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宣祖實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조선시대 실록 중 유일하게 같은 시기를 다룬 두 개의 공식 기록이다. 두 실록의 차이는 단순한 오류 수정을 넘어, 편찬 주체(서인 vs 북인/남인)의 당파적 시각 차이도 담고 있다.
광해군 때 쓰인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각종 공문서, 승정원일기 잔편, 야사, 각지에서 올린 장계 등 원형에 가까운 26,679건의 기사를 담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 정권 아래 이식(李植) 등 서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담고 있는 기사는 1,867건으로 원본의 14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문맥이 정갈하고 인물에 대한 전기가 상세하다. 반면 서인 편향적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분량이 줄어든 실록에서 한 인물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졌다. 이순신(李舜臣)이다.
분량은 14분의 1로 줄고, 밀도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누군가 편집실에서, 지면이 좁아진 만큼 어디에 무게를 실을지 다시 골랐다는 뜻이다.
두 개의 데뷔
같은 사람의 첫 등장을, 두 실록은 다르게 골랐다.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1587년, 처벌 기록이다. 녹둔도(鹿屯島) 방비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하는 전교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1587) 10월 16일
감정도 서사도 없다. 처벌 명령이 두 문장으로 끝난다.
선조수정실록이 고른 첫 장면은 다르다. 1589년, 정읍 현감(井邑縣監) 임명 기사인데, 여기엔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1589) 12월 1일
처벌받은 하급 장교와, 유성룡(柳成龍)이 이웃으로 지켜보다 이름을 알린 인재. 실록이 인물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방식이 이렇게 갈린다. 사관이 어떤 문을 골라 인물을 등장시키느냐가 이미 그 인물에 대한 해석이다.
옥포, 두 장의 보고서
가장 뚜렷한 차이는 1592년 5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 기록에서 나온다. 같은 전투를 두 실록이 얼마나 다르게 썼는지, 분량으로만 봐도 열 배 넘게 차이 난다.
선조실록은 전과 보고서에 가깝다.
“전라 수사 이순신(李舜臣)은 주사(舟師)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23일
격파 사실, 포상 결정. 두 문장으로 전투 하나가 처리된다.
적선 격파 → 포상. 사실 나열형 두 문장.
원균의 도주 시도 → 부하 장수의 항의 → 정운·송희립의 눈물어린 설득 → 참전 결정 → 어깨 관통상을 입고도 하루 종일 지휘 → 거북선 발명 서사까지, 서너 배 긴 분량으로 전개.
선조수정실록은 같은 전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형세를 보고 전함을 침몰시킨 뒤 육지로 피하려 하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항의한다. 그 설득에 원균이 지원을 요청하고, 처음엔 다들 난색을 표하던 중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이 나서 출전을 권한다.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5월 1일
이 대사 이후, 이순신은 크게 기뻐하며 출전을 결정한다. 전투 중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종일 지휘를 멈추지 않았고, 싸움이 끝난 뒤에야 사람을 시켜 탄환을 파냈다는 대목이 이어진다. 곧이어 이순신이 직접 구상해 만들었다는 거북선의 구조 설명까지 붙는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없던 사실을 지어낸 게 아니라, 있었을 장면에 서사를 입힌 것이다 — 대사를 만들고, 갈등을 세우고, 부상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누가, 왜 다시 썼나
앞서 보았듯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 아래 편찬되었고, 원본인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 북인 계열이 주도해 만든 실록이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실록을 못마땅해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고, 선조 대의 경우 그 결과물이 통째로 다시 쓰였다. 이순신·유성룡 계열의 서사가 수정본에서 두드러지는 데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밀도 숫자와 옥포해전의 서술 차이가, 그 배경을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실제 문장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이 대조의 값어치다.
개정판을 낼 때 원고를 다시 손보라고 하면, 편집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디에 지면을 더 줄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 줄어드는 개정판이라면 더 그렇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4분의 1로 줄어든 지면에서, 그들은 이순신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로 골랐다. 사실은 그대로인데 이야기가 달라졌다 — 이게 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