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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기 2 · 황희 — 삭제되지 않은 문장

    지난 편의 이이는 열두 글자였습니다. 이번에는 정반대입니다. 사관이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중 무엇을 남길지를 두고 아홉 명이 모여 다퉜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록이 실록에 남았습니다.

    I. 이 사람

    황희(黃喜), 1363~1452.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입니다.

    재상으로 스물네 해를 지냈고, 죽을 때 아흔이었습니다. 졸기는 시호의 뜻까지 풀어 적어두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멀리 미치는 것이 익(翼), 재상으로서 능히 끝을 잘 마치는 것이 성(成)입니다.

    황희 초상화
    황희 초상화

    II. 한 문서 안의 두 문장

    부고에 칭찬을 늘어놓고 끝에 아쉬운 점 한 줄 붙이는 일은 흔합니다. 황희의 졸기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앞쪽에서 사관은 이렇게 씁니다.

    황희는 너그럽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무거워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풍채가 크고 뛰어났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을 검소하게 다스렸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못 박습니다. 재상으로 있은 스물네 해 동안 조정 안팎이 우러러보며 모두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고.

    그런데 몇 문단 뒤에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너그러워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부족하였고, 청렴하고 절조 있는 지조가 모자랐다. 오랫동안 정권을 맡아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았다.

    모두가 어질다고 했다는 문장과, 비난이 적지 않았다는 문장이 한 문서 안에 있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그랬다”는 형식입니다. 어느 쪽이 그 사람들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III. 사관이 고른 단어

    지난 편을 기억하실 겁니다. 실록 전체 졸기 2,179건에서 청백(淸白)은 40회로 가장 많이 쓰인 칭찬어였습니다. 이이의 졸기에는 그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에 남은 곡식이 없었다는 장면이 놓여 있었습니다. 청렴하다고 쓰는 대신 빈 곳간을 보여준 것입니다.

    황희의 졸기에서 사관은 정반대 방향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재물을 탐한다”고 옮긴 대목의 원문은 `頗有簠簋之誚`입니다. 보(簠)와 궤(簋)는 제사 때 곡식을 담는 그릇입니다. 뇌물도 부정도 아니고 제기(祭器)입니다.

    옛 문헌에서 관리의 부정을 지목할 때, 죄를 직접 말하지 않고 “제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에둘러 말하는 관용이 있었습니다. 대신에 대한 예우입니다. 사관은 그 오래된 표현을 꺼내 씁니다. 뇌물이라 쓰지 않고, 그릇을 빌려 씁니다.

    이이에게는 칭찬어를 쓰지 않고 장면을 놓았고, 황희에게는 비난어를 쓰지 않고 옛말을 놓았습니다. 두 번 다 사관은 직접적인 단어를 피했습니다.

    IV.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적었나

    비난만 적고 끝냈다면 소문에 그쳤을 겁니다. 사관은 근거를 셋 댑니다. 셋 다 가족입니다.

    처남. 처남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자, 황희는 풍문에서 나온 일이라며 글을 올려 그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들. 아들 치신(致身)이 몰수당한 과전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받게 해 달라고 글을 올려 청했습니다.

    그리고 황중생. 황중생(黃仲生)이라는 자를 서자로 삼아 집에 드나들게 했는데, 중생이 사형죄를 범하자 비로소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성을 조(趙)로 바꿔버렸습니다.

    사관은 이 대목을 이 한 줄로 닫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해하였다.

    애석하다는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V. 같은 사관이 적어둔 다른 장면

    그런데 같은 졸기에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황희가 죽자 조회를 사흘 멈추고 관에서 장례를 마련했습니다. 조선에서 이건 최고 등급의 국가 예우입니다.

    그리고 사관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관리와 아전, 여러 관청의 하인들까지 모두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고 사관이 직접 적었습니다.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을 적은 그 사관이, 관청의 하인들까지 제 돈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적었습니다.

    VI. 이것보다 센 기록이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졸기 안의 이야기입니다. 실록에는 이보다 훨씬 격한 황희 기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호문(李好問)이라는 사관이 남긴 사초입니다.

    황희가 죽고 다섯 달 뒤, 『세종실록』을 편찬하던 자리에서 지춘추관사 정인지가 그 사초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회의가 열립니다. 참석자는 황보인, 김종서, 허후, 정창손, 신석조, 최항 등 아홉 명. 여기에 기주관으로 성삼문과 이예가 있었습니다.

    이 회의록 덕분에 이호문이 무엇을 적었는지가 조목별로 남았습니다.

    첫째, 출생. 황희는 황군서(黃君瑞)의 얼자, 곧 첩의 아들이라는 것.

    둘째, 매관매직. 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 재물이 거만(鉅萬)에 이르렀다는 것.

    셋째, 노비. 황희는 물려받은 종이 없고 장인에게 받은 것도 한둘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부리는 종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

    넷째, 황금 대사헌. 김익정(金益精)과 잇달아 대사헌을 지내면서 두 사람 모두 승려 설우(雪牛)에게 금을 받았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 불렀다는 것.

    여기에 박포(朴苞)의 아내와 얽힌 이야기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VII. 아홉 명의 검증

    정인지가 먼저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정하여야겠다.”
    —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첫째 조목만 인정됩니다. 그런 말이 전부터 있었고 황희 본인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는 겁니다. 나머지는 아무도 들은 바가 없다고 합니다.

    허후가 이어받아 황금 대사헌 대목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적어놓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여덟아홉 명 중 어째서 한 사람도 들어본 적이 없느냐는 겁니다. 소문이라면 소문을 들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는 것도 밝힙니다. 그러면서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삭제하자고 합니다.

    김종서도 거듭니다. 규문 안의 은밀한 일이라면 모를까 나머지는 이목에 퍼졌을 텐데 왜 아무도 모르느냐고. 김익정은 자기 재종형인데 청렴을 지킨 사람이라 뇌물을 받았을 리 없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같은 기사

    VIII. 그 방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

    이 회의에는 눈여겨볼 규범이 하나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관계를 스스로 밝힙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고 말한 뒤 그의 사람됨을 평가했습니다. 김종서는 김익정이 자기 재종형이라고 말한 뒤 그가 뇌물을 받았을 리 없다고 했습니다. 판단을 내놓기 전에 자기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인지를 먼저 대는 것 — 이건 이해관계를 고지하는 절차입니다. 그들은 그 절차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밝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황희가 죽고 닷새 뒤, 임금이 그를 세종 묘정에 배향할지를 의정부에 물었습니다. 찬성한 사람이 김종서, 정분, 허후였습니다. 황희는 전쟁의 공은 없으나 임금을 도와 이룬 공이 크고 대신의 체모를 갖추었으니 배향해도 사람들의 이목에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 뒤, 황희의 비리 기록을 지우자고 앞장선 사람이 허후와 김종서입니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황희를 세종의 사당에 모셔야 한다고 공언한 처지였습니다. 그 기록이 사실로 굳으면 자기들이 올린 배향 건의가 흔들립니다. 판정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판정 대상에 이해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친척 관계는 밝히면서, 다섯 달 전 자신들이 황희를 사당에 모시자고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회의록 어디에도 그 말은 없습니다.

    이호문의 기록이 근거 없다는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홉 명이 아무도 들은 적 없다는 진술에는 무게가 있고, 곧 나올 성삼문의 관찰은 오히려 그들 편을 듭니다. 다만 검증의 형식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마저 기록에 남아, 우리가 지금 그것을 세고 있습니다.

    IX. 종이 색깔

    삭제하자는 쪽이 우세했는데도 반론이 나옵니다. 최항과 정창손이 말합니다. 이 건은 명백하니 지워도 무방하지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나중의 폐단을 막기 어렵다고. 고치기 시작하면 어디서 멈추겠느냐는 겁니다.

    성삼문과 이예는 다른 각도에서 찌릅니다. 나쁜 기록은 사서라며 남겨두고 좋은 기록은 못 믿겠다며 지운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성삼문이 결정적인 관찰을 내놓습니다.

    “오랫동안 연진(烟塵)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 같은 기사

    사초 뭉치는 세월에 절어 다 누렇게 변했는데, 문제의 그 한 장만 하얗다는 겁니다.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뜻입니다. 종이 색으로 위조를 잡아낸 셈입니다.

    결국 이날 삭제된 것은 황희 대목이 아니라 다른 인물(권제)의 졸기 한 줄이었습니다.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기록은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것을 읽고 있습니다.

    X. 편집장의 메모

    교정지를 앞에 놓고 이 문장을 뺄지 말지 정하는 회의는 지금도 있습니다. 근거가 약하다는 걸 다들 알면서도 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빼는 순간, 다음번에는 무엇을 근거로 남길 거냐는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1452년의 그 방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지워도 되지만, 한 번 열어놓으면 막기 어렵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본 적 없다는 「황금 대사헌」이 육백 년을 살아남았습니다.

    고치지 않기로 한 것도 편집입니다. 그날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출처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2월 8일 ·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 원문 보기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 원문 보기

    졸기 인용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며, 어휘 집계도 한문 원문 기준입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2편.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