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문을 닫은 날, 백성이 운 부고는 몇 건인가

전체 졸기 중 조정 바깥 사람들의 애도가 적힌 건 모두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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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에서 이순신의 상여 장면을 읽었습니다. 이순신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모두 제사를 차려 놓았으며, 상여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양반이 아니라 진짜 우리 백성들이 슬퍼했던 그런 부고, 곧 백성이 운 부고가 조선왕조실록에 몇 건이나 있는지 헤아려 보았습니다.

답부터 적겠습니다. 졸기 2,179건 가운데 조정 바깥의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적힌 사람은 9명이고, 기사로는 10건입니다. 그 가운데 한 건은 겨우 75자이고, 다른 한 건은 편찬자가 나중에 “보충한다”고 밝히며 써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장면을 가진 이순신은 이 명단에 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건 DB에서 확인한 값이므로 이순신과 같은 경우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점 감안해야 합니다.

말풀이

저자 · 가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거리, 곧 시장입니다. 한자로는 시(市)라고 씁니다.

I. 졸기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졸기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조정과 선비 사회, 그리고 임금입니다. 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적는 말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데, 그 말들의 주어를 보면 이 점이 드러납니다.

가장 많이 쓰인 말은 석지(惜之)입니다. ‘그를 애석하게 여겼다’는 뜻이고, 졸기 114건에서 116번 쓰였습니다. 그다음은 막불(莫不)입니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뜻이고, 79건에 나옵니다. 탄식하며 아까워했다는 차석(嗟惜)은 30건에서 31번 쓰였습니다.

이 말들 앞에 오는 주어는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사림(士林, 선비 사회),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 시론(時論)과 물론(物論, 둘 다 당시의 여론), 국인(國人, 나라 사람), 사류(士類, 선비 무리), 그리고 인개(人皆, 사람들이 모두)입니다. 조야나 국인은 넓게 읽으면 백성까지 품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슬퍼했는지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여론을 한 낱말로 요약할 뿐입니다.

차석 30건 가운데 영조와 정조 때의 것은 대부분 임금이 경연(經筵, 임금이 신하들과 글을 읽고 정치를 논하던 자리)에서 애석해한 기록입니다. 이때 슬퍼하는 사람은 임금 한 사람입니다.

졸기 2,179건에서 헤아린 애도의 말그 말이 쓰인 졸기 건수 · 한문 원문 기준석지(惜之)114건막불(莫不)79건차석(嗟惜)30건조정 바깥의 애도10건항곡 등 여덟 표현0건막불은 애도가 아닌 문맥에서도 쓰이는 말입니다. 건수는 그 말이 나오는 졸기를 모두 센 값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석지가 114건, 막불이 79건, 차석이 30건입니다. 이에 비해 조정 바깥 사람들의 애도가 장면으로 적힌 졸기는 10건(아홉 사람)이고, 백성이 길에서 우는 모습을 가리키는 정형 표현은 0건입니다.

II. 백성이 길을 막고 운 경우는 0건이다

백성이 길거리에서 모여 울었다는 뜻의 정형 표현은 졸기 2,179건에서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연재는 그런 표현 8개를 골라 졸기 전체를 살폈습니다.

표현뜻졸기 안
항곡(巷哭)거리에서 곡하다0건
여상고비(如喪考妣)제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다0건
취곡(聚哭)모여서 곡하다0건
반원(攀轅)수레의 끌채를 붙잡다0건
차도(遮道)길을 막다0건
사녀(士女)남녀 백성0건
촌맹(村氓)시골 백성0건
노유(老幼)늙은이와 어린이0건

이 말들은 실록에서 쓰이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실록 전체로 넓히면 항곡은 6건, 여상고비는 26건 나옵니다. 졸기에만 없는 것입니다.

여상고비가 어디에 쓰였는지를 보면 까닭 하나가 짐작됩니다. 26건 가운데 10건이 연산군일기에 몰려 있고, 모두 성종의 국상을 둘러싼 논쟁 기사입니다. 이 말이 가장 무겁게 쓰인 자리는 임금의 죽음이었습니다.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한다는 말을 신하의 부고에 쓰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저자를 닫는다는 뜻의 파시(罷市)는 조금 다릅니다. 실록 전체에서 21건이 쓰였고, 졸기에서는 딱 1건 쓰였습니다. 그 한 건은 IV절에서 읽습니다.

걸렸으나 애도가 아닌 것
낱말로 찾으면 애도가 아닌 기사도 함께 걸립니다. 이 연재는 걸린 기사의 문맥을 하나씩 읽어 걸러 냈습니다.

도인(都人, 도성 사람) 3건은 모두 애도가 아닙니다. 김제남 졸기에서는 그가 갇혔을 때 쌀을 던져 준 사람들이고, 인조실록의 한 건은 강도(江都)와 인사(人士)가 이어져 읽히면서 걸린 것입니다.

통곡(痛哭) 3건은 병을 가리키거나, 임금이 운 것이거나, 상소문 안의 말입니다. 유체(流涕, 눈물을 흘리다) 11건은 대부분 살아 있을 때의 장면이거나 임금이 운 것이고, 홍명구 졸기 한 건만 경계에 있습니다. 비읍(悲泣, 슬피 울다) 3건은 모두 졸기의 주인공 자신이 운 장면입니다.

거애(擧哀, 소리 내어 곡하는 의식)는 51건에서 78번 쓰였지만, 거의 전부 임금이나 세자가 치른 의례입니다. 나라의 의전이지 백성의 애도가 아닙니다. 도성 백성을 뜻하는 도민(都民)은 4건인데, 그 가운데 이보(1607)와 김흥경(1750)의 졸기는 애도가 아닙니다. 이보의 경우는 백성이 그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입니다.

III. 그런데 9명이 있다

정형 표현은 없었지만, 조정 바깥의 사람들이 슬퍼한 장면을 적은 졸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으로는 9명이고, 기사로는 10건입니다. 정구는 광해군일기의 두 판본에 졸기가 한 편씩 있고, 두 편 모두 같은 장면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2,179건 가운데 10건입니다.

인물실록분량누가 슬퍼했는가
황희 (1452)문종실록1,809자아전과 여러 관청의 하인들
이황 (1570)선조수정실록706자성균관 유생과 제자 수백 명
노진 (1578)선조수정실록327자고을 사람들, 원근의 사람들
이이 (1584)선조수정실록916자궁벽한 마을의 가난한 백성들
정구 (1620)광해군일기 중초본·정초본539자 · 532자장례에 모인 400여 명
김장생 (1631)인조실록360자원근에서 모인 천 명 가까운 사람들
송준길 (1672)현종개수실록1,001자성균관 유생, 사방에서 모인 천 명 가까운 사람들
서종태 (1719)숙종실록보궐정오206자도성 백성
서지수 (1768)영조실록75자도성 백성

일곱 사람의 문장을 시대 순서대로 놓아 보겠습니다. 서종태와 서지수는 따로 보겠습니다.

황희(黃喜)의 졸기입니다.

朝野莫不驚歎相弔, 吏胥及諸司僕隷, 皆設奠以祭, 前古所無也
조정과 민간에서 놀라고 탄식하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전들과 여러 관청의 하인들까지 모두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으니,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2월 8일

이황(李滉)의 졸기입니다.

太學生及弟子會葬者數百人
성균관 유생들과 제자들 가운데 장례에 모여든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3년(1570) 12월 1일

노진(盧禛)의 졸기입니다.

士大夫莫不相弔, 鄕人迎喪會葬, 遠近畢至
사대부들은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고을 사람들은 상여를 맞이하고 장례에 참여하였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1년(1578) 8월 1일

이이(李珥)의 졸기입니다.

窮閻小民, 往往相弔出涕曰 “民生無福矣”
궁벽한 마을의 가난한 백성들까지 곳곳에서 서로 조문하며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백성들에게 복이 없구나”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1584) 1월 1일

정구(鄭逑)의 졸기입니다. 이 대목은 중초본과 정초본에서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至是, 終于泗上之持敬齋, 年七十八, 會葬者四百餘人
이때 사상(泗上)의 지경재(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78세였다. 장례에 모인 사람이 400여 명이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정초본, 광해군 12년(1620) 1월 5일

김장생(金長生)의 졸기입니다.

及葬, 令本道給造墓軍, 遠近會葬者近千人>
장례를 치를 때가 되자 본도로 하여금 묘를 조성할 인력을 내주게 하였으며, 원근에서 장례에 모여든 사람이 천 명에 가까웠다.

『인조실록』, 인조 9년(1631) 8월 9일

송준길(宋浚吉)의 졸기입니다.

太學生相率擧哀, 官居野處, 莫不相弔, 四方會葬者, 幾千人
성균관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 애도하였고,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나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방에서 장례에 모여든 사람이 거의 천 명에 이르렀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3년(1672) 12월 5일)

9명이 모두 같은 무게는 아니다

이 9명을 “백성이 운 부고”라고 한데 묶으면 조금 넓게 잡은 것입니다. 누가 슬퍼했는지를 다시 보면 세 갈래로 나뉩니다.

이황과 송준길의 졸기에서 이름이 붙은 무리는 성균관 유생과 제자, 곧 선비들입니다. 관료는 아니지만 백성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김장생과 정구의 졸기는 각각 천 명 가까이, 400여 명이 모였다고 적었을 뿐,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장례에 모였다는 뜻의 회장(會葬)이라는 말 자체도 조정 바깥의 말만은 아닙니다. 이 말이 쓰인 졸기는 8건인데, 그 가운데 한명회와 유순정의 두 건은 임금이 백관에게 장례에 모이라고 명하거나 장례 절차를 정해 준 예우입니다. 나머지 5명, 곧 황희·노진·이이·서종태·서지수의 졸기에는 아전과 하인, 고을 사람, 가난한 백성, 도성 백성처럼 벼슬도 학문도 없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졸기만 보고 엄격하게 헤아리면 백성이 운 부고는 5건입니다.

기록한 사람이 스스로 드물다고 적었다

이 절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숫자가 아닙니다. 기록한 사람 자신이 그 자리에서 “드문 일”이라고 적어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황희의 졸기는 아전과 하인들이 제사를 지낸 장면 끝에 “전고소무야(前古所無也), 곧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서종태의 졸기는 도성 백성의 장면 끝에 “차우고한유자(此又古罕有者), 곧 이 또한 예로부터 보기 드문 일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두 글을 쓴 사람의 자리는 조금 다릅니다. 황희의 글은 문종실록의 졸기 안에 있습니다. 서종태의 글은 숙종실록이 아니라, 뒤에 따로 엮은 보궐정오의 졸기 안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V절에서 중요해집니다.

그래도 두 글이 말하는 것은 같습니다. 이 연재가 졸기 2,179건을 헤아려 드물다고 말하는 것은 DB에서 카운팅한 값입니다. 그러나 실록을 엮은 사람들도 이미 그것을 드문 일로 보았습니다.

IV. 75자

서지수(徐志修)의 졸기는 백성의 반응만으로 한 사람의 재상 생활을 평가한 유일한 졸기입니다. 한문으로 75자이고, 영조 44년(1768) 8월 1일 영조실록에 실렸습니다. 짧으니 전문을 놓겠습니다.

○朔丙辰/行判中樞府事徐志修卒。 志修家世淸素, 繼登台府, 忠愼廉潔, 自持如寒士。 前後屢進讜言, 旣入相, 中外民庶, 莫不欣然。 居位不久, 雖無所施措, 而輿情信嚮終不衰, 及是卒, 都民罷市相弔。
초하루 병진일. 행판중추부사 서지수가 죽었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그 역시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청렴결백하여 스스로를 가난한 선비처럼 지켰다. 전후로 여러 차례 거리낌 없는 바른말을 올렸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조정 안팎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재상 자리에 있은 기간이 오래지 않아 비록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와 기대는 끝내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 그가 죽자 도성의 백성들은 시장을 닫고 서로 조문하며 슬퍼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4년(1768) 8월 1일.

이 75자에는 졸기 전체에서 한 번씩만 나오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민서(民庶)라는 말입니다. 민서는 여느 백성을 가리킵니다. 졸기 2,179건에서 이 말은 두 번 쓰였습니다. 하나는 조준(趙浚)의 졸기인데, 조준이 임금에게 올린 말을 옮겨 적은 대목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관이 백성을 주어로 삼아 한 사람을 평가한 것은 서지수 졸기의 “중외민서, 막불흔연(中外民庶, 莫不欣然)”, 곧 “조정 안팎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 곳뿐입니다.

둘째는 파시(罷市)입니다. 졸기에서 저자가 문을 닫았다고 적은 것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이 한 번뿐입니다. 원문은 “도민파시상조(都民罷市相弔)”, 여섯 자입니다.

업적 칸을 비워 두고 쓴 부고

75자의 짜임을 따라가면 이렇습니다.

먼저 집안과 몸가짐을 적습니다. 대대로 청렴하고 검소한 집안이었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가난한 선비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이어서 거리낌 없는 바른말을 여러 번 올렸다고 적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졸기에서도 흔히 보는 칭찬입니다.

그다음부터 사관은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을 백성에게 넘깁니다. 재상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기뻐했습니다. 재상으로 있었던 동안 “수무소시조(雖無所施措),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와 기대는 끝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도성 백성들이 시장을 닫고 조문했습니다.

재상 서지수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백성의 반응 세 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기뻐했고, 믿음을 거두지 않았고, 가게 문을 닫고 서로 슬퍼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사관은 업적이 없었다는 말을 숨기지 않고 놓았습니다. 업적 칸이 비어 있다고 밝힌 뒤, 그 칸을 백성의 마음으로 채운 셈입니다. 이것이 이 75자를 읽는 이 연재의 해석입니다.

V. 보충한다고 적어 둔 졸기

서종태(徐宗泰)의 졸기에서 도성 백성의 장면은 처음 만든 숙종실록에는 없고, 나중에 덧붙인 보궐정오에만 있습니다. 두 실록은 같은 날, 곧 숙종 45년(1719) 2월 21일 자리에 서종태의 졸기를 한 편씩 실었습니다. 숙종실록의 것은 57자이고, 보궐정오의 것은 206자입니다. 3.6배 차이입니다.

말풀이

보궐정오(補闕正誤) · 빠진 것을 채우고(補闕) 잘못을 바로잡는다(正誤)는 뜻입니다. 숙종실록을 만든 뒤, 거기에 빠졌거나 잘못 적혔다고 본 기사를 따로 모아 덧붙인 책입니다. 원래의 숙종실록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서종태의 졸기는 같은 날짜에 두 편이 나란히 남았습니다.

당인(黨人) · 당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기사에서는 기록을 치우치게 쓴 쪽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먼저 숙종실록의 57자입니다.

○甲子/行判中樞府事徐宗泰卒。 年六十八。 宗泰爲人謙恭雅飭, 以文學, 致位台司。 雖無相業之可稱, 持論不爲過激, 律已淸約, 門無雜賓, 人以此多之。
갑자일. 행판중추부사 서종태가 죽었다. 나이 68세였다. 서종태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단정하고 삼갔다. 문학으로 이름을 떨쳐 높은 관직에 올랐다. 비록 재상으로서 특별히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었으나, 논의를 펼칠 때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집에는 잡스러운 손님이 드나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1719) 2월 21일.

다음은 보궐정오의 206자입니다.

○甲子/行判中樞府事徐宗泰卒。 年六十八。 訃聞, 世子下敎曰: “一疾忽劇, 凶問遽至。 聖心之衋傷, 余懷之驚怛, 曷可云喩?” 命致賻庀喪如例。 宗泰字魯望, 號晩靜。 天資近道, 端凝雅飭, 濟以謙謹, 終日穆然, 人不見慢容疾聲。 律已淸嚴, 雖例饋、賻贈, 稍多則却之。 深惡黨爭病國, 嘗持平議, 無偏心, 然遇大是非, 輒盡言之。 每以休退爲心, 不肯擔當時事, 而係縻隆知, 竟莫之遂, 眞所謂佩玉而心如枯木者也。 將葬, 都民傾城執紼以送, 此又古罕有者。 凡士流書卒, 初史無公筆。 宗泰以不深忤於黨人, 故貶誣獨不及, 而發揮有未悉, 玆復備述而補之。

갑자일. 행판중추부사 서종태가 죽었다. 나이 68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세자가 하교하였다. “한 번 병이 들더니 갑자기 위독해져 흉한 소식이 갑작스럽게 이르렀다. 성상께서 몹시 슬퍼하시는 마음과 내가 놀라고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명하여 관례대로 부의를 내리고 장례를 치를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서종태의 자는 노망(魯望)이고 호는 만정(晩靜)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도에 가까웠으며, 단정하고 침착하며 품행이 바르고 엄정하였다. 여기에 겸손하고 삼가는 성품까지 갖추어 하루 종일 온화하고 엄숙하였으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거만한 얼굴빛이나 성난 목소리를 볼 수 없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청렴하고 엄격하였다. 비록 관례에 따라 받는 선물이나 부의와 증여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많으면 물리쳤다.

당쟁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늘 공평한 의론을 지니고 편벽된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큰 시비가 걸린 일을 만나면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늘 벼슬에서 물러나 쉬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당시의 일을 맡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의 두터운 신임에 얽매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으로 이른바 ‘옥을 차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마른 나무와 같은 사람’이었다.

장례를 치르려 할 때 도성 백성들이 온 성을 비우다시피 몰려나와 상여의 끈을 잡고 전송하였다. 이것 또한 옛날에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대체로 사류의 졸기를 기록한 초기 사초에는 공정한 기록이 없었다. 서종태는 당인들과 크게 거슬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깎아내리고 모함하는 일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훌륭한 점을 드러낸 기록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자세히 서술하여 보충한다.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45년(1719) 2월 21일.

두 판본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숙종실록 57자숙종실록보궐정오 206자
조정의 예우없음세자의 하교, 관례대로 부의와 장례 비용을 내림
사람됨겸손하고 공손하며 단정하고 삼감타고난 성품이 도에 가까움, 하루 종일 온화하고 엄숙함
벼슬에 오른 까닭문학으로 높은 관직에 오름없음
재상으로서의 일“비록 재상으로서 특별히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었으나”물러나 쉬려 했으나 임금의 신임에 얽매여 뜻을 이루지 못함
논의하는 태도지나치게 과격하지 않음당쟁을 싫어하여 공평한 의론을 지님, 큰 시비에는 할 말을 다 함
몸가짐청렴하고 검소함(淸約), 잡스러운 손님이 없음청렴하고 엄격함(淸嚴), 부의조차 많으면 물리침
마지막에 평가하는 사람사람들(人)이 이 점을 높이 평가함도성 백성(都民)이 성을 비우고 나와 상여 끈을 잡음
편찬자의 말없음초기 사초에 공정한 기록이 없었으므로 보충함

처음 판본은 서종태를 깎지 않았다

보궐정오의 편찬자는 206자의 마지막 38자에 고쳐 쓴 까닭을 직접 적었습니다. 먼저 일반론을 말합니다. 사류(士類, 선비 무리)의 졸기를 적은 초기 기록에는 대체로 공정한 붓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서종태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는 당인들과 크게 부딪치지 않았으므로 깎아내림과 모함은 당하지 않았으나, 그의 훌륭한 점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연재는 지난 12편 동안 판본과 판본을 함께 보며, 뒤에 만든 쪽이 왜 앞의 것을 고쳐 썼는지를 바깥에서 추측해 왔습니다. 판본을 고쳐 쓴 동기가 기록 안에 이렇게 분명하게 남은 자리는 이 졸기 연재에서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말을 원문에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57자를 읽으면 편찬자의 말은 서종태에 관한 한 맞습니다. 57자는 서종태를 깎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단정했고,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집에 잡스러운 손님이 없었고, 사람들이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적었습니다. 유보가 붙은 곳은 재상으로서 칭송할 업적이 없었다는 한 구절뿐입니다. 짧고 담담하지만 모함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글입니다.

다만 편찬자의 일반론, 곧 다른 사류들의 졸기가 깎이고 모함당했다는 말은 이 기사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편찬자가 말한 “당인”이 누구인지도 이 기사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보궐정오의 편찬자가 그렇게 보았고 그렇게 적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숙종실록과 보궐정오가 다른 사람을 두고 어떻게 엇갈렸는지는 이 연재의 송시열 편에서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보궐정오가 옮겨 오지 않은 것

두 판본이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같은 곳은 앞머리 16자뿐입니다. 날짜와 벼슬과 이름과 나이, 곧 “갑자일. 행판중추부사 서종태가 죽었다. 나이 68세였다”입니다. 그 뒤의 41자 가운데 206자 안에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은 이름 종태(宗泰), 단정하고 삼갔다는 아칙(雅飭), 자신을 다스리는 데 청렴했다는 율기청(律已淸)으로 모두 7자입니다.

그렇다면 보궐정오가 옮겨 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넷입니다. 문학으로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구절(以文學, 致位台司), 재상으로서 칭송할 업적이 없었다는 구절(雖無相業之可稱), 집에 잡스러운 손님이 없었다는 구절(門無雜賓), 그리고 사람들이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는 마지막 구절(人以此多之)입니다. 논의가 과격하지 않았다는 구절(持論不爲過激)은 “공평한 의론을 지녔다(持平議)”로 모양을 바꾸어 들어왔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업적이 없었다는 구절입니다. 57자에서 서종태에게 붙은 유일한 유보가 206자에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그가 늘 물러나 쉬려 했으나 임금의 두터운 신임에 얽매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문장입니다. 이어서 “옥을 차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마른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로 그 문장을 칭찬으로 맺습니다.

두 글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206자도 서종태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새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57자가 “칭송할 업적이 없었다”고 적은 자리를, 206자는 “일을 맡기를 바라지 않았다”로 설명합니다. 같은 빈자리를 한쪽은 부족으로, 다른 쪽은 절제로 읽은 셈입니다. 이것은 두 글을 나란히 놓고 필자가 해석한 것입니다.

한 자만 바뀐 곳도 있습니다. 57자의 “율기청약(律己清約)”은 206자에서 “율기청엄(律己淸嚴)”이 되었습니다. 검소하다(約)가 엄격하다(嚴)로 바뀌었습니다. 뜻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지만, 몸가짐을 적은 4자 가운데 1자를 편찬자가 골라 바꿨습니다.

평가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두 판본은 모두 다른 사람의 반응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릅니다.

57자의 마지막 주어는 “사람들(人)”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과격하지 않고 청렴하며 집에 잡스러운 손님을 들이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I절에서 본 시론이나 물론처럼,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여론입니다.

206자에서 편찬자의 말 바로 앞에 오는 주어는 “도성 백성(都民)”입니다. 이들은 온 성을 비우다시피 나와 상여의 끈을 잡고 그를 보냈습니다. 편찬자는 거기에 “이것 또한 옛날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III절에서 읽은 그 글은 처음 기록이 아니라 보충의 것입니다.

편찬자는 “훌륭한 점”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충한 것은 칭찬의 말만이 아닙니다. 평가하는 사람이 여론에서 도성 백성으로 바뀌었고, 백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II절의 0건을 다시 읽는다

이 대목은 II절의 결론을 흔듭니다. 흔들리는 대로 적겠습니다.

같은 사람의 같은 장례를 두고, 한 판본에는 백성이 있고 다른 판본에는 없습니다. 도성 백성이 두 번 상여 끈을 잡았을 리는 없으니, 달라진 것은 장례가 아니라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졸기에 백성이 드문 까닭도 두 가지로 읽힙니다. 백성이 울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백성이 울었어도 사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II절에서 나온 0건은 앞의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헤아린 값이 말해 주는 것은 “졸기에 적히지 않았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리고 서종태의 경우, 적히지 않았던 것이 적히게 된 까닭을 편찬자가 직접 밝혀 두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도민(都民)이 애도의 주어가 된 졸기는 2,179건 가운데 두 건, 곧 1719년의 서종태와 1768년의 서지수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중추부의 종1품 벼슬)로 죽었습니다.

두 졸기는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서지수의 할아버지가 서종태입니다. 서종태의 아들인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서지수의 아버지이고, 서지수가 1766년 정승에 오르면서 세 사람은 3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집안이 되었습니다. 도성 백성이 슬퍼했다고 적힌 졸기 두 건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것이었고, 두 죽음 사이는 49년입니다.

두 사람의 졸기에는 같은 짜임의 문장이 하나씩 있습니다. 서종태의 57자에는 “수무상업지가칭(雖無相業之可稱)”, 서지수의 75자에는 “수무소시조(雖無所施措)”가 있습니다. 둘 다 “비록 ~은 없었으나”로 시작해 재상으로서의 일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사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과 도성 백성의 장면이 놓인 자리는 다릅니다. 서지수의 경우 둘은 한 졸기 75자 안에 함께 있습니다. 서종태의 경우 업적이 없다는 문장은 숙종실록의 57자에만 있고, 도성 백성의 장면은 보궐정오의 206자에만 있습니다. 한 사관이 한 편에 적은 것을, 서종태의 기록은 두 책에 나누어 가진 셈입니다.

VI. 이 명단에 없는 사람

가장 강한 장면을 가진 부고는 이 명단 밖에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입니다. 12편에서 확인했듯이 그에게는 졸기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졸기 목록을 살피는 이 연재의 방법으로는 잡히지 않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그의 죽음을 249자로 적었습니다. 그 끝부분은 이렇습니다.

그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모두 제사를 차려 놓았으며, 상여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해안 지방의 사람들은 서로 이끌고 사당을 세워 그 사당을 ‘충민(忠愍)’이라 불렀다.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

이 장면이 실린 곳도 수정실록, 곧 뒤에 고쳐 쓴 판본입니다. 서종태의 상여 끈 장면이 보궐정오에 있었던 것과 같은 자리입니다. 이것이 우연인지는 두 사례만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연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 편에서 얘기한 9명은 “졸기”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 2,179건 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순신처럼 다른 제목 아래 부고가 적힌 사람 가운데에도, 백성이 운 장면을 가진 사람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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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메모

개정판 머리말에 편집자가 흔히 쓰는 말은 “초판의 미흡한 점을 보완했다”입니다. 초판을 만든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보궐정오의 편찬자는 그 말을 했고, 그 보충 안에 성을 비우고 나온 백성들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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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차 사료

  •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 2월 8일 — 황희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ea_10202008_001
  • 『선조수정실록』 4권, 선조 3년(1570) 12월 1일 — 이황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0312001_001
  •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1578) 8월 1일 — 노진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1108001_002
  •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17년(1584) 1월 1일 — 이이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1701001_001
  • 『광해군일기』 중초본 52권, 광해군 12년(1620) 1월 5일 — 전 대사헌 정구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201005_001
  • 『광해군일기』 정초본 148권, 광해군 12년(1620) 1월 5일 — 전 대사헌 정구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1201005_001
  • 『인조실록』 25권, 인조 9년(1631) 8월 9일 — 김장생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pa_10908009_002
  • 『현종개수실록』 26권, 현종 13년(1672) 12월 5일 — 송준길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rb_11312005_001
  •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1719) 2월 21일 — 행 판중추부사 서종태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sa_14502021_001
  • 『숙종실록보궐정오』 63권, 숙종 45년(1719) 2월 21일 — 행 판중추부사 서종태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sb_14502021_001
  •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1768) 8월 1일 — 판 중추부사 서지수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8001_001
  • 『선조수정실록』 32권, 선조 31년(1598) 11월 1일 — 통제사 이순신이 적의 구원병을 패퇴시키고 전사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b_13111001_002
  • 한문 원문의 번역은 필자가 AI를 이용해 번역하고 감수한 것입니다.

헤아린 값에 대하여

  • 글자 수는 한문 원문에서 문장부호와 빈칸을 빼고 한자만 헤아린 값입니다. 국역 기준이 아닙니다. 서종태 57자와 206자, 서지수 75자에는 모두 기사 머리의 날짜 간지(甲子, 朔丙辰)가 들어 있습니다. 두 판본의 배율 3.6배도 같은 기준으로 나눈 값입니다.
  • 서종태 졸기 206자 가운데 편찬자가 보충의 까닭을 밝힌 마지막 문단(凡士流부터)은 38자입니다. 두 판본에서 똑같은 머리 16자와 그대로 옮겨진 일곱 자는 한자만 비교해 확인한 값입니다.
  • 졸기 건수는 조선왕조실록 DB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제목에 “졸기”를 붙인 기사 2,179건을 기준으로 한 값입니다. 이순신처럼 다른 제목 아래 적힌 부고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 낱말 건수는 그 낱말이 한 번 이상 나오는 졸기의 수입니다. 같은 졸기 안에서 여러 번 나오면 등장 횟수를 따로 적었습니다(석지 116회, 차석 31회, 거애 78회).
  • 조정 바깥 사람들의 애도가 적힌 9명(기사 10건)은 낱말로 찾은 뒤 문맥을 하나씩 읽어 가려낸 것입니다. 이 가려내기에는 필자의 판단이 들어갑니다.

연재의 다른 편은 연재 목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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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3편. 다음 편에서는 저자를 닫게 한 사람, 서지수를 따라갑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