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졸기 — 닷새 늦게 도착한 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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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졸기는 이순신(李舜臣)입니다. 지금까지 만난 11사람은 병으로 죽었거나 형벌로 죽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연재가 처음 만나는 전사자, 곧 싸움터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졸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DB에서 졸기로 검색하면 이순신 졸기는 없습니다. 대신 다른 기록이 남았습니다. 그가 노량(露梁) 바다에서 죽던 그날, 한양에서는 유성룡(柳成龍)이 벼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실록에 처음 적힌 것은 닷새 뒤였습니다. 그것은 부고가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장수가 “후임을 빨리 정하라”며 보낸 말 속의 여덟 글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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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 사람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입니다.

실록에 적힌 벼슬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589년에 정읍 현감(井邑縣監)이 되었고,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습니다. 전라도 동쪽 바다를 지키는 수군의 사령관입니다.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습니다. 경상·전라·충청의 수군을 모두 거느리는 자리입니다. 줄여서 통제사(統制使)라 부릅니다.

그 뒤 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한 다음 다시 통제사가 되었고, 죽을 때의 벼슬도 통제사였습니다. 물러났던 일은 뒤에서 사관이 직접 꺼냅니다.

그는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음력), 한겨울 남해 노량 바다에서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날짜는 선조실록에 실린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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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졸기는 없다

이 연재는 졸기가 없는 사람을 이미 몇 번 만났습니다.

부고가 적힌 자리
김일손(金馹孫, 1498년 죽음)졸기가 한 건도 없습니다.
이이첨(李爾瞻, 1623년 죽음)졸기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는데 838자가 쓰였습니다.
유자광(柳子光, 1512년 죽음)졸기가 없습니다. 대신 죽기 14년 전 기사에 인물평이 남았습니다.
이순신(1598년 죽음)졸기가 없습니다. 대신 두 실록이 서로 다른 자리에 그의 죽음을 적었습니다.

앞의 세 사람과 이순신은 사정이 다릅니다. 김일손은 사화(士禍)로, 이이첨은 반정(反正) 뒤에 죽임을 당했고, 유자광은 귀양 간 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순신은 나라가 공을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지 11일 만에 임금이 벼슬을 높여 주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순신에게 졸기가 없는 까닭이 앞의 세 사람과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은 어디에 적혔을까요. 두 곳입니다.

하나는 광해군 때 북인이 주도해 만든 『선조실록(宣祖實錄)』입니다. 11월 27일에 좌의정 이덕형이 노량 전투를 보고한 기사가 있고, 그 보고 뒤에 사관이 자기 의견을 덧붙인 사론이 붙어 있습니다. 보고가 194자, 사론이 376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입니다. 11월 1일 자리에 이순신의 마지막 싸움과 죽음을 적은 249자짜리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누어야 합니다

졸기 0건은 조선왕조실록 DB의 졸기 목록에서 헤아린 값입니다. 그 목록은 기사 제목을 보고 만든 것입니다. 수정실록의 이순신 기사에는 「전사하다」라는 제목이 붙었고, 바로 뒤에 실린 이해수(李海壽)의 기사에는 「졸기」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들은 조선의 사관이 붙인 것이 아닙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록을 번역하면서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 졸기 0건은 제목이 그렇다는 뜻일 뿐, 사관이 이순신의 글을 졸기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글은 두 실록의 글을 모두 이순신의 부고로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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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열하루 동안의 기록

선조실록 11월에는 기사가 126건 있습니다. 이순신이 죽은 19일부터 그달 마지막 날까지를 날짜 순서대로 놓아 보겠습니다.

날짜기록
19일노량 전투. 이순신 전사. 같은 날 실록에는 임금이 유성룡을 파직한 기사가 있습니다.
21일명나라 군대 쪽에서 급한 소식이 옵니다. 19일에 왜교(倭橋)를 공격했고 수군이 왜선 50여 척을 불태웠다는 내용입니다. 이순신의 이름은 없습니다. 임금의 답은 “알았다.”
23일세 길에서 이겼다는 보고. 육지 쪽 소식이고, 이순신이 싸운 바닷길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길복(吉服), 곧 경사 때 입는 옷을 입고 축하 인사를 오려 한다고 합니다. 이순신의 이름은 없습니다. 왕의 답은 “알았다”입니다.
24일명나라 군문(軍門)이 보낸 말 속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가 처음 나옵니다. 후임을 정하라는 요구와 함께입니다.
25일이시언(李時言)을 통제사로 삼습니다. 기사는 여덟 자입니다.
27일이덕형의 노량 싸움 보고와 사관의 사론이 있습니다.
29일임금의 비망기(備忘記). 바다에서의 승리를 말하지만 이순신의 이름은 없습니다.
30일벼슬을 높여 주고 장례를 돌보라는 임금의 명. 예조(禮曹)가 제사 절차를 묻습니다.

말풀이

세 길(三路) · 조선에 온 명나라 군대는 왜군을 치려고 길을 나누었습니다. 육지의 동로(東路)·중로(中路)·서로(西路) 세 갈래와 바닷길인 수로(水路)입니다. 선조실록 11월 3일 기사에서 명나라 총사령관은 서로는 유정(劉綎) 제독이, 수로는 진린(陳璘) 도독이 맡았다고 말합니다. 11월 28일 기사에는 중로와 더불어 ‘동서의 두 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만 세 길이 각각 어느 고을을 맡았는지는 이달 기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네 길(四路) · 11월 26일 기사에는 네 길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육지 세 길에 바닷길을 더한 것입니다. 그래서 23일의 ‘세 길에서 이겼다’는 보고에는 이순신이 싸운 바닷길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말, 다른 뜻 · 11월 25일 기사에서는 같은 삼로(三路)가 통제사가 거느리는 경상·전라·충청 세 도의 수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같은 낱말이라도 자리에 따라 뜻이 다릅니다.

군문(軍門) · 조선에 온 명나라 군대의 총지휘부입니다. 제독(提督)은 명나라 군대의 장수를 부르던 이름입니다.

비망기(備忘記)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뜻을 직접 적어서 내린 글입니다.

24일 기사는 승정원(承政院)이 명나라 군대 쪽에서 전해 온 말을 임금에게 옮긴 것입니다. 앞부분에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부산으로 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누구를 뽑았는지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이름을 적어 알려 달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은 그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且李舜臣則戰死矣, 其代卽爲差出, 聽令而去。
또 이순신은 전사하였으니, 그 후임자를 즉시 뽑아 임명하여 명령을 듣고 떠나게 하십시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또’라는 뜻의 글자 차(且)로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이순신의 죽음을 적은 부분은 “또 이순신은 전사하였으니”(且李舜臣則戰死矣), 한자로 여덟 자입니다. 그리고 이 여덟 자는 곧바로 후임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임금의 답은 한자로 42자입니다.

知道。 今日則夜深不可爲也。 明早, 承旨持拜帖, 進去致謝。 統制使, 卽令備邊司, 薦擧差出。 凡事, 政院察而爲之。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할 수 없다. 내일 아침 일찍 승지가 배첩을 가지고 가서 사례하도록 하라. 통제사는 즉시 비변사로 하여금 인물을 추천하여 임명하게 하라. 모든 일은 승정원에서 살펴서 처리하라.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답에는 명나라 쪽에 고맙다고 인사하라는 말과 후임을 뽑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말풀이

승정원(承政院) · 임금의 명령을 전하고 신하들의 말을 임금에게 올리던 관청입니다. 줄여서 정원(政院)이라고도 합니다. 승지(承旨)는 승정원의 관리입니다.

배첩(拜帖) · 인사를 드리거나 뜻을 전할 때 보내던 편지 형식의 문서입니다.

여기서 나누어야 합니다

임금의 답에 슬퍼하는 말이 없다는 것은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선조의 마음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답은 애도의 글이 아니라, 후임을 빨리 정해 이름을 알려 달라는 명나라 쪽 요구에 대한 업무상의 지시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밤이 깊은 때였고, 상대는 날이 밝기 전에 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습니다.

또 “처음 나온다”는 말은 직접 헤아려서 확인한 것입니다. 11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선조실록 기사 24건의 원문을 모두 살펴보면, 이순신의 이름이나 전사를 담은 기사는 24일의 이 기사 하나뿐이었습니다.

닷새 뒤인 29일, 선조는 비망기를 내립니다. 왜군이 한꺼번에 물러난 것은 명나라 장수들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해 달래 보낸 결과라며, 뒤에 반드시 탈이 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금나라 군대가 잠시 물러간 것을 기뻐하다가 결국 도성을 빼앗긴 일까지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끝에 이렇게 씁니다.

今日之事可憂, 而不可徒賀也。 幸記予言。 唯海上之捷, 足破賊膽, 此則稍慰洩憤矣。
오늘의 일은 근심해야 할 일이지 마냥 축하할 일은 아니다. 부디 내 말을 기억하라. 다만 바다에서 거둔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꺾기에 충분하였으니, 이것만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분이 풀린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9일

바다에서 거둔 승리를 인정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231자 안에 이순신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은 그 이튿날 나옵니다.

李舜臣贈職致賻, 官庇葬事。 且其子幾何? 喪畢之後, 盡爲除職可也。 海上亦可立祠, 此一款, 令備邊司議啓。
이순신에게는 관직을 추증하고 부의를 내려 주며, 관에서 장례를 돌보아 치르게 하라. 또 그의 아들이 몇 명인가? 상을 마친 뒤에는 모두 관직에 임명하도록 하라. 바닷가에도 사당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이 한 가지 일은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30일

벼슬을 높여 주는 일, 부의, 나라가 돌보는 장례, 아들들의 벼슬, 그리고 바닷가의 사당까지 들어 있습니다. 이날의 전교는 모두 68자이고, 그 가운데 이순신에 관한 대목이 위의 41자입니다. 나머지는 함께 전사한 장수들에게도 은전을 베풀고 벼슬을 높여 줄 만한 사람은 높여 주라는 말입니다. 이달 실록에서 임금이 이순신의 이름을 들어 그의 죽음을 다룬 말은 이 41자입니다.

같은 날 예조가 제사 절차를 묻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邢軍門痛愍李舜臣之死, 已行差人致祭, 欲令我國, 亦爲致祭, 意甚盛也。
형 군문이 이순신의 죽음을 몹시 애통하게 여겨 이미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뜻이 매우 지극합니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30일

형 군문(邢軍門)은 조선에 온 명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입니다. 명나라 쪽이 먼저 이순신의 제사를 지냈고, 조선에서도 제사를 지내라고 권했습니다. 예조는 법전에 정해진 대로 할지, 따로 특별하게 할지를 임금에게 묻습니다. 노량에서 함께 죽은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의 제사도 함께 묻습니다. 임금의 답은 “예조에서 살펴서 처리하라”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선조실록 안에서 이순신의 죽음은 후임을 정하라는 명나라 쪽의 요구로 처음 들어왔습니다. 조선의 제사 논의도 명나라 쪽이 먼저 지낸 제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기사에 적힌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두 기사만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말풀이

추증(追贈) ·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높여 내려 주는 일입니다. 수정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부의(賻儀) · 초상집에 보내는 돈이나 물건입니다.

형 군문(邢軍門) · 형(邢)은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의 성(姓)입니다. 군문(軍門)은 명나라의 고위 관직인 ‘총독(總督)’을 높여 부르던 존칭입니다. 그러므로 형 군문(邢軍門)은 명나라 형개 총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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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그날, 유성룡

같은 11월의 선조실록을 넘기다 보면 이순신보다 훨씬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유성룡입니다.

11월 13일부터 그달 마지막 날까지, 제목에 유성룡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가 20건입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번갈아 가며 그의 관작을 빼앗으라고 청한 기사들입니다. 제목에 이름이 빠진 같은 내용의 기사까지 더하면 더 많습니다. 같은 기간에 제목에 이순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는 3건입니다.

그리고 19일 기사가 이것입니다.

司憲府連啓柳成龍削奪官爵事, 答曰: “柳成龍罷職。”
사헌부에서 유성룡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거듭 아뢰니, 답하기를, ‘유성룡을 파직하라.’ 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은 날과 같은 날짜입니다.

졸기 6편에서 필자는 유성룡이 1598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밀려났다고 한 줄로 적었습니다. 그 한 줄이 바로 이 기사들입니다.

수정실록을 보면 두 사람이 더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수정실록은 선조 31년 11월 한 달을 기사 3건, 967자로 적었습니다. 선조실록이 126건, 16,379자로 적은 달입니다. 세 건은 이렇습니다.

순서기사글자 수
첫째정언 문홍도가 유성룡을 탄핵하다586자
둘째통제사 이순신이 적의 구원병을 깨뜨리고 전사하다249자
셋째전 홍문관 부제학 이해수의 졸기132자

126건 기사를 3건으로 줄이면서, 편찬자는 첫째와 둘째 자리에 유성룡이 쫓겨난 일과 이순신이 죽은 일을 놓았습니다.

두 기사는 쓰는 방식이 다릅니다. 첫째 기사는 정언 문홍도(文弘道)가 유성룡을 탄핵한 과정을 적은 뒤, 끝에 편찬자가 “살펴보건대”라는 뜻의 안(按)을 쓰고 자기 의견을 붙였습니다.

按, 成龍素負重望, 當國累年, 大爲群小所惎。
살펴보건대, 유성룡은 평소 큰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국정을 담당하였으므로, 소인배들에게 크게 시기를 받았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1일

이어서 편찬자는 이 탄핵이 근거 없는 말을 엮어 죄를 만든 것이었다고 적습니다. 거짓말이 거듭되면 자애로운 어머니조차 아들을 의심하게 된다는 옛이야기를 빌려, 끝내 그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탄스럽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입니다.

此論蓋李慶全、南以恭輩陰主之, 而弘道、爾瞻倡之云。
이 탄핵은 대체로 이경전과 남이공 등이 뒤에서 주도하고, 문홍도와 이이첨이 앞장서서 제기하였다고 한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1일

이 “살펴보건대” 대목이 한자로 111자입니다. 편찬자는 유성룡을 감싸 주었고, 탄핵에 앞장선 사람의 이름까지 적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졸기 8편의 이이첨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실린 이순신 기사 249자에는 그런 대목이 없습니다. 편찬자는 유성룡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을 적었고, 이순신에 대해서는 의견 없이 장면만 적었습니다.

말풀이

탄핵(彈劾) · 관리의 잘못을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임금에게 요구하는 일입니다.

관작(官爵)과 삭탈(削奪) · 관작은 벼슬과 품계입니다. 삭탈은 그것을 모두 빼앗는 것이어서, 파직보다 무거운 벌입니다.

파직(罷職) ·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정언(正言) · 사간원의 관리입니다.

홍문관(弘文館) · 임금의 공부와 나라의 문서를 맡던 관청입니다. 부제학(副提學)은 홍문관의 실무 책임자입니다.

여기서 나누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일이 같은 19일에 일어났다는 것은 선조실록의 날짜로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날 서울에서 파직을 명한 사람들은 노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소식은 닷새 뒤에야 왔습니다.

수정실록이 두 기사를 나란히 놓았다는 것도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정실록 원문에는 두 사람을 잇는 내용이 한 줄도 없습니다. 편찬자가 둘을 이어서 읽으라고 붙여 놓았는지, 그달에 있었던 가장 큰일 두 가지를 차례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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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사관이 쓴 376자

이제 선조실록 11월 27일 기사로 가 보겠습니다. 먼저 이덕형의 보고입니다. 이달 19일에 사천·남해·고성에 있던 왜선 300여 척이 노량으로 몰려왔고,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곧장 나아가 맞섰으며, 명나라 군사도 함께 싸웠다는 내용입니다. 왜선 200여 척이 부서지거나 가라앉았고, 바닷물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은 이렇게 나옵니다.

統制使李舜臣及加里浦僉使李英男、樂安郡守方德龍、興陽縣監高得蔣等十人, 中丸致死。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명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7일

보고서 안에서 이순신은 탄환에 맞아 죽은 10명 가운데 첫 번째 이름입니다.

보고가 끝나면 사관이 자기 의견을 적습니다. 사신왈(史臣曰), 곧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376자입니다. 전체를 옮깁니다.

李舜臣爲人忠勇, 且有才略, 明紀律, 愛士卒, 人皆樂附。 前者統制使元均, 貪虐無比, 大失軍情, 人皆離貳, 遂致丁酉閑山之敗。 元均死後, 以舜臣代之, 舜臣初至閑山, 收合餘卒, 措備器械, 廣開屯田, 販賣魚鹽, 軍餉有裕。 不數月, 軍聲大振, 有虎豹在山之勢。 及今曳橋之戰, 陸兵則觀望不進, 舜臣與天朝舟師, 晝夜血戰, 多有斬獲。 一夕倭賊四名, 乘船出去, 舜臣告於陳璘曰: ‘此必請援之倭也。 出去今已四日, 明日間大兵必至。 我兵先往逆戰, 庶得成功。’ 陳璘初則不許, 舜臣涕泣固請, 璘乃許之。 遂與天兵搖櫓, 達夜進去, 天未明, 到露梁, 則賊果大至。 出其不意, 良久血戰, 舜臣親自射倭, 而賊丸中胸, 仆於船上, 其子欲哭, 軍心遑惑。 李文彧在傍, 止其哭, 以衣掩其屍, 遂嗚鼓進戰, 衆皆以爲舜臣不死, 出氣奮擊。 賊遂大敗, 人皆謂死舜臣破生倭。 及訃音傳播, 湖南一道之人, 莫不痛哭, 雖老嫗、兒童, 無不悲泣。 其丹忠許國, 忘身死義, 雖古之良將, 無以加也。 惜乎! 朝家用人失當, 使舜臣, 不得盡展其才。 若使舜臣, 丙、丁年間, 不遞統制之任, 則豈致閑山之敗沒, 而兩湖爲賊之窟乎? 吁其惜哉!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용맹하였으며, 또한 재주와 지략이 있었다. 군율을 분명히 하고 병사들을 사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앞서 통제사였던 원균은 탐욕스럽고 포악하기가 비할 데 없어서 군심을 크게 잃었다. 사람들이 마음이 떠나 두 갈래로 흩어졌고, 마침내 정유년 한산도의 패배를 불러왔다.

원균이 죽은 뒤 이순신이 그를 대신하였다. 이순신은 처음 한산도에 이르러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여 모으고, 무기와 장비를 마련하였으며, 둔전을 널리 개간하고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 군량을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군대의 위세가 크게 떨쳐져, 마치 산에 호랑이와 표범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세가 되었다.

이번 예교 전투에 이르러 육군은 바라보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밤낮으로 피 흘리며 싸워 많은 적을 베고 사로잡았다. 어느 날 저녁 왜적 네 명이 배를 타고 빠져나갔다. 이순신이 진린에게 말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원병을 청하러 가는 왜적입니다. 떠난 지 이제 나흘이 되었으니, 내일쯤에는 반드시 대군이 올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아 싸운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린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린이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명나라 군사와 함께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갔다. 날이 밝기 전에 노량에 도착하니 과연 왜적의 대군이 몰려왔다. 그들이 뜻하지 못한 틈을 타 공격하여 오랫동안 피 흘리며 싸웠다. 이순신은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그의 아들이 울려고 하자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할 형편이었다. 곁에 있던 이문욱이 울음을 막고 옷으로 이순신의 시신을 덮었다. 그리고 북을 울리며 계속 진격하였다. 병사들은 모두 이순신이 죽지 않은 것으로 알고 기운을 내어 힘껏 싸웠다. 마침내 왜적은 크게 패하였다. 사람들 모두 이를 두고 ‘죽은 이순신이 살아 있는 왜적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그의 부고가 퍼지자 호남 온 지역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늙은 여인과 어린아이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지극한 충성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의리를 위해 죽은 것은 옛날의 훌륭한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조정이 사람을 쓰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여 이순신이 자신의 재능을 모두 펼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을 통제사의 자리에서 교체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도의 참패에 이르고 호남과 호서가 왜적의 소굴이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아, 참으로 애석하도다!
—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7일 사론

말풀이

둔전(屯田) · 군대가 머무는 곳 근처에서 병사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하던 밭입니다.

정유년 한산도의 패배 · 1597년(정유년)에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한 싸움입니다. 흔히 칠천량(漆川梁) 해전이라고 부르는데, 사관은 이것을 ‘한산도의 패배’라고 적었습니다.

예교(曳橋) · 순천에 왜군이 쌓은 성이 있던 곳입니다. 다른 기사에서 왜교(倭橋)라고 적은 곳과 같은 곳으로 봅니다.

진린(陳璘) · 조선에 온 명나라 수군의 장수입니다. 노량 전투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웠습니다.

첨사(僉使)와 군수(郡守) · 첨사는 바닷가 요새를 지키던 무관이고, 군수는 군(郡)이라는 고을을 다스리던 관리입니다.

사론의 순서를 따라가면 이렇습니다. 먼저 이순신의 사람됨을 평가합니다. 이어서 전임 통제사 원균(元均)과 비교하고, 한산도에서 수군을 다시 일으킨 일을 적습니다. 그다음 노량의 마지막 전투, 백성들의 통곡, 옛 명장과의 비교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조정을 비판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몇 줄로 줄인다는 점에서, 이 사론은 졸기라는 이름만 없을 뿐 졸기가 하는 일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두 대목이 눈에 띕니다.

하나는 원균입니다. 사관은 이순신을 칭찬하는 도중에 원균을 먼저 깎아내립니다. 탐욕스럽고 포악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는 대목이 한자로 27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끝에 있는 조정 비판입니다. “애석하도다”로 시작해서 “아, 참으로 애석하도다”로 끝나는 51자입니다. 사관은 “조정이 사람을 쓰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여”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1596~1597)에 통제사를 바꾸는 바람에 한산도의 패배를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통제사를 세우고 바꾸는 것은 임금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관은 “임금”이라고 쓰지 않고 “조정”이라고 썼습니다.

원균 대목과 조정 비판을 합하면 78자로, 사론 전체의 약 5분의 1입니다. 사관은 이순신의 부고를 쓰면서 이순신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밀어낸 사람과, 그를 밀어낸 결정도 함께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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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수정실록이 다시 쓴 249자

이제 수정실록입니다. 249자 전체를 옮깁니다.

劉綎再攻順天賊營, 統制使李舜臣以舟師, 大敗其救兵於海中, 舜臣死之。 時, 行長築城于順天 倭橋, 堅守不退, 劉綎復進攻之, 舜臣與陳璘扼海口以逼之。 行長求援於泗川賊沈安頓吾, 頓吾從水路來援, 舜臣進擊大破之, 焚賊船二百餘艘, 殺獲無算。 追至南海界, 舜臣親犯矢石力戰, 有飛丸中其胸, 左右扶入帳中, 舜臣曰: “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絶。 舜臣兄子莞秘其死, 以舜臣令, 督戰益急, 軍中不知也。 陳璘所乘舡爲賊所圍, 莞揮其兵救之, 賊散去。 璘使人于舜臣謝救己, 始聞其死, 從椅上自投於地, 撫膺大慟。 我軍與天兵聞舜臣死, 連營慟哭。 柩行所至, 人民皆設祭, 挽車而哭, 車不得進。 朝廷贈右議政, 海邊之人相率爲祠宇, 號曰忠愍。
유정이 다시 순천의 왜적 진영을 공격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에서 왜적의 구원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소서행장은 순천 왜교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며 물러나지 않았다. 유정이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자,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바닷길 어귀를 막아 그들을 압박하였다. 소서행장은 사천에 있던 왜장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심안돈오가 수로를 따라 구원하러 오자 이순신이 진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왜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은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을 추격하여 남해 경계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몸소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곳으로 나아가 힘껏 싸웠다. 그때 날아온 탄환 하나가 그의 가슴에 맞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이순신이 말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라.”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인 완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이순신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더욱 급히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래서 군중에서는 이순신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왜적에게 포위되자 완이 군사를 지휘하여 그를 구원하였고, 왜적은 흩어져 달아났다.

진린은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 자신을 구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진린은 의자에서 몸을 던져 땅에 엎어지고,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도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 여러 진영에서 잇달아 통곡하였다.

그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모두 제사를 차려 놓았으며, 상여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해안 지방의 사람들은 서로 이끌고 사당을 세워 그 사당을 ‘충민(忠愍)’이라 불렀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1일

말풀이

유정(劉綎) · 조선에 온 명나라 육군 장수입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 ·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를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입니다. 순천 왜교에 성을 쌓고 버텼습니다.

심안돈오(沈安頓吾) · 사천에 있던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를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입니다.

충민(忠愍)과 충무(忠武) · 충민은 바닷가 사람들이 세운 사당의 이름입니다. 충무는 뒷날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내린 시호입니다.

이 기사에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충성스럽다, 용맹하다, 지략이 있다는 말이 모두 빠졌습니다. 대신 장면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 죽음을 숨긴 조카, 의자에서 땅으로 몸을 던진 명나라 장수, 상여 수레를 붙잡은 백성들입니다.

이런 방식은 졸기 1편에서 이미 본 적이 있습니다. 이이(李珥)의 졸기에는 청렴하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이 비어 있었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실린 곳도 수정실록이었습니다. 칭찬하는 말을 쓰지 않고 장면을 보여 주는 방식을, 같은 실록이 또 한 번 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순신의 마지막 말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두 실록 가운데 수정실록에만 있습니다. 선조실록의 사론에는 이순신이 쓰러진 뒤에 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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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두 기록이 서로 다른 곳

같은 죽음을 두 실록이 어떻게 다르게 적었는지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선조실록 사론선조수정실록
분량376자249자
날짜27일 보고 안에 “이달 19일”11월 1일 자리. 날짜 없음
사람됨의 평가충성, 용맹, 재주와 지략, 군율, 병사 사랑없음
마지막 말없음“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라”
쓰러진 뒤 곁에 있던 사람아들이 울려 하자 이문욱이 막고 옷으로 시신을 덮음형의 아들 완이 죽음을 숨기고 대신 싸움을 독려함
진린이순신이 눈물로 청해 출전을 허락받음죽음을 듣고 땅에 몸을 던져 통곡함
사당(30일 임금의 명) 임금이 바닷가에 세우자고 함바닷가 사람들이 스스로 세워 충민이라 부름
원균탐욕스럽고 포악했다 (27자)나오지 않음
조정 비판통제사를 바꾼 것이 잘못이었다 (51자)나오지 않음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쓰러진 이순신 곁에 누가 있었느냐입니다. 선조실록 사론에서는 아들이 울려고 했고, 이문욱(李文彧)이 그것을 막았습니다. 수정실록에서는 형의 아들 이완(李莞)이 죽음을 숨기고 싸움을 이어 갔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실록 안에서 가릴 수 없습니다.

사당도 다릅니다. 선조실록에서는 임금이 먼저 바닷가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수정실록에서는 바닷가 사람들이 스스로 사당을 세웠습니다. 한쪽은 위에서 내린 명령이고, 다른 쪽은 아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두 기록이 말하는 사당이 같은 사당인지도 이 두 기사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사관이 고른 글자

이 연재는 편마다 사관이 고른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이번에는 두 가지를 보겠습니다.

첫째, 죽음을 적은 글자입니다. 졸기의 졸(卒)은 ‘죽다’라는 뜻인데, 이번 기사들에서는 죽음의 뜻으로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사론에 졸 자가 두 번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둘 다 병사를 뜻하는 사졸(士卒)과 여졸(餘卒, 남은 병사)에 쓰였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에는 모두 사(死) 자가 쓰였습니다.

누구의 말이순신의 죽음을 적은 말
명나라 군문 (24일)전사(戰死): 싸우다 죽음
이덕형의 보고 (27일)중환치사(中丸致死): 탄환에 맞아 죽음
선조실록 사관 (27일)사의(死義): 의리를 위해 죽음
수정실록 편찬자사지(死之): 그 싸움에서 죽음

수정실록 249자 안에서 사(死) 자는 다섯 번 나오고, 다섯 번 모두 이순신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둘째, 사람을 평가하는 낱말입니다. 이 연재는 졸기 2,179건에 나오는 칭찬하는 말과 헐뜯는 말을 헤아리는 낱말 사전을 쓰고 있습니다. 그 사전으로 선조실록 사론을 평가하면 칭찬하는 말이 0건 잡힙니다. 사론에 쓰인 충용(忠勇, 충성스럽고 용맹함), 재략(才略, 재주와 지략), 명기율(明紀律, 군율을 분명히 함), 애사졸(愛士卒, 병사를 사랑함)이 사전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들어 있는 칭찬하는 말은 청렴, 너그러움, 학문, 효도처럼 문신(文臣), 곧 글과 행정을 맡은 관리를 평가하는 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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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같은 두 실록, 두 사람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한 번 더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유성룡에 관한 숫자는 6편에서 헤아린 것입니다.

유성룡이순신
선조실록1607년 졸기의 사론 588자 가운데 228자가 잘못을 따지는 말보고 뒤 사론 376자, 이순신을 탓하는 말 없음
선조수정실록1598년 11월 기사에서 “살펴보건대” 111자로 탄핵을 비판 / 1607년 졸기 300자 가운데 60%가 잘못을 따지는 말249자, 평가하는 말 없음

두 실록은 유성룡에게 모두 칭찬과 비판을 섞었습니다. 선조실록은 칭찬을 이어 가다가 “그러나”라는 말에서 비판으로 돌아섰습니다. 수정실록은 1598년에는 그를 감싸 주었지만, 1607년 졸기에서는 절반이 넘는 분량으로 그의 허물을 적었습니다.

이순신에게는 두 실록 모두 비판을 한 글자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의 비판은 원균과 조정을 향했고, 수정실록은 평가 자체를 적지 않았습니다. 두 실록이 달랐던 것은 말하는 방식입니다. 선조실록은 칭찬과 안타까움을 사관이 직접 말했고, 수정실록은 의견을 적지 않고 장면만 보여 주었습니다.

두 실록이 다른 사람들을 두고는 자주 엇갈렸다는 것을, 이 연재는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죽음 기록에는 그를 깎아내린 문장이 두 실록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실록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원문을 확인하고, 여러 기사와 단어를 검색해서 확인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1등 공신에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임진왜란 선무공신 교서(宣武功臣敎書)*
편집장의 메모

책의 개정판을 만들 때 편집자가 먼저 손대는 것은 꾸미는 말입니다. 수정실록의 편찬자는 이순신에게 충성스럽고 용맹하다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적었고, 그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제사를 차리고 상여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나아가지 못했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졸기 13화에서는 백성들이 함께 슬퍼한 죽음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다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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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차 사료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 사헌부가 유성룡의 삭탈 관작을 요청하자 파직하라고 답하다 kna_13111019_003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1일 — 남이신이 군문 도감의 말을 아뢰다 kna_13111021_003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3일 — 군문 도감이 장수들이 하례를 하려고 한다고 아뢰다 kna_13111023_005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4일 — 정원이 이순신의 후임을 정하는 문제에 대해 아뢰다 kna_13111024_005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7일 —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사론 포함) kna_13111027_005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29일 — 비망기로 정원에 해상의 승리에 관한 전교를 내리다 kna_13111029_002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30일 — 정원에 이순신의 증직과 장사 문제를 전교하다 kna_13111030_006
  • 『선조실록』 106권, 선조 31년(1598) 11월 30일 — 예조가 이순신의 제사 문제를 여쭙다 kna_13111030_007
  •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 — 정언 문홍도가 유성룡을 탄핵하다 knb_13111001_001
  •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 — 통제사 이순신이 적의 구원병을 패퇴시키고 전사하다 knb_13111001_002
  • 한문 원문의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 선무공신교서 출처: 국가유산이미지 공공누리 1유형

헤아린 값에 대하여

  • 글자 수는 한문 원문에서 문장 부호와 빈칸을 빼고 한자만 헤아린 값입니다. 국역 기준이 아닙니다.
  • 조선왕조실록의 모든 날짜는 음력 기준입니다.
  • 27일 기사 573자는 이덕형의 보고 194자, 사론 머리의 사신왈(史臣曰) 3자, 사론 376자를 더한 값입니다. 사론은 6편과 같은 기준으로 머리의 세 글자를 빼고 헤아렸습니다.
  • 유성룡 20건, 이순신 3건은 기사 제목에 이름이 들어간 것만 헤아린 값입니다. 제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붙인 것입니다.
  • “처음 나온다”는 11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선조실록 기사 24건의 원문을 모두 확인한 결과입니다.
  • 졸기 0건은 조선왕조실록 DB에서 뽑은 졸기 목록을 기준으로 한 값입니다.
  • 두 실록 전체에서 이순신이 얼마나 자주 적혔는지는 이순신을 다르게 쓴 두 기록에서 다뤘습니다. 선조실록 172건, 수정실록 25건입니다. 분량은 14분의 1로 줄었는데, 이순신이 나오는 비율은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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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2편. 다음 편에서는 백성들이 함께 슬퍼한 죽음을 다루겠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