)이 사사로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성중(李誠中)이 쟁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정승 앞에 나누려 하자 정철이 말합니다.
“이는 구 참판(具參判)과 신 지사(申知事)가 먹을 음식이니 대신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같은 기사
此乃具叅判、申知事所當喫者, 大臣不可預也。
그러고는 일어나 나갔고, 그 말이 궁중에 전해져 이튿날 체찰사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셋째에 대해서는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를 듭니다. 두 사람이 권세를 잡았을 때 정철은 그들의 옛 벗이었으니, 그만한 재주로 조금만 몸을 굽혔다면 평생 곤궁할 일이 없었을 텐데 한 번도 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각 항목의 끝은 같은 문장으로 닫힙니다. 小人果如是乎? — 소인이 과연 이와 같겠는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건 인물평의 문체가 아닙니다. 논증의 문체입니다.
입을 빌리는 방식
이 졸기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록 색인에 잡힌 인명만 세어봤습니다.
여덟 자짜리 졸기의 세계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정철과 그가 죽였다고 의심받는 최영경. 1,022자짜리 졸기의 세계에는 스무 명이 넘습니다. 스승, 동료, 정적, 임금, 그리고 증인들.
수정실록이 정철을 옹호하는 방식이 여기 있습니다. 편찬자가 직접 그를 칭찬하는 문장은 의외로 적습니다. 대신 사람을 부릅니다. 기대승(奇大升)이 그의 맑고 깨끗한 절개를 자주 칭찬했다고 적고, 신흠(申欽)의 인물평을 통째로 옮기고, 무엇보다 유성룡을 두 번 세웁니다.
유성룡은 남인(南人)입니다. 이 졸기는 그가 정철을 싫어했다는 사실을 먼저 적어둡니다. 그것도 이유를 붙여서.
“그는 몸가짐이 지나치게 청렴하고 엄격하여 유성룡이 평소 그를 싫어했다.”— 같은 기사
其持身廉劌太過, 柳成龍素惡之。
읽고 한참 멈춘 문장입니다. 미움의 원인을 청렴으로 적었습니다. 정적이 그를 싫어한 이유조차 흠이 아니라 덕이 되도록 놓여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미워하던 사람의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앞서 본 탐비의 탄식이 한 번, 그리고 최영경 사건에 대해 생각을 고쳐먹는 장면이 한 번. 서성(徐渻)이 정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론하자 유성룡이 말합니다.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 그의 해명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는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을 숨길 사람이 아니니 그대 말이 옳지 않겠는가.
수정실록은 최영경 사건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를 가장 의심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꾸는 장면을 놓습니다.
1편의 사관은 이이를 청백하다고 부르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줬습니다. 수정실록의 편찬자는 정철을 훌륭하다고 부르지 않고 적이 인정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기법이 같습니다. 400년 전 서로 반대편에 선 두 붓이 같은 방법을 씁니다.
신흠의 논평이 어디까지인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첫 문장에서 끝난다고 볼 수도 있고, 소인의 세 가지를 따지는 변론 전체가 신흠의 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문 원문에는 인용부호가 없고, 표점은 후대에 붙인 것입니다. 뒤쪽까지 신흠의 말이라면 이 졸기의 변론은 편찬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통째로 빌려온 목소리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남의 입을 빌린다는 구조는 같지만, 빌린 분량은 크게 달라집니다.
VII. 그래서 몇 배인가
1편에서 저는 배율표를 만들었습니다. 『선조실록』 졸기와 『선조수정실록』 졸기의 분량을 인물별로 나란히 놓고 몇 배가 됐는지를 센 표입니다. 거기서 정철은 7.8배였습니다. 이이의 109.6배, 이황의 13.5배에 비하면 작은 숫자입니다.
이번에 원문을 열고 다시 세어봤습니다.
| 무엇을 분모로 두는가 | 배율 |
|---|---|
| 표점 포함 전체 (184자 → 1,426자) | 7.8배 |
| 한자만 전체 (121자 → 1,022자) | 8.4배 |
| 본문만 (8자 → 1,022자) | 127.8배 |
같은 두 기사를 놓고 7.8배와 127.8배가 나옵니다. 어디까지를 졸기로 볼 것인가에 따라 열여섯 배 차이가 납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둘 다 맞고 둘 다 불완전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사관의 논평은 분명히 이 졸기의 일부이고 실록 안에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본문이 아닙니다. 배율표를 만들 때 저는 이 구분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표의 숫자들이 무엇을 재고 있었는지 지금 다시 확인하는 중입니다.
3편에서 저는 이황의 원본 74자에 권말 표기 15자가 섞여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에는 세주가 섞여 있었습니다. 한 번은 실수고 두 번은 구조입니다. 배율표는 다시 세어야 합니다.
배율은 이 편에서 더 밀고 가지 않겠습니다. 표 전체를 다시 세어야 하는 일이고, 그건 한 편을 따로 잡아야 할 몫입니다.
정철의 졸기에서 지금 확실한 것은 배율이 아니라 여덟 자입니다. 죽음은 본문에 여덟 자로 적혔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주석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남은 일은 그 주석 안을 마저 읽는 것입니다.
VIII. 두 실록이 겹친 글자
정반대인 두 졸기를 나란히 놓고 어디가 겹치는지 봤습니다.
성품이 좁다 — 편성(褊性)
일에 짧고 처사가 성글다 — 단어응무(短於應務)
국정을 맡고 있었다 — 병국권(秉國權)
지나치게 좁다 — 견협(狷狹)
구제할 지혜가 없었다 — 무지이제지(無智以濟之)
전권이 어디 있었나 — 하소용이전권(何所容而專權)
성품 평가가 겹칩니다. 그를 숙청한 쪽은 편(褊, 좁다)이라 썼고, 그를 되찾으려던 쪽은 견협(狷狹, 고집 세고 좁다)이라 썼습니다. 다른 글자인데 같은 말입니다.
무능 평가도 겹칩니다. 옹호하는 졸기가 그의 실무 능력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심이 많고 작은 원한도 품었으며 이를 구제할 지혜가 없었던 것이 평생의 단점이라고 적고, 그를 강호와 산림에 두었으면 알맞았을 텐데 삼사(三司)의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장수와 재상을 겸한 것은 그의 그릇에 맞지 않았다고까지 씁니다. 중년 이후 술과 여색에 병들어 자신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것도, 한쪽 논의를 굳게 지지했다는 것도, 그가 한 시대의 표적이 된 것이 이상할 게 없다는 것도 전부 옹호하는 쪽이 적었습니다.
갈라지는 곳은 한 지점입니다. 권력의 크기.
『선조실록』은 정철이 이미 국정을 맡고 있었다(秉國權)고 씁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문장입니다. 그래야 최영경의 죽음이 그의 책임이 됩니다.
『선조수정실록』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실권이 없었다고 답합니다. 재상으로 있은 것이 겨우 일 년 남짓이었고, 밝은 임금이 친히 팔병(八柄,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여덟 가지 권한)을 잡고 있었으며, 이산해·유성룡과 셋이 함께 재상이었는데 그중 이산해가 특히 총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철이 어디에 기대어 권력을 독점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여기에 이 변론의 구조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신하의 권력을 부정하기 위해 임금의 권력을 강조합니다. 정철이 작았다는 말이 곧 임금이 컸다는 말이 되도록 문장을 짰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편찬된 실록이라는 사정을 생각하면, 이 논법이 왜 이 자리에 놓였는지 짐작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편찬자가 그 의도를 적어두지는 않았으니 여기까지는 짐작입니다.
두 실록이 정말로 싸우는 것은 정철이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아닙니다. 그에게 힘이 있었느냐입니다.
IX. 실록에 한 번뿐인 말
그 갈라지는 자리에 쓰인 글자를 세어봤습니다.
사관이 쓴 말은 秉國權입니다. 국권을 잡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 글자를 제가 가진 실록 원문 전체 — 태조부터 순종까지 41만여 건 — 에서 찾아봤습니다.
한 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건이 이 졸기입니다.
흔히 쓰는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秉國政 — 국정을 잡다. 여덟 번 나오고 다섯 왕대에 흩어져 있으며, 여럿이 상소나 탄핵 문맥입니다.
그 여덟 건 가운데 하나를 열어봤습니다. 하필 같은 『선조실록』이었고, 하필 이 사람이었습니다.
身爲首相, 久秉國政
몸소 수상이 되어 오랫동안 국정을 맡고
旣身秉國權
이미 국권을 맡고 있었고
문형이 같습니다. 身 자로 시작해 秉 자로 받는 틀입니다. 그 틀에서 정(政) 한 글자만 권(權)으로 바뀌었습니다.
두 문장의 성격은 다릅니다. 유성룡 쪽은 집의(執義) 송일(宋馹)이 올린 탄핵 상소를 실록이 옮긴 것입니다. 조정에서 실제로 오간 말이고, 임금은 파직 요청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정철 쪽은 사론 안에 있습니다. 사관 자신의 말입니다.
한 글자 차이지만 무게가 다릅니다. 국정을 맡는 것은 신하의 일이고, 국권을 쥐는 것은 임금의 일입니다. 조선에서 신하를 두고 국권을 잡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직무 평가가 아니라 자리를 넘어섰다는 규정에 가까워집니다.
나머지 일곱 건
그렇다면 秉國政이 쓰인 나머지 일곱 건은 어떤 자리였을까요. 기사 목록을 그대로 옮깁니다.
| 실록 | 연도 | 기사 | 어떤 글인가 |
|---|---|---|---|
| 세종실록 | 1424 | 일본국 사신 규주 등의 서장 | 외교 문서 |
| 성종실록 | 1488 | 전주 부윤 김극유(金克忸)의 상소 | 상소 |
| 선조실록 | 1598 | 집의 송일이 유성룡의 파직을 청함 | 탄핵 상소 |
| 선조수정실록 | 1605 | 김상헌(金尙憲)을 경성 판관으로 삼다 | 인사 기사 |
| 선조실록 | 1606 | 일본과의 국교 재개에 대한 윤자신(尹自新)의 의논 | 의논 |
| 숙종실록 | 1678 | 윤휴(尹鑴)에 대한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의 상소 | 상소 |
| 숙종실록 | 1693 | 정사의 덕목에 대한 장령 최항제(崔恒齊)의 상소 | 상소 |
| 순조실록 | 1806 | 삼사의 합사로 김귀주(金龜柱)를 추탈하다 | 탄핵 |
여덟 건 가운데 여섯이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입니다. 상소가 넷, 탄핵이 둘. 나머지는 외교 문서와 인사 기사입니다. 신하의 권력을 말할 때 조정에서 실제로 쓰이던 말이 秉國政이었다는 것이, 여덟 건의 성격에서 대체로 드러납니다.
다만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위 표에서 실록·연도·기사 제목은 실록 데이터가 준 값이지만, “어떤 글인가”는 제가 제목을 보고 분류한 것입니다. 제가 원문까지 열어본 것은 유성룡 건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일곱 건에서 그 말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본문에 있는지 사관의 논평에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관이 왜 그 글자를 골랐는지는 실록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세어서 나온 것은 秉國權이 실록에 한 번뿐이고 그 한 번이 정철의 졸기라는 사실까지입니다. 그 앞의 의도는 제 짐작입니다.
번역이 지우는 것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이 대목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기면 “이미 국정을 맡고 있었고”가 됩니다. 문맥에 맞고 수위도 적절합니다. 실제로 이 원고의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옮기는 순간, 사관이 흔한 글자를 버리고 드문 글자를 골랐다는 사실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글자 그대로 “국권을 쥐고 있었고”라고 옮기면, 이번에는 사관이 하지 않은 말까지 하게 됩니다. 사관은 정철의 책임을 물었지 그 이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번역으로는 잡을 수 없고, 원문을 세어야만 보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이 편에서 그 자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졸기는
4편을 시작하며 저는 정철의 사관이 처음으로 직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문을 열고 그 가설을 접었습니다. 논평이 본문이 아니라 주석에 있었고, 최영경 사건에서도 사관은 단정하지 않고 정황을 늘어놓은 뒤 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휘를 세고 나니 다른 것이 보입니다.
- 제 폄하 어휘 사전에 한 건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관은 탐비·간사·용렬 같은 관용 폄하어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 신하의 권력을 말할 때도 관용 표현을 쓰지 않고 한 글자를 바꿨습니다.
1편의 사관은 빈 곳간이라는 장면을 빌렸습니다. 2편의 사관은 제사 그릇이라는 옛 관용을 빌렸습니다. VI절에서 본 수정실록의 편찬자는 적의 입을 빌렸습니다. 이 연재는 내내 빌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철의 사관은 아무것도 빌리지 않았습니다. 형식은 지켰습니다. 논평을 주석에 두었고 단정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쓴 말은 전부 자기 말이었습니다. 106자 안에 빌려온 문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에두르지 않았다는 제 첫 가설은 자리를 잘못 짚었을 뿐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관이 에두르지 않은 것은 형식이 아니라 어휘였습니다.
두 원고가 같은 사람을 정반대로 말할 때, 편집자가 먼저 확인하는 것은 누가 옳으냐가 아닙니다. 어디가 겹치느냐입니다. 겹치는 대목은 양쪽이 모두 인정한 것이니 사실에 가깝고, 갈라지는 대목이 각자의 주장입니다. 정철의 두 졸기는 성품과 실무 능력에서 놀랄 만큼 겹칩니다. 좁았고, 술에 약했고,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 갈라지는 것은 그 성품이 권력이 되었느냐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 제 도구가 틀렸습니다. 탐비 두 글자를 세면서 정반대 의미를 셌습니다. 교정을 오래 하면 찾기·바꾸기가 손에 붙는데, 그게 사고를 내는 자리는 늘 정해져 있습니다. 부정문과 인용문입니다. “아니다”와 “누가 말하기를” — 기계는 이 둘을 보지 못합니다. 조판소에서 배운 것을 데이터로 다시 배웠습니다.
출처
기사 ID를 누르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으로 바로 갑니다.
-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1593) 12월 21일 —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 kna_12612021_002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12월 1일 —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 knb_12612001_004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0월 3일 — 집의 송일이 유성룡의 파직을 청하다 · kna_13110003_006
- 국정(國政)을 잡았다는 표현이 쓰인 나머지 일곱 건 · kda_10601022_001 · kia_11906022_003 · kna_13905017_025 · knb_13808001_003 · ksa_10406012_002 · ksa_11902004_002 · kwa_10606025_002
- 인용한 번역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원문을 함께 실었습니다.
- 글자수·어휘 집계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413,577건)를 직접 세었습니다. 인명 수는 실록 색인 데이터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秉國權·秉國政의 등장 횟수는 같은 원문 데이터를 전수 검색한 값입니다. 표점이나 줄바꿈으로 세 글자가 끊긴 경우는 잡히지 않으므로, “한 건”은 이 데이터에서 확인된 결과입니다.- 정철의 생애 정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철」 항목을 참조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원문 및 기사 정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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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4편. 다음은 최영경입니다. 이번 편에서 두 실록이 함께 이름을 부른 사람인데, 정작 그의 죽음은 어떻게 적혔는지 아직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아마 유성룡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편에서 정철을 두 번 변호하고, 오 년 뒤 같은 실록에서 탄핵당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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