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10 · 김종직 — 칭찬은 취소하는 문서에만 남았다

김종직 졸기를 기린 글의 분량 비교. 1498년 국문 조서 112자, 1493년 취소 청원 48자, 1492년 부고 속 칭찬 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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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졸기(卒記)는 실록 전체 졸기 가운데 칭찬하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그를 기리는 문장은 정작 그것을 지우려는 문서 안에서만 세 번 살아남았습니다. 실록 원문 글자 수로 그 자리를 추적합니다.

이번 편은 김종직 졸기입니다. 김종직(金宗直)의 졸기는 362자입니다. 그런데 이 362자 안에 칭찬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를 기리는 글은 따로 있습니다. 봉상시라는 관청이 그의 시호를 정하면서 왜 그렇게 정했는지 적어 올린 글입니다. 이 글은 그를 기리려는 문서에는 한 번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실록에 세 번 옮겨 적혔습니다. 시호를 취소해 달라는 문서, 그것을 반박하는 발언, 그리고 여섯 해 뒤 죄인을 신문하며 받아 적은 조서입니다. 없애려는 절차가 세 번 베껴 썼고, 뒤로 갈수록 길어집니다.

말풀이

봉상시(奉常寺) · 나라의 제사와 시호를 맡아보던 관청.

시의(諡議) · 시호를 이렇게 정했다고 그 이유를 적어 올린 글.

국문(鞫問) · 죄인을 잡아다 캐묻는 일. 그때 죄인이 한 진술을 받아 적은 것이 공초(供招)입니다.

I. 이 사람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에 태어나 1492년(성종 23) 8월 19일에 죽었습니다. 예순둘이었습니다.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본관은 선산(善山)입니다.

김종직 졸기에 적힌 이력은 이렇습니다.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낸 김숙자(金叔滋)의 아들이고, 1453년 진사시에 붙고 1459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앤 뒤 글 잘하는 선비 열 사람을 뽑을 때 형 김종석(金宗碩)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성종이 즉위한 뒤 예문관 수찬(修撰)이 되었고,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지방 근무를 청해 함양군수로 나갔습니다. 뒤에 선산부사를 지냈고, 어머니 상을 마친 뒤 김산(金山)의 시골에 머물렀습니다. 1482년 홍문관 응교(應敎)로 불려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이조참판이 되었습니다. 뒤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로 옮겼습니다.

말년에는 손발이 마비되는 병을 앓았습니다. 동래 온천에서 요양하기를 청하고 그 길로 밀양 옛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글을 올리자 임금이 직접 답장을 써서 내려보냈습니다. 신하가 올린 글에 임금이 손수 적어 주는 답을 비답(批答)이라고 합니다.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임금이 직접 지었다는 것은 상당한 예우입니다.

II. 죽기 여섯 달 전

그 예우의 뒷면이 실록에 있습니다.

1492년 2월 17일,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 김여석(金礪石) 등이 짧은 상소를 올립니다. 사헌부는 관리를 감찰하고 잘못을 따지던 관청입니다. 김종직이 죽기 여섯 달 전이고, 그가 밀양에 물러나 있을 때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물러나서 조정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에게 왜 계속 봉급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김종직을 한때의 이름난 선비라 하나, 집에 한 섬의 저축도 없이 다만 글쓰기만 일삼고 말이 행실을 돌아보지 않는 자를 이름난 선비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경상도 세 고을에 노비와 농장이 있는데, 집에 한 섬의 저축도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사로운 은혜를 팔려는 것이며 실제보다 부풀린 말입니다.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1492) 2월 17일 · kia_12302017_003

세 가지가 여기 있습니다.

첫째, 가난하다는 칭찬을 사실 확인으로 되받습니다. 1편의 이이에서 사관은 청백(淸白)이라는 칭찬어를 쓰지 않고 대신 텅 빈 곳간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종직에게는 그 빈 곳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이 붙었습니다. 경상도 세 고을에 노비와 농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만 글쓰기만 일삼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듬해 시호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거의 같은 형태로 되돌아옵니다.

셋째, 실제보다 부풀린 말이라는 표현입니다. 한문으로는 과정지사(過情之辭)이고, 실정(實情)을 넘어선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넉 자가 이 글의 열쇠입니다. 한 해 뒤 시호를 깎는 자리에서 같은 말이 세 번 다시 나옵니다.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임금이 듣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성종은 그를 지켰습니다.

III. 김종직 졸기 362자에 없는 것

여섯 달 뒤 김종직이 죽고, 김종직 졸기 362자가 쓰입니다. 첫 두 문장은 조정의 업무를 하루 멈추고 관례대로 장례 물품과 제사를 내렸다는 기록입니다. 예우는 갖췄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관직 이동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문장은 딱 한 곳입니다.

김종직은 오랫동안 동지경연사로 있었으나 특별히 건의하여 아뢴 일이 없었으므로 명망이 조금 떨어졌다.

『성종실록』, 성종 23년(1492) 8월 19일 · kia_12308019_004

경연(經筵)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책을 읽고 국정을 토론하던 자리입니다. 동지경연사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고위직입니다. 원래 이 사람들은 아침 강의에만 나가면 되었는데, 성종은 김종직만 따로 불러 낮 강의에도 나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거기서 한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섯 달 전 사헌부가 말이 행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은 방향입니다.

없는 것을 세어 보면 이 부고의 성격이 더 뚜렷해집니다. 제자의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김일손도 김굉필(金宏弼)도 정여창(鄭汝昌)도 나오지 않습니다. 학문의 계보를 말하는 문장이 없고, 사림(士林)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남긴 글로는 문집 약간 권과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만 적혀 있습니다.

2편의 황희에게 사관은 대놓고 흠잡는 말 대신 제기(祭器) 이름을 빌려 에둘렀습니다. 사관이 말을 고르는 방식을 읽어 온 연재입니다. 김종직 졸기에는 고른 말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이력만 있습니다.

IV. 시호, 죽은 뒤에 받는 이름

362자의 끝부분에 이 글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시호가 무엇인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조선 사람에게는 이름이 여럿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받는 이름이 있고, 어른이 되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자(字)를 따로 지었습니다. 김종직의 자는 계온입니다. 스스로 짓거나 남이 붙여 주는 호(號)도 있었습니다. 김종직의 호는 점필재입니다.

시호(諡號)는 성격이 다릅니다. 자와 호는 살아 있을 때 쓰는 이름이고 본인이나 주변이 정합니다. 시호는 죽은 뒤에 나라가 정해서 내려 주는 이름입니다. 두 글자로 짓습니다.

아무 글자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시법(諡法)이라는 규정집이 있어서 글자마다 뜻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文) 자를 붙이려면 몇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에 맞아야 하고, 시호를 정하는 문서에는 그 사람이 어느 조건에 해당하는지를 적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호 두 글자는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나라가 내린 최종 판정을 압축한 것입니다.

이 판정은 오래갑니다. 후손은 조상의 시호를 자랑으로 삼았고, 서원에 모실 때도 시호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실록에 적혀 영구히 남았습니다. 조정이 시호 두 글자를 놓고 몇 달씩 다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재산이나 벼슬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무엇으로 기억될지를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김종직 졸기 끝부분에는 그 시호가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도덕이 있고 학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평하고 바른 것’을 ‘충(忠)’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뒤에 대간의 논박으로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학문이 넓고 견문이 많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공경을 지키며 행실이 간결한 것’을 ‘간(簡)’이라 한 것이다.

『성종실록』, 성종 23년(1492) 8월 19일 · kia_12308019_004

김종직 졸기가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붙은 이름은 한 번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한 시호를 나중에 고치는 일을 개시(改諡)라고 합니다. 고칠 개, 시호 시입니다. 대간(臺諫)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함께 부르는 말로, 임금과 관리의 잘못을 따지던 자리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는 이 문장이 죽은 날에 쓰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호를 고친 일은 그 뒤에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결과를 다 아는 사람이 나중에 이 자리에 적어 넣은 것입니다. 3편의 이황에서도 죽을 때 없던 시호가 졸기 안에 이미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김종직 졸기가 놓이는 자리는 죽은 날짜를 따라가지만, 그 안의 문장은 나중에 쓰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문장이 남긴 공백입니다. 대간이 논박해서 고쳤다고만 적었을 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김종직 졸기는 그 과정을 넉 자로 줄여 두었습니다. 그 넉 자를 다시 펼치면 여섯 건의 기사가 나옵니다.

V. 넉 달이 못 되어

1492년 2월 17일사헌부, 봉급을 거두기를 청하다. 임금이 듣지 않다
8월 19일김종직이 밀양에서 죽다. 김종직 졸기 362자
12월 14일의정부, 시호를 고치기를 청하다
12월 16일시호를 잘못 붙인 자를 잡아다 캐묻게 하다
1493년 1월 8일민사건이 시의 48자를 읽고 시호를 고치기를 청하다
1월 9일시호를 지은 이원이 불려와 해명하다
1월 28일안침 등이 반대하다. 임금이 듣지 않다
2월 5일경연에서 결말이 나다

김종직이 죽은 지 석 달 스무닷새 만인 1492년 12월 14일, 의정부가 아룁니다. 의정부는 정승들이 모여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던 최고 관청입니다.

봉상시가 올린 시의가 성인(聖人)을 논하는 것 같고, 문 자를 도덕박문(道德博聞)이라는 조항으로 풀었는데 이는 중국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처럼 학문의 정통을 이은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성종의 대답이 여기서는 이렇습니다.

시호가 이미 정해졌는데 고치는 것이 옳겠는가? 다시 물어서 아뢰라.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1492) 12월 14일 · kia_12312014_005

처음에 임금은 시호를 고치는 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미 정한 것을 왜 되돌리느냐는 반응입니다. 성종의 태도는 두 달 사이에 세 번 바뀝니다.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이 글의 뼈대입니다.

이틀 뒤인 12월 16일, 의정부가 다시 아룁니다. 시호는 실제 모습과 맞아야 하는데 김종직의 시호는 맞지 않는다는 짧은 보고입니다. 이번에는 임금이 이렇게 답합니다.

선한 자에게 나쁜 시호를 붙일 수 없고, 악한 자에게 아름다운 시호를 붙일 수도 없다. 그러나 나쁜 시호를 붙인 경우에는 고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시호를 붙인 경우에만 고친다면, 옳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봉상시가 시호를 의논하면서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함을 따라 바르게 하지 않았다면, 잡아다 캐물어 죄를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1492) 12월 16일 · kia_12312016_002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서로 다른 방향을 봅니다.

앞 문장은 절차의 공평함을 지적합니다. 시호를 고치는 일이 늘 깎는 쪽으로만 일어난다면 이상하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나쁘게 붙은 시호는 그대로 두면서 좋게 붙은 시호만 골라 고친다면, 결국 죽은 사람을 낮추는 방향으로만 제도가 굴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뒤 문장에서 임금은 곧바로 처벌을 꺼냅니다. 시호를 고른 사람의 속셈을 문제 삼자는 제안이 임금에게서 먼저 나왔습니다.

의정부가 그 말을 받고, 임금이 정승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지시를 하나 더 붙입니다.

이전에 ‘도덕박문’으로 시호 삼은 자가 있는가? 있다면 그 행장을 상고하여 김종직과 견주어 보는 것이 좋겠다.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1492) 12월 16일 · kia_12312016_002

같은 조항으로 시호를 받은 앞사람이 있는지 찾아서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행장(行狀)은 죽은 사람의 일생을 정리해 적은 글입니다. 그 조회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실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조회를 몇 초 만에 할 수 있습니다. 실록 원문 전체에서 도덕박문(道德博聞)은 22건, 글자가 하나 다른 도덕박문(道德博文)은 5건 나옵니다. 앞의 표기는 조용(趙庸)·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의 졸기에, 뒤의 표기는 성석린(成石璘)·김자지(金自知)·신숙주(申叔舟)의 졸기와 김종직의 졸기에 쓰였습니다.

앞선 사례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VI. 48자

1493년 1월 8일, 의정부의 실무 관리인 검상(檢詳) 민사건(閔師騫)이 정승들의 뜻을 받아 아룁니다.

논거는 둘입니다. 봉상시가 올린 시호가 문충인데 조선에서 이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준(趙浚) 등 몇 사람뿐이라는 것이 하나입니다. 김종직의 업적이 조준 등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둘입니다. 조준은 조선을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입니다. 학자에게 공신의 잣대를 댄 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민사건은 봉상시가 쓴 시의를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읽습니다.

몸소 이 도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였으며, 충성과 신의를 지키고 독실하고 공경하였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유학의 도를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왕도(王道)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여겼으며, 널리 배우고 예로써 단속하였다. 맑으면서도 편협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과 도덕이 한 시대에 높이 뛰어났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8일 · kia_12401008_004

한문으로 48자입니다. 이 기사 전체가 142자이니 3분의 1이 이 인용입니다.

읽기를 마치자마자 민사건은 이렇게 맺습니다. 그를 실제보다 아름답게 꾸민 것이 이와 같으니 시호를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성종은 봉상시에 그 까닭을 물으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이 글의 물음이 생깁니다. 김종직에게 붙은 가장 높은 평가는, 그것을 취소해 달라는 문서 안에서만 실록에 남았습니다.

김종직 졸기 362자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맑다는 말도, 도를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 말들은 봉상시의 시의에 있었고, 시의 자체는 실록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실린 것은 그것을 헛되다고 지목한 문서입니다.

9편에서 같은 구조를 보았습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태워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간 바로 그 자리에 407자 전문이 실렸습니다. 없애려는 것이 무엇인지 옮겨 적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VII. 글자를 고른 사람이 불려오다

임금이 봉상시에 까닭을 물으라고 한 그 이튿날, 답이 올라옵니다. 봉상시의 하급 관리인 봉사(奉事) 이원(李黿)이 불려와 글로 답한 것입니다.

이 연재를 쓰면서 이런 문서를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붙일 글자를 고른 당사자가, 왜 그 글자를 골랐는지 직접 설명합니다.

시법에는 ‘널리 배우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한다’, ‘널리 듣고 능함이 많은 것을 문이라 한다’,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이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만약 많이 보고 능함이 많은 것으로 이름 붙인다면, 김종직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몸소 이 도를 맡은 공이 후세에 묻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박문’으로 시호를 의논하였습니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9일 · kia_12401009_003

이 연재가 아홉 편에 걸쳐 바깥에서 짐작해 온 것이 여기서는 당사자의 문장으로 진술됩니다. 글자는 고르는 것이고, 고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 자를 붙일 수 있는 조건이 셋 있었고, 이원은 그중 하나를 택했습니다. 나머지 둘을 택하면 김종직의 공이 묻힌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세 조건 가운데 앞의 둘은 많이 보고 많이 안다는 뜻이고, 이원이 택한 셋째만 도덕이라는 말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가 이 선택에 들어 있습니다.

의정부가 곧바로 반박합니다. 이 반박문이 이번 글에서 가장 냉정한 문서입니다.

신들이 김종직을 못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의에 ‘맑으면서도 편협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성인의 경지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을 주창했다’고 하였는데, 그 학문이 과연 김종직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 또 ‘후진을 이끌고 도왔다’고 하였는데, 그가 이끈 것은 시와 문장일 뿐입니다. 학문의 도로 이끌었다는 것은 신들이 알지 못합니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9일 · kia_12401009_003

그가 이끈 것은 시와 문장일 뿐이라는 문장이 남습니다. 한 해 전 사헌부가 다만 글쓰기만 일삼는다고 한 것과 같은 자리입니다.

다섯 해 뒤, 그가 이끈 사람들이 사초와 문집을 이유로 죽습니다. 그때 문제가 된 「조의제문」도 글이었습니다. 1493년의 의정부는 그의 가르침을 시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낮췄고, 1498년의 조정은 바로 그 시문을 반역으로 읽었습니다. 두 판단은 방향이 반대인데 김종직에게 불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의정부는 이어서, 앞서 사헌부가 말이 행실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아뢴 적이 있는데 그 말이 헛되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여섯 달 전의 그 상소입니다. 그러고는 봉상시가 큰일을 장난처럼 의논했으니 사사로운 마음이 있다고 의심한다며 잡아다 캐묻기를 청합니다.

이번에는 임금이 물러섭니다.

이와 같은 일로 반드시 봉상시를 잡아다 캐묻는다면, 뒤에 어진 이가 있더라도 반드시 그 시호를 낮추어 의논할 것이다.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9일 · kia_12401009_003

한 달 전에 처벌을 먼저 꺼낸 사람이 이번에는 그것을 말립니다. 글자를 고른 사람을 벌하면 다음 사람은 몸을 사려 낮은 시호만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종직 졸기의 문장이 어떻게 굳어지는지를 임금이 정확히 짚은 대목입니다.

VIII. 경연의 마지막 장면

1월 28일, 홍문관 부제학 안침(安琛) 등이 반대합니다. 시호란 한번 정해지면 고칠 수 없는 것이라는 원칙을 들고, 신숙주와 최항과 권근(權近)도 모두 문충으로 정해 올린 적이 있다는 선례를 셋 듭니다. 기사의 마지막 두 글자는 이렇습니다. 임금이 듣지 않았다.

그 원칙이 실제로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같은 임금 때의 다른 사례에서 보입니다. 실록 전체에서 개시(改諡)라는 말이 나오는 기사는 65건인데, 그 가운데 김국광(金國光)의 아들 김극유(金克忸)가 아버지의 시호를 고쳐 달라고 청한 기사만 1481년부터 1489년까지 열두 건입니다. 여덟 해 동안 되풀이해 올렸고, 기사 제목에서 확인되는 처분은 모두 거부입니다.

김종직의 시호는 두 달 만에 결말이 났습니다. 방향은 반대였습니다. 유족이 올려 달라고 여덟 해를 청한 쪽은 거부되었고, 조정이 깎자고 한 쪽은 받아들여졌습니다.

2월 5일, 경연에서 마무리됩니다. 지사 홍귀달(洪貴達)은 저승에 있는 그의 혼도 이 일을 알 터인데 이제 와서 고치는 것이 체면에 어떻겠느냐고 묻습니다. 검토관 남세주(南世周)는 이것을 선례로 삼으면 뒤에 나쁜 시호까지 마음대로 고치는 일이 생길까 두렵다고 합니다. 영사 허종(許琮)은 도덕이라 하려면 정자나 주자 같은 사람이라야 한다면서 시의의 네 구절을 다시 옮겨 읽고, 실제보다 지나치게 칭찬한 것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시의가 실록에 두 번째로 적힌 자리입니다. 1월 8일에 취소를 청하며 한 번, 2월 5일에 반박하며 또 한 번입니다.

그다음이 이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입니다.

특진관 유자광(柳子光)이 아뢰었다. “나쁜 시호는 고쳐서는 안 되지만, 실제보다 지나치게 칭찬하여 붙인 시호는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실록』 274권, 성종 24년(1493) 2월 5일 · kia_12402005_001

한문으로는 열두 자입니다. 惡諡不可改, 過情之諡不可不改.

여기 쓰인 과정지시(過情之諡)가 실제보다 부풀린 시호라는 뜻입니다. 한 해 전 사헌부가 김종직의 봉급을 문제 삼으며 쓴 과정지사(過情之辭)와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허종도 과정(過情)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를 겨눈 말이 죽은 뒤 그의 이름을 깎는 말로 옮겨 갔습니다.

이 열두 자가 무엇에 대한 답인지 보면 자리가 더 분명해집니다.

두 달 전 12월 16일에 성종이 던진 물음이 있었습니다. 나쁜 시호는 그대로 두면서 아름다운 시호만 고친다면 옳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유자광은 그 물음을 그대로 뒤집습니다. 나쁜 시호는 손대지 말고 지나친 시호만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시호를 고치는 일은 깎는 방향으로만 하는 것이 옳다는 대답입니다. 임금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물은 그 한쪽 기울기를 오히려 원칙으로 세웠습니다.

다섯 해 뒤 이 사람은 「조의제문」의 구절을 하나씩 풀이해 올려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엽니다. 두 사람의 오랜 감정을 말하는 이야기가 여럿 전하지만 그것은 실록 기사가 아닙니다. 실록에서 확인되는 유자광의 첫 김종직 관련 발언은 이 열두 자입니다.

임금이 닫습니다.

시호를 의논한 자들이 자기들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니,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성종실록』 274권, 성종 24년(1493) 2월 5일 · kia_12402005_001

고치는 근거는 김종직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고른 사람의 속셈이 사사로웠다는 것입니다.

IX. 다섯 해 뒤, 세 번째로 적히다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가 일어납니다.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계승을 비난한 것이라는 해석이 붙었습니다.

7월 18일, 윤필상(尹弼商) 등이 아룁니다. 이원이 김종직의 시호를 의논하면서 공자처럼 훌륭하다고 칭찬했고 표연말(表沿沫)이 행장을 지었으니 두 사람을 함께 잡아다 캐묻기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허락합니다.

다섯 해 전의 시호 사건이 사화의 심문 항목이 되었습니다. 글자를 고른 사람과 일생을 정리해 적은 사람이 같은 날 나란히 신문을 받습니다.

이원의 진술에는 그가 지은 시의가 통째로 옮겨져 있습니다. 한문으로 112자입니다. 1493년에 민사건이 읽은 48자보다 두 배 넘게 깁니다.

1493년 1월 8일 · 시호를 취소해 달라는 문서 안에 48자

1493년 2월 5일 · 경연에서 반박하며 네 구절

1498년 7월 18일 · 죄인을 신문한 조서 안에 112자

기리려는 문서는 하나도 실록에 오르지 않았고, 지우려는 문서가 세 번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판본은 그를 죽은 뒤에 다시 벌하던 자리에 남았습니다.

이원의 진술도 다섯 해 전과 달라져 있습니다.

신은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없습니다. 다만 김종직이 성균관의 책임자로 있을 때 신이 생원으로 성균관에 있으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觀魚臺賦)」에 운을 맞춰 시를 지었는데, 김종직에게 가져가 등급을 매기게 하니 김종직이 칭찬하였습니다. 김일손이 신을 제자라고 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 문집은 신이 본 적이 없습니다. (…) 그러나 신은 본디 김종직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였고, 다만 표연말이 지은 행장이 극구 칭찬하였으므로 그에 따라 이와 같이 의논하였으며, 그때 신은 지나치게 칭찬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습니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8일 · kja_10407018_003

1493년의 이원은 학문의 도를 논하며 자기가 왜 그 글자를 택했는지 설명했습니다. 1498년의 이원은 김종직의 사람됨을 알지 못했고 남이 쓴 행장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두고 한 진술이 다섯 해 사이에 뒤집혔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 진술이 놓인 자리가 말해 줍니다. 앞의 것은 임금의 물음에 답한 글이고, 뒤의 것은 반역죄를 다루는 신문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때 그가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성종은 잡아다 캐묻는 것을 말렸지만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원은 이때 곽산(郭山)으로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다시 잡혀 죽습니다. 그가 죽은 뒤의 기사가 한 건 더 있습니다.

이원이 ‘즐겁구나’ 하고 한 말을 내관 방직은 들었는데 나졸과 옥졸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원은 수상한 자이니 이런 말을 냈을 법하다. 나졸 등에게 또 한 차례 형을 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산군일기』 56권, 연산군 10년(1504) 10월 25일 · kja_11010025_007

원문은 낙재(樂哉) 두 글자입니다. 즐겁구나, 정도의 뜻입니다. 죽으면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를 두고, 듣지 못했다고 답한 나졸들이 다시 매를 맞았습니다. 시의 112자를 고른 사람의 마지막 말은 그렇게 두 글자로 기록에 남았습니다.

김종직 자신은 1498년 7월 27일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습니다. 관을 열어 시신을 꺼내 목을 베는 형입니다. 같은 달에 전라도에는 그의 문집 목판을 태우라는 명이 내려갔습니다. 두 문장을 합쳐 49자였습니다.

X. 215년 뒤

1708년(숙종 34) 7월 22일, 예조가 김종직의 시호를 되돌리기를 청합니다. 1689년에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이 문제를 아뢰었는데 스무 해가 되도록 회신이 없었다는 사정이 앞에 붙습니다.

그 문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김종직의 처음 시호는 문충이었는데 뒤에 문간으로 고쳤습니다. 그 연대가 아득하고 상고할 만한 문자도 없어 그 사이의 사실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 이원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의논한 사람인데 연산군 때 곽산으로 유배되었고 갑자년에 이르러 아울러 죄를 더 받았으니, 문충을 문간으로 고친 일도 그 사이에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1708) 7월 22일 · ksa_13407022_002

여기를 다시 읽어 주십시오.

1708년의 조정은 시호를 언제 누가 고쳤는지 몰랐습니다. 살펴볼 기록이 없다고 했고, 이원이 연산군 때 벌을 받았으니 그 무렵이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그 짐작은 틀렸습니다. 시호를 고친 것은 연산군이 아니라 성종이고, 시점은 1493년 2월입니다. 그 과정은 여섯 건의 기사로 『성종실록』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날짜도, 발언한 사람의 이름도, 임금이 세 번 태도를 바꾼 것도 다 적혀 있었습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실록은 임금조차 열어 볼 수 없는 문서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가장 잘 남기는 방식과 그 기록을 가장 못 쓰게 만드는 방식이 같았습니다. 김종직의 시호가 왜 깎였는지를 조선은 215년 동안 알지 못한 채로, 그 답을 네 곳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사고는 실록을 넣어 두던 창고입니다.

숙종은 이렇게 답합니다.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것이 실로 매우 미안하니 즉시 시호를 회복하라.”

오늘날 백과사전과 서원 기록이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적는 것은 이 결정 때문입니다. 실록의 김종직 졸기는 여전히 그것이 한 번 취소된 이름이라고 적어 두고 있습니다.

편집장의 메모

편집자로 일하면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기록을 남기는 일과 그 기록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전혀 다른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회의록은 다들 열심히 쓰는데 몇 해 지나면 아무도 어느 폴더에 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결국 기억에 남은 사람의 말로 결론이 납니다. 남아 있는데 닿을 수 없는 기록은 없는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708년 예조의 문장이 그것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살펴볼 기록이 없다고 썼는데, 살펴볼 기록은 있었습니다. 사고 안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조선은 자기가 적어 둔 답을 두고 215년 동안 짐작으로 논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여섯 기사를 하루 만에 이어 붙일 수 있는 것은 실록을 잘 읽어서가 아니라, 그저 열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1492) 2월 17일 · kia_12302017_003 — 원문
  • 『성종실록』, 성종 23년(1492) 8월 19일 · kia_12308019_004 (김종직 졸기 362자) — 원문
  •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1492) 12월 14일 · kia_12312014_005 — 원문
  •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1492) 12월 16일 · kia_12312016_002 — 원문
  •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8일 · kia_12401008_004 — 원문
  •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9일 · kia_12401009_003 — 원문
  • 『성종실록』 273권, 성종 24년(1493) 1월 28일 · kia_12401028_003 — 원문
  • 『성종실록』 274권, 성종 24년(1493) 2월 5일 · kia_12402005_001 — 원문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 · kja_10407017_001 (문집 소각 명령 49자) — 원문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1498) 7월 18일 · kja_10407018_003 — 원문
  • 『연산군일기』 56권, 연산군 10년(1504) 10월 25일 · kja_11010025_007 — 원문
  • 『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1708) 7월 22일 · ksa_13407022_002 — 원문
  • 인용문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 글자 수와 어휘 출현 건수는 실록 원문을 로컬 인덱스로 직접 집계한 값입니다.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과 공백은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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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