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1편에서 저는 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선조실록』의 졸기와 『선조수정실록』의 졸기 분량을 인물별로 나란히 놓고 몇 배가 됐는지를 센 표였습니다. 그 표에서 한 칸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이황(李滉)입니다. 남인 학맥의 종주인데 서인이 다시 쓴 실록에서 13.5배로 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예외”라고 적어두고 넘어갔습니다.
이번에 그 칸의 분모를 열어봤습니다. 배율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열어보니 다른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I. 이 사람
-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 죽을 때 벼슬: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으뜸 벼슬로 실무가 없는 명예직에 가깝습니다. 이황은 말년에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했고 죽을 때도 향리에 있었습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습니다.
II. 분모를 열어보니
『선조실록』의 이황 졸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辛丑/右贊成李滉卒, 字景浩, 七十。 贈領議政, 諡文純, 學者稱退溪先生。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 『선조실록』 3권 43장 B면
맨 앞의 ○는 기사가 시작된다는 표시이고, 신축(辛丑) 뒤의 빗금은 날짜와 본문을 가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둘째 줄, 대괄호 안의 여덟 글자가 이 편의 첫 단서입니다. 선종소경대왕실록 권3 마침. 졸기 바로 다음이 권의 끝입니다.
옮기면 이렇습니다.
신축일. 우찬성 이황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이며, 일흔 살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순이며, 학자들은 퇴계 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
구두점을 빼면 한자 39자입니다. 무엇으로 이루어진 39자인지 덩어리로 나눠 세어봤습니다.
사관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 적혀 있나에 가장 많은 글자를 썼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조선 최대의 유학자입니다. 사후에 문묘에 종사되고 서원이 전국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 죽음이 정사에서 39자를 받았습니다.
III. 어긋난 것들
39자만 놓고 보면 그저 짧은 기록입니다. 서지 정보를 함께 보면 짧은 것보다 이상한 점이 나옵니다.
첫째, 권의 맨 끝입니다. 앞서 원문에서 본 대로입니다. 서지로는 3권 43장 B면이고, 43장이 이 권의 마지막 장입니다. 졸기 뒤로 기사가 더 없습니다. 권을 닫기 직전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 해가 1년 어긋나 있습니다. 이 졸기는 선조 2년(1569) 12월조에 실려 있습니다. 이황이 죽은 것은 선조 3년(1570) 12월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는 이 기사의 날짜를 ‘미상’으로 처리해두었습니다.
셋째, 그런데 날짜 자체는 맞습니다. 원문 첫머리의 신축(辛丑)은 그날의 일진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이 선조 3년 12월 초하루를 갑오(甲午)로 적었으니, 거기서 세면 신축일은 그달 8일이 됩니다.
이 계산은 검증이 됩니다. 뒤에 나올 추증 기사가 같은 달 19일이고 간지로 임자(壬子)라 적혀 있는데, 초하루를 갑오로 놓고 세면 임자일이 정확히 19일입니다. 두 판본의 간지가 서로 맞물립니다. 졸기의 신축일은 선조 3년 12월 8일이고, 이황이 죽은 날로 알려진 날과 같습니다.
날짜는 정확한데 해가 틀렸습니다.
넷째, 시호가 이미 적혀 있습니다. 이게 가장 분명한 흔적입니다. 졸기 본문에 `諡文純` 세 글자가 있습니다. 시호는 문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같은 『선조실록』을 따라가 보면, 죽은 지 3년이 지난 1573년 11월까지도 양사(兩司)와 사헌부가 이황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거듭 청하고 있습니다. 시호는 그 뒤에 정해졌습니다.
죽은 자리에 놓인 문장이 3년 뒤의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이 39자는 죽음을 지켜본 사관이 그날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한참 뒤에 누군가가 되짚어 쓴 문장입니다.
다섯째, 관직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右贊成`이라 했고, 『선조수정실록』은 숭정대부 판중추부사라 했습니다. 우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벼슬입니다.
IV. 열하루와 1년
같은 『선조실록』 안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선조 3년 12월 19일자입니다. 이것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壬子 / 都目政。 上特贈李滉領議政。 蓋追褒鉅儒名賢也。
임자일. 都目政(정기 인사)이 있었다. 임금이 특별히 이황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이는 무릇 당대의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추모하여 높이 기린 것이었다.— 『선조실록』 4권 23장 A면
도목정은 관원을 한꺼번에 심사해 자리를 정하는 정기 인사입니다. 그날의 인사 기록 끝에 이 세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죽은 날이 12월 8일, 추증이 12월 19일. 열하루입니다. 조정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기록과 이 추증의 기록이 실록에서는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권도 다르고 책도 다릅니다. 졸기는 2책 3권, 추증은 3책 4권입니다. 추증 기사만 읽으면 무엇에 대한 추증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한 해 앞 권의 맨 끝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V. 왜 이렇게 됐는가
여기서부터는 확인되는 사실을 놓고 잇는 해석입니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사초를 잃었습니다. 사관 몇이 사초를 불태우고 달아났고, 선조 즉위년부터 왜란 직전까지 25년치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가 이 불균형입니다.
25년치가 26권, 16년치가 195권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열람 목록을 보면 이황이 죽은 선조 3년에는 열두 달 중 다섯 달(4·5·7·8·12월)의 기사만 남아 있습니다.
실록청이 꾸려진 것은 1609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39년 뒤입니다. 편찬자들 앞에 그날의 사초는 없었습니다. 이황이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신축일이라는 날짜도 어디선가 얻었고, 나중에 내려진 시호도 알고 있었지만, 그 신축일이 어느 해 12월인지는 확정하지 못한 채 39자를 적어 권 끝에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초를 잃었다는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고, 39자와 1년의 어긋남과 시호의 시차는 센 값이며, “확정하지 못한 채 권 끝에 붙였다”는 것은 제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그 자리에 놓았는지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VI. 사관이 가리킨 곳
39자의 마지막 대목으로 돌아옵니다.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 —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
앞에서 세어본 12자입니다. 39자 가운데 가장 긴 덩어리이고, 전체의 31%입니다.
졸기는 인물평을 적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사관이 한 줄로 판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판정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을 가리킵니다. 내가 여기 적지 않아도 그의 학문은 문집에 있고, 그 문집은 이미 세상에 전한다는 말입니다.
세 편이 쌓이니 결이 보입니다.
- 이이 — 청렴을 말할 자리에서 청백(淸白)을 쓰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줬습니다.
- 황희 — 부정을 말할 자리에서 보궤(簠簋)라는 제기를 빌려 에둘렀습니다.
- 이황 — 인물평을 쓸 자리에서 문집을 가리켰습니다.
앞의 둘은 쓸 말을 고르지 않은 것이고, 이황의 경우는 쓰기를 넘긴 것입니다.
다만 평가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본 추증 기사의 끝 문장이 그것입니다.
蓋追褒鉅儒名賢也 — 이는 무릇 당대의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추모하여 높이 기린 것이었다.
거유(鉅儒)와 명현(名賢), 네 글자입니다. `蓋~也`는 사관이 사태를 요약하거나 총평을 내릴 때 쓰는 형식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이황에 대한 평가는 졸기에 없고 여기에 있습니다. 인물평을 적는 자리는 문집으로 넘기고, 정기 인사 기록의 끝에 네 글자를 붙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두 기사가 이렇게 갈라져 있습니다. 죽음에는 판정이 없고, 예우에는 판정이 있습니다. 그 둘은 원래 열하루 사이의 일인데, 실록에서는 권을 넘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집을 가리킨 그 손짓이, 뒤에 뜻밖의 방식으로 되돌아옵니다.
VII. 87년 뒤, 그 문집으로
『선조수정실록』이 완성된 것은 1657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87년 뒤입니다.
수정하자는 말은 훨씬 앞서 나왔습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 반정 넉 달 뒤의 경연 자리입니다. 이수광이 아룁니다.
宣祖朝實錄, 纂定於賊魁之手, 羞辱甚矣。 宜令改纂。
선조조실록은 역적의 우두머리 손에서 편찬되었으니 수치와 모욕이 심합니다. 마땅히 다시 편찬하게 하소서.
이어서 이정귀가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합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가 계축년의 화를 입어 쫓겨났는데, 이이첨이 정국을 잡은 뒤 초고를 모두 없애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묻습니다.
然則今欲改正, 將何所據?
그렇다면 이제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근거로 삼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편에서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대목입니다.
如《政院日記》, 可考。 且聞外間有朝報, 自戊辰至戊子云, 而間或缺失, 當參以聞見。 朝臣衰老, 漸忘故事, 須速改正。
《정원일기》 같은 것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들으니 민간에 조보가 있어 무진년부터 무자년까지의 기록이 있다고 하나, 간혹 빠진 곳이 있으니 견문을 함께 참고해야 합니다. 조정 신하들이 늙고 쇠해 옛일을 점차 잊고 있으니, 속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8월 18일
승정원일기가 있고, 민간에 도는 조보가 있고, 그것마저 빠진 데가 있으니 사람들의 견문을 보태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늙어 옛일을 잊어가고 있다.
실록을 다시 쓰겠다는 자리에서 나온 답이 사람의 기억입니다. 1623년입니다. 이황이 죽은 지 53년째입니다.
그런데도 일은 빨리 되지 않았습니다. 수정이 실제로 결정된 것은 18년 뒤인 1641년, 대제학 이식의 상차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식은 1643년 적상산성 사고에 내려가 고칠 곳을 뽑아 왔고, 1646년 파직된 뒤 이듬해 죽었습니다. 작업은 중단됐다가 1657년에야 다시 열려 그해 가을 끝났습니다. 이정귀가 “신하들이 늙어간다”고 말한 지 34년 뒤입니다.
무엇으로 썼을까요. 사초는 없었습니다. 편찬자들이 모은 것은 집안에 전하는 사초와 비문, 행장, 야사, 잡기 같은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선조실록』의 사관이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고 가리킨 바로 그 자리에서, 후대의 편찬자들이 재료를 가져왔습니다. 39자가 비워둔 곳을 채운 글의 출처가, 39자가 지목한 곳입니다.
VIII. 그래서 배율표는
처음 물었던 13.5배로 돌아갑니다. 이제 분모가 무엇인지 압니다. 사초 없이 적힌 39자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1편에서 이황의 원본을 74자로 세었습니다. 그 74자에는 졸기 뒤에 붙은 권말 표기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 열다섯 자가 들어 있습니다. 권의 마지막 기사라서 생긴 일입니다. 졸기만 세면 구두점을 포함해 쉰여덟 자, 한자만 서른아홉 자입니다. 배율을 재는 자리에 실록의 마침표가 섞여 들어간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배율은 편찬자가 이황을 얼마나 높였는지를 재는 숫자가 아닙니다. 상당 부분은 원본에 무엇이 없었는지를 재고 있습니다. 이황이 예외로 보였던 것은 제가 그 숫자를 당파 하나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1편의 표를 원본 글자수 쪽에서 다시 보면 두 무리가 갈립니다. 크게 늘어난 이이·노수신·심의겸·이황은 원본이 열 자에서 일흔 자 남짓뿐이었습니다. 반대쪽 정철·김명원·최흥원·유성룡은 원본이 백오십 자를 넘습니다. 앞의 무리에서는 무엇을 쓰든 배율이 커집니다. 뒤의 무리에서 서인 정철이 7.8배로 늘고 남인 유성룡이 0.5배로 줄어든 것, 그쪽이 선택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사초가 없으면 채우고, 사초가 있으면 고른다. 1편의 표는 그 둘을 한 숫자에 담고 있었고, 저는 뒤엣것만 보고 결론을 냈습니다.
다만 이 대목은 아직 표본을 다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서른다섯 명 전체로 넓혔을 때도 같은 갈림이 유지되는지 확인한 뒤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1편은 이 문제를 반영해 고쳐 두었습니다.
그리고 39자를 읽으면서 오래 걸려 있던 대목이 있습니다. 사관은 쓸 수 없을 때 지어내지 않았고, 대신 어디에 있는지를 적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저자에게 가장 자주 부탁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채우지 말고, 모른다고 쓰거나 아는 사람을 가리켜 달라고요.
87년 뒤의 편찬자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재료를 찾았습니다. 출처를 밝혀둔 문장은 당장은 초라해 보여도 나중에 길이 됩니다. 빈칸을 그럴듯하게 메운 문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39자가 오래 남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3권 43장 B면 · 원문 보기
『선조실록』 4권 23장 A면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4권 · 원문 보기
『인조실록』 인조 1년 8월 18일 ·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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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3편. 다음은 정철입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두 실록이 정반대로 쓴 졸기를 나란히 놓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