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서지수(徐志修)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은 날, 한양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 2,179건 가운데 백성이 저자를 닫고 조문했다고 기록한 것은 이 한 건뿐입니다. 13편에서 그의 졸기 75자를 읽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같은 졸기의 다른 문장입니다. 사관은 그가 “재상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아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한 일이 없다는 정승을 위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이번 편은 그 까닭을 묻습니다.
실록에는 가게 문을 닫은 사람들의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서지수가 임금 앞에서 한 말, 그 말 때문에 임금이 내린 처벌, 그리고 몇 해 뒤 실록이 적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 셋을 따라가면 하나의 답이 보입니다. 서지수는 정승 자리에 세 번 올랐고, 임금에게 “지나치다”는 말을 하다가 다섯 번이나 쫓겨났습니다. 그 말 가운데 하나는 도성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긴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답이 어디까지 기록이고 어디부터 풀이인지는 VII절에서 나누어 밝히겠습니다.
I. 서지수는 누구인가
서지수는 영조(英祖) 때의 정승입니다. 벼슬은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정승 자리에 있었던 날을 모두 합치면 넉 달 안팎입니다.
먼저 기본 사항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죽은 날과 죽을 때의 벼슬은 실록에서 확인한 값입니다. 본관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나머지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왔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이름 | 서지수(徐志修) |
| 본관 | 대구(大丘) |
| 자·호 | 자 일지(一之), 호 송옹(松翁)·졸옹(拙翁) |
| 태어난 해 | 1714년(숙종 40) |
| 죽은 날 | 1768년(영조 44) 8월 1일 |
| 죽을 때 벼슬 |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
| 시호 | 문청(文淸) |
삼대가 정승이었던 집안
서지수의 할아버지는 13편에 나온 서종태(徐宗泰)이고,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서명균(徐命均)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지수가 영의정에 오르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상신(相臣, 정승)이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모두 정승에 오른 집안입니다.
같은 사전에 따르면 그는 1733년 진사가 되었고, 1740년 증광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그 뒤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 대사헌, 이조판서처럼 학문과 명망을 갖춘 사람이 맡는 자리를 두루 거쳤습니다. 벼슬길 자체는 순탄한 엘리트의 길이었습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임금과의 관계였습니다.
그가 모신 임금, 영조
서지수의 벼슬살이는 거의 전부 영조의 시대에 있습니다. 영조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영조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 두면 좋습니다. 하나는 그가 형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형이 왕일 때 동생인 그가 대신 나랏일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이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하들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크게 다투던 때였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III절의 장면에 모두 나옵니다. 그리고 VI절에서 서지수가 마지막으로 꺼낸 말도 이 상처와 이어져 있습니다.
II. 75자를 다시 읽는다
서지수의 졸기는 그를 칭찬하는 말로 가득하지만, 그가 받은 벌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먼저 전문을 다시 놓겠습니다.
초하루 병진일. 행판중추부사 서지수가 죽었다. 서지수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그 역시 이어서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청렴결백하여 스스로를 가난한 선비처럼 지켰다. 전후로 여러 차례 거리낌 없는 바른말을 올렸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조정 안팎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재상 자리에 있은 기간이 오래지 않아 비록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와 기대는 끝내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 그가 죽자 도성의 백성들은 시장을 닫고 서로 조문하며 슬퍼하였다.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1768) 8월 1일
실록과 이 글에서 인용한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입니다.
말풀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중추부는 맡은 일이 거의 없는 높은 관청으로, 정승을 지낸 사람들이 물러나 머무는 자리로 쓰였습니다. 판중추부사는 그 우두머리이고 줄여서 판부사(判府事)라고 합니다. 앞에 붙은 행(行)은 품계가 벼슬보다 높을 때 붙이는 글자입니다.
당언(讜言) 임금의 뜻이나 권세를 가리지 않고 하는 곧은 말, 곧 직언입니다.
이 75자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집안과 본인이 청렴했다는 것, 바른말을 여러 번 했다는 것, 정승이 되자 백성이 기뻐했다는 것, 그리고 오래 있지 않아 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관은 이미 자기 답을 적어 두었습니다. “雖無所施措(수무소시조), 비록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지만, 而輿情信嚮終不衰(이여정신향종불쇠), 백성들의 신뢰와 기대는 끝내 줄어들지 않았다.”
한문의 ‘비록 ~이지만(雖~而)’은 앞과 뒤가 서로 기대와 어긋날 때 쓰는 짜임입니다. 사관은 백성의 신뢰가 업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밝힌 셈입니다. 그렇다면 신뢰는 앞 문장들, 곧 청렴과 바른말에서 나왔다는 것이 사관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사관은 두 가지를 적지 않았습니다. 그 바른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재상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는지(居位不久)”입니다. 이제부터 읽을 기사들이 그 빈칸에 들어갈 내용입니다.
III. 1752년, 눈 내리는 선화문 앞에서
서지수가 처음 영조의 분노를 산 것은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선 날이었습니다. 그는 바른말을 한 대가로 그 자리에서 벼슬을 잃고 울산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영조 28년(1752) 12월 8일, 눈과 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었습니다. 영조는 궁궐의 선화문(宣化門)에 나가 앉아 “크고 작은 모든 공사(公事)를 동궁(東宮)에 들이라”고 명했습니다. 나랏일을 모두 세자에게 넘기겠다는 뜻입니다. 이때의 세자는 훗날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말풀이
동궁(東宮) 세자가 사는 궁이라는 뜻에서, 세자를 가리키는 말로 씁니다.
대리청정(代理聽政) 임금 대신 세자가 나랏일을 맡아보는 것입니다. 이날 영조는 대리청정을 넘어 아예 물러나려 했습니다.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선위(禪位)라고 합니다.
대사간(大司諫)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말하는 관청인 사간원의 우두머리입니다.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것이 본래 맡은 일입니다.
신하들이 몰려와 말렸습니다. 그 가운데 대사간 서지수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종께서 내게 대리청정을 명하셨을 때 크고 작은 모든 공사가 모두 내게 들어왔는데, 나는 이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흉악한 말을 들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의 오랜 고통스러운 마음을 펼 수 있겠는가?
I절에서 말한 오랜 상처가 이것입니다. 형이 왕일 때 동생이 나랏일을 맡았다는 사실을 두고, 영조가 형의 자리를 넘보았다는 말이 오래 따라다녔습니다. 영조는 이번에는 자기가 아들에게 나랏일을 넘겨서 그 일이 떳떳한 전례였음을 보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영조의 말을 바탕으로 한 풀이입니다.
그때 서지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지난번 옛 궁궐에서 환궁하실 때 대신들이 우선 전하의 뜻을 받들겠다고 말한 것이 성덕에 누가 되었습니다.
대신들이 임금의 뜻을 “일단 받들겠다”고 물러선 것이 오히려 임금의 덕에 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임금을 말리지 못한 대신들을 탓하는 말이면서, 이런 일을 되풀이하는 임금에게도 곧게 건넨 말입니다. 영조의 대답은 곧바로 나왔습니다.
서지수를 우선 체직하라. 의리를 안다는 서지수가 이렇단 말인가? 서지수는 본래 괴이한 부류이며, 그 아비와 할아비 때부터 그러하였다.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 12월 8일
“그 아비와 할아비 때부터”. 영조는 서지수 한 사람을 꾸짖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집안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말한 할아비는 13편에서 도성 백성이 상여 끈을 붙잡았다는 서종태입니다.
장령(掌令, 사헌부의 관리) 김광국(金光國)이 서지수를 조금 감싸자, 영조는 “대간도 당파를 감싸려 하는가?”라며 그마저 갈아 치웠습니다. 그리고 서지수를 울산부(蔚山府)로 유배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같은 날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두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노론은 예전에 대리청정 문제로 화를 입었기 때문에 겁을 내어 따르지 않고, 소론은 대리청정을 죄로 몰았던 쪽이라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광국을 꾸짖은 “당파”라는 말로 보아, 영조는 이날 신하들의 만류를 당파의 계산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이날의 소동은 대비(大妃)가 추운 전각까지 직접 나와 영조를 여러 차례 달래고서야 가라앉았습니다. 영조는 “30년 동안 품어 온 괴로운 마음을 이번에도 이루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라는 말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영조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IV. 1761년, “때때로 지나친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책은 9년 뒤,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지나치다”고 말한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 한마디로 서지수는 사흘 사이에 파직, 충주 부처, 제주 대정현 위리안치를 차례로 받았습니다.
같은 해 4월, 세자가 임금의 허락 없이 몰래 관서(關西, 평안도)에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이때 서지수는 서명응(徐命膺) 등과 함께 이를 걱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 세자가 이듬해 뒤주에 갇혀 죽는 사도세자입니다. 그러나 9월에 서지수가 받은 문책은 이 일과는 다른 사건에서 나왔습니다.
한 유생의 상언
영조 37년(1761) 9월 5일, 충청도 한산(韓山)의 유생 이정(李涏)이 임금 앞에 끌려왔습니다. 발단은 그가 올린 상언(上言)이었습니다.
말풀이
상언(上言) 백성이나 벼슬 없는 선비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입니다. 벼슬아치가 올리는 상소(上疏)와 구별해 부릅니다.
유적(儒籍) 성균관이나 향교에 이름이 오른 유생의 명부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지우면 선비의 자격을 잃습니다.
대불경(大不敬) 임금이나 왕실을 크게 모독한 죄입니다. 역모에 버금가는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기사년의 일 1689년(숙종 15) 숙종이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한 일입니다. 오두인(吳斗寅)과 박태보(朴泰輔)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에게 직접 국문을 받았고, 고문 끝에 귀양길에서 죽었습니다. 숙종은 영조의 아버지입니다.
이정의 아버지 이현석(李賢錫)은 기사년에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렸지만, 그 상소는 임금에게 닿지 못했습니다. 이정은 그런 아버지를 기려 달라는 상언을 올렸습니다. 문제는 그 안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오두인·박태보 등 세 신하가 참혹하게 혹형을 당하였다.
이 신하들에게 형벌을 내린 사람은 숙종이었습니다. “참혹한 혹형”이라는 말은 결국 숙종이 참혹했다는 말이 됩니다. 영조에게 숙종은 아버지이자 선왕입니다. 영조는 놀라 이정의 이름을 유적에서 영구히 지우라고 했고, 신하들이 “대불경”이라고 거들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 표현은 참으로 대불경이다.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5일
그리고 이정을 직접 국문하겠다고 명했습니다.
9월 8일, 경연에서
말풀이
경연(經筵)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유교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입니다. 아침에 하는 것을 조강, 낮에 하는 것을 주강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경전을 빌려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친국(親鞫) 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본래 역모처럼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죄에만 열었습니다.
사흘 뒤 아침 경연에서 《중용》을 읽었습니다. 경연의 지사(知事)로 참석한 서지수가 ‘중’의 뜻을 빌려 말을 꺼냈습니다.
‘중(中)’이라는 것은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 일을 처리하실 때 미치지 못할 염려는 없지만, 때때로 지나친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자면, 신이 비록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일이 역모를 범한 것과 관련되어야만 친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지수는 이정의 글이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역모가 아닌 일에 임금이 직접 국문까지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했을 뿐입니다. 경전의 한 글자를 빌려, 절차가 지나치다는 점을 짚은 말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조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가 원릉을 바라본다면, 어찌 ‘피(被)’ 자 아래의 두 글자에 대해 감히 너그럽게 논할 수 있겠는가? 임금에게 거슬리더라도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비록 임금을 섬기는 도리라 하지만, 어찌 감히 이런 일에까지 그것을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피(被) 자 아래의 두 글자”는 이정의 상언 가운데 “혹형을 당하였다(被酷刑)”의 “혹형(酷刑)”입니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서지수를 파직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한 번 더 명을 내렸습니다.
직책이 총재(冢宰)에 있으면서 무슨 마음으로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였는가? 이정은 무심코 범한 것이지만, 서지수는 마음을 두고 한 일이며 임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자이다. 충주(忠州)에 부처하여 ‘충(忠)’ 자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 좋겠다.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8일
말풀이
총재(冢宰) 관리의 인사를 맡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부처(付處) 유배의 한 가지로, 정해 준 고을 안에서만 지내게 하는 벌입니다.
“무슨 마음으로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였는가”는 경연에서 서지수가 한 “때때로 지나친 경우가 있다”는 말을 되받은 것입니다. 충주의 ‘충’은 충성 충(忠) 자입니다. 충주에 보내 충성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영조는 글을 쓴 이정은 “무심코 범했다”고 하고, 서지수는 “마음을 두고 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유생보다 “그 처벌이 지나치다”고 말한 신하를 더 무겁게 본 것입니다.
9월 9일, 제주 대정현
이튿날 영조는 이정을 다시 국문했습니다. 상언을 대신 지어 준 송보명(宋普命)과, 글을 다듬어 준 황경원(黃景源)도 끌려왔습니다. 송보명이 죄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라는 명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가 역모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불경죄라면 곧 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역모가 아니다”라는 말에 영조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말은 서지수가 ‘역죄가 아니다’라고 한 말과 한 줄기로 이어지는구나.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9일
영조는 그 자리에서 서지수를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하라고 명했습니다. 황경원은 거제부에 기한 없이 위리안치했습니다.
대정현은 제주도 남쪽 끝의 고을입니다. 하루 만에 유배지가 충주에서 바다 건너 제주 끝으로 옮겨 갔습니다. 서지수가 경연에서 한 말은 “역모와 관련된 일이라야 임금이 직접 국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조는 이 말을이정의 상언이이 “역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국문장에서 송보명이 “역모를 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자, 두 사람의 말을 한 줄기로 묶었습니다.
9월 10일, “서지수를 스승으로 삼아”
다음 날 영조는 긴 전교를 내렸습니다.
서지수 같은 자는 벼슬이 총재에까지 이르렀고 사람들의 평가 또한 어떠한 사람인가? 그런데 감히 이와 같이 하였단 말인가? 말세에 명망을 자임하는 자들은 반드시 서지수를 스승으로 삼아 의리를 쓸모없는 물건처럼 내던지게 될 것이다. 엄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무엇으로 임금이 되며, 신하는 무엇으로 신하가 되겠는가?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10일
영조는 위리안치된 서지수와 황경원을 길을 재촉하여 압송하라고 명했습니다. 같은 날 송보명을 묵게 해 준 박순원(朴順源)이 붙잡혀 왔습니다. 영조가 “이정을 구하려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박순원은 “서지수가 그랬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영조는 그가 “여러 세신(世臣)들도 분별하지 못한 것을 분별했다”며 풀어 주고 옷감까지 내렸습니다.
영조가 서지수를 두려워한 까닭이 이 전교에 드러납니다. 서지수는 “사람들의 평가”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말은 뒷사람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영조는 서지수의 명망 때문에 그를 더 무겁게 벌했습니다. 7년 뒤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닫게 만든 바로 그 명망입니다.
말풀이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지의 집 둘레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 그 안에서만 지내게 하는 벌입니다. 부처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실록은 극(棘, 가시나무)이라는 글자로 이 벌을 적었습니다.
세신(世臣) 대대로 나라나 임금을 섬겨 온 신하, 또는 벼슬을 대대로 이어온 집안의 가신(家臣) 및 중신(重臣)을 뜻합니다.
9월 11일, 신하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도 영조는 대신들을 불러 서지수의 일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가령 경들의 아버지나 형이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두고 ‘혹형을 행하였다’고 말한다면 경들은 그 사람을 형신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오늘 여러 신하가 서지수를 처분한 의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러 주는 것이다. 그 여덟 글자의 하교를 보고서도 어떻게 감싸고 변호할 수 있겠는가?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11일
영조의 비유는 “경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사건이 영조에게 아버지 숙종의 일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신하들이 서지수를 감싸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임금이 날마다 설명해야 할 만큼, 조정은 서지수의 유배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정은 9월 10일 네 차례 형을 받았고, 9월 12일 옥에서 죽었습니다.
실록이 밝힌 뒷사정
9월 9일 기사의 끝에는 이 사건이 어떻게 커졌는지가 따로 적혀 있습니다. 홍인한(洪麟漢)이 황경원을 미워하여, 황경원의 고모부인 이정의 상언을 빌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홍인한이 “혹형을 당했다는 말은 선왕을 범한 것”이라고 승지 이심원(李心源)에게 말했고, 이심원이 임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아뢰었습니다. 황경원을 잡아들이자고 청한 판의금부사 이익정(李益炡)도 황경원과 사이가 나빴다고 실록은 적었습니다.
실록이 홍인한을 “적신(賊臣)”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조실록이 정조 때 편찬되었기 때문입니다.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한 뒤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뒷사정은 사건 당시가 아니라 편찬 당시의 눈으로 적힌 것입니다. 다만 기록대로라면 서지수는 이 사건의 표적도 아니었습니다. 남을 겨눈 싸움에서, 절차가 지나치다고 말했다가 제주 끝까지 밀려난 것입니다.
이 장면을 II절의 졸기와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영조는 충성을 배우라며 그를 충주로 보내라 말했습니다. 7년 뒤 사관은 그의 사람됨을 4자로 적으면서 첫 머리에 바로 그 충(忠) 자를 놓았습니다. 충신염결(忠愼廉潔),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청렴하고 깨끗했다는 뜻입니다.
V. 1766년 여름, 20일도 안 돼 잘린 우의정
서지수가 처음 정승이 된 것은 영조가 직접 그를 골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채 20일도 지나지 않아, 같은 임금이 그를 파직했습니다.
영조 42년(1766) 6월 23일, 좌의정이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며 물러나자 새 정승을 뽑게 되었습니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넌지시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말을 하자, 영조가 잘랐습니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였다. “비록 여러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지위와 명망으로 보아 마땅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생각한 재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 마침내 서지수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6월 23일
“내가 생각한 재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며 영조가 먼저 서지수를 선택했습니다.
7월 11일, 정승들이 모인 자리
보름 남짓 뒤인 7월 11일, 영조는 삼공과 육경(六卿, 육조의 판서)을 불렀습니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이를 기념하는 과거 시험을 치를지 의논하는 자리였습니다.
말풀이
경과(慶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기념으로 따로 치르는 과거 시험입니다. 규모가 큰 증광시(增廣試)와 비교적 간단한 정시(庭試) 등이 있습니다.
요행(僥倖) · 실력이나 공이 아니라 운이나 연줄로 얻는 이익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궁중에서 특별히 내리는 혜택과, 높은 벼슬아치의 아들을 시험 없이 벼슬시키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날 서지수는 여러 번 입을 열었습니다. 졸기가 말한 “여러 차례의 바른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주는 드문 기록입니다. 그가 한 말을 차례로 추리면 네 가지입니다.
첫째, 과거는 치르되 뽑는 인원을 줄이자고 했습니다. 임금이 모든 일에 절약하려는 뜻을 보였으니 과거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송나라의 개혁가 범중엄(范仲淹)이 가장 먼저 꼽은 과제가 요행을 막는 것이었다며, 지금도 그런 폐단이 있어 사람들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영조는 “경의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임금을 직접 겨눈 말이었습니다.
신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 ‘궁인이 결원이 생기면 수본을 해당 관청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특별히 중관들에게 하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 뒤 몇 달 동안은 중관이 몇 사람의 명단을 수본으로 올렸지만, 그 뒤부터는 다시 수본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해이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됩니다.
궁궐에서 일하는 궁인의 빈자리를 관청에 알리라고 임금이 명해 놓고, 몇 달 뒤부터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궁인의 수는 나라 살림과 곧바로 이어지는 일이므로, 전에 나라 살림을 맡는 호조판서였던 사람이 할 만한 말입니다. 영조는 “이것은 경이 오늘 아뢸 일이 아니다”라고 막았습니다.
넷째, 서지수는 물러서지 않고 한나라 문제(文帝)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문제는 정치의 성과로는 선제(宣帝)만 못했지만 신하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을 어떻게 등용할지 의견을 낸 뒤, 영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상이 아뢴 말 가운데 ‘이번 정시는 예전과 어찌 같겠느냐’고 한 것은 매우 살피지 못한 말이다.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말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의정 서지수를 파직하라.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7월 11일
홍봉한과 좌의정 윤동도(尹東度)가 말렸습니다. 영조는 “나 역시 그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은 안다”고 답하고도 명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까닭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경사를 기념하는 과거라면 널리 뽑아야 하는데 인원을 줄이자는 말은 “지극히 괴이하다”는 것입니다.
말풀이
수본(手本) 사안에 대해 알리거나 명단을 작성해 올리는 간단한 보고서입니다.
파직(罷職) 맡은 벼슬에서 내쫓는 것입니다.
체직(遞職)·체차(遞差) 벼슬을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우는 것입니다. 벌일 때도 있고 단순한 교체일 때도 있습니다.
삭직(削職) 벼슬뿐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은 벼슬의 등급까지 깎아 없애는 것입니다. 파직보다 무거운 벌입니다.
이 기사에서 한 가지를 밝혀 둡니다. 영조가 문제 삼은 “이번 정시는 예전과 어찌 같겠느냐”는 글은 실록에 적힌 서지수의 말 가운데 그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실록에 남은 것은 “인원을 줄이면 이 역시 절약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실록은 대화를 빠짐없이 옮겨 적지 않으므로, 기록되지 않은 말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기록 안에서는, 서지수는 과거에 반대하지 않았고 절약을 말했을 뿐입니다.
영조는 그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파직했습니다. 벌을 받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VI. 부르고, 쫓고, 다시 부르다
서지수는 1766년 겨울과 1768년 여름에 두 번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두 번 모두 영조가 다른 정승들을 한꺼번에 내쫓은 날이었고, 두 번 모두 영조가 다시 그를 내쫓으며 끝났습니다. 영조는 같은 사람을 부르고 쫓기를 되풀이했습니다.
1766년 12월 9일, 정승이 한꺼번에 바뀐 날
파직되고 5달 뒤, 서지수는 판부사로 있었습니다. 이날 대신들이 임금에게 존호(尊號, 임금의 덕을 기려 올리는 칭호)를 올리겠다고 청했습니다. 영조는 그만두라며 궁을 나가 창의궁(彰義宮)으로 향했습니다. 창의궁은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입니다.
그 길에 영조는 승지와 삼사(三司), 그리고 삼공을 모두 파직했습니다. 창의궁에 닿아서는 세 정승의 벼슬을 삭탈하고, 그 자리에서 삼정승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판부사 서지수를 영의정에, 판돈녕 한익모를 좌의정에, 평안감사 김상철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또 영의정에게 내국 도제조를 겸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12월 9일
5달 전에 “말이 한심하다”며 내쫓은 사람을, 이번에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1767년 3월 14일, 영의정의 마지막 청
이 영의정 자리는 3달 남짓 이어졌습니다. 영조 43년(1767) 3월 14일, 영조는 유배된 죄인들의 명단을 읽게 하고 몇 사람을 풀어 주거나 형을 덜어 주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서지수는 세 가지를 아뢰었습니다.
말풀이
도류안(徒流案) 도형(徒刑, 일정 기간 노역하는 벌)과 유형(流刑, 유배)을 받은 죄인의 명단입니다. 임금이 이 명단을 읽게 하고 억울한 사람을 가려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대훈(大訓) 영조가 경종 때의 대리청정과 그에 얽힌 옥사를 두고 자신의 판정을 적어 널리 반포한 글입니다.
설(雪) 눈을 뜻하는 글자이지만, 여기서는 억울한 죄명을 씻어 준다는 뜻입니다. 신원(伸冤)이라고도 합니다.
첫째는 윤광천(尹光天)의 일이었습니다.
영의정 서지수가 윤광천이 《대훈》과 관련된 일로 일찍이 죄를 받아 유배되었던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형조판서 남태제가 말하였다. “윤광천은 나이가 여든이 넘었으며, 당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임금은 남태제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자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선 일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죄인을 풀어 주는 날에 서지수는 《대훈》 때문에 처벌받았던 사람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대훈》은 I절과 III절에서 말한 영조의 오랜 상처, 곧 경종 때의 대리청정을 두고 영조가 스스로 내린 판정입니다.
여기서 실록이 쓴 동사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실록은 서지수가 윤광천의 일을 “아뢰었다(仰奏)”고만 적었습니다. 풀어 달라고 했는지,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했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뒤의 윤구연 대목에는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하였다(請雪)”는 청의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청의 내용을 적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지 않았으므로, 윤광천 대목은 “그 일을 꺼내 아뢰었다”는 데까지만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윤광천이 이미 풀려났다고 설명한 형조판서 남태제는 제 직분을 넘어 아뢰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파직되었습니다.
둘째는 윤구연(尹九淵)이었습니다. 서지수는 윤구연의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했고, 영조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청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면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영조 38년(1762) 9월 5일, 대사헌 남태회(南泰會)가 남병사 윤구연을 파직하라고 청했습니다. 금주령을 무시하고 술을 빚어 날마다 취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조의 대답은 청보다 훨씬 무거웠습니다.
과연 들은 바와 같다면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 어찌 파직하는 데 그칠 수 있겠는가?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9월 5일
탄핵의 근거는 “소문”이었습니다. 영조는 선전관 조성(趙峸)을 급히 보내 술을 빚은 확실한 증거물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12일 뒤인 9월 17일, 조성이 돌아왔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성이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를 가져와 임금 앞에 바쳤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직접 남문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형에 처하였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차자를 올려 윤구연을 구명하려 하였으나, 임금은 비답을 내리지 않고 세 사람의 정승 직책까지 모두 파면하였다.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9월 17일
찾아오라고 한 것은 “확실한 증거물(眞贓)”이었고, 돌아온 것은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였습니다. 영조는 그날 직접 숭례문에 나가 윤구연의 목을 베게 했습니다. 그를 살리려던 세 정승은 모두 파면되었습니다.
이 세 정승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둘 만합니다. 홍봉한과 윤동도는 V절에서 1766년 서지수가 파직될 때 “그 마음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며 말리던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윤구연을 구하려다 정승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4년 뒤에는 서지수를 감싸다가 다시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1767년 서지수의 청은 막연한 신원 요청이 아닙니다. 임금이 4년 전에 직접 내린 사형이 억울했다고 영의정이 임금 앞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 사형을 말린 정승들이 모두 파면되었던 일을 알면서 한 말입니다. 영조는 따르지 않았고, 사흘 뒤 이 말은 삭직의 까닭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뒤가 있습니다. 서지수가 죽고 다섯 해 남짓 지난 영조 50년(1774) 1월 27일, 영조는 윤구연에게 직첩을 돌려주라고 명했습니다.
윤구연은 금주령이 시행되던 때 술항아리가 선전관에게 적발되어 남문 밖에서 참수된 뒤 그 머리가 내걸렸다. 그러나 그 일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두 사람에게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이 내려졌다.
『영조실록』 122권, 영조 50년(1774) 1월 27일
문제가 된 술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에 빚은 것이었다고 실록이 스스로 적었습니다. 서지수가 청했다가 삭직된 일을, 7년 뒤 같은 임금이 거두었습니다. 서지수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이 관련된 절차상의 잘못이었습니다. 비상시에 군사를 움직이는 증표인 밀부를 주고받는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서지수가 또 말하였다. “며칠 전 밀부(密符)에 관한 일을 아뢴 적이 있습니다. 밀갑(密匣)이 이미 내려왔기에 신이 과연 서명하여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비치된 장부를 살펴보니 애초에 장부에 기록해 둔 일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마침 신이 다시 외람되이 직임을 맡게 되었고, 당시의 승지도 승정원에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기록을 정리하여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전례가 된다면 온당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승지는 파직을 청하고, 이런 경우에는 사관에게 장부를 가지고 가서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4일
이 세 가지는 서지수가 어떤 신하였는지 한자리에서 보여 줍니다. 임금이 직접 내린 처형이 억울했다고 말했고, 자기가 서명한 장부의 빈칸까지 스스로 들추어냈습니다. 졸기의 “충성스럽고 신중하다”는 말과, 영조의 “임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 같은 행동을 두고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말풀이
금주령(禁酒令) 술을 빚거나 마시지 못하게 하는 명령입니다. 곡식을 아끼기 위해 내리는 경우가 많았고, 영조는 이를 특히 엄하게 지켰습니다.
남병사(南兵使) 함경도 남쪽 지역의 군대를 맡은 장수입니다. 병사(兵使)는 병마절도사를 줄인 말입니다.
일률(一律) 가장 무거운 형벌, 곧 사형에 해당하는 법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직첩(職牒) 벼슬을 내린다는 임명장입니다. 죄를 지으면 빼앗았고, 죄가 풀리면 돌려주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직첩을 돌려주는 것은 그 죄를 거두어들인다는 뜻입니다.
밀부(密符) 지방에서 군사를 맡은 관원이 비상시에 군사를 움직일 때 쓰던 비밀 증표입니다.
1767년 3월 17일, 근정전 옛터에서
사흘 뒤, 서지수는 영의정에서 파직되고 이어 삭직되었습니다.
이날 영조는 육상궁(毓祥宮)에 가는 길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의 옛터에 들러 한동안 엎드려 있었습니다. 육상궁은 영조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이고,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이때까지 빈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전·현직 대신들과 홍문관 관원들이 뒤따라와 몹시 애타는 마음을 아뢰었습니다. 영조는 따라오지 않은 삼사 관원들을 모두 명부에서 지우게 하고, 몇 사람을 유배 보낸 뒤 이렇게 전교했습니다.
오늘 근정전에서 있었던 일을 보면 조선에 대신이 없다고 할 만하다. 그때 입시했던 대신들은 모두 파직하라.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7일
이 기사에는 파직된 대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뒤의 기사가 서지수를 “전 영의정”이라고 부릅니다. 사흘 전까지 영의정이었으므로, 서지수는 이 “모두 파직하라” 안에 들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뒤의 기사에서 처분 수위가 한 겹 더해졌습니다.
전 영의정 서지수와 전 형조판서 남태제는 모두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서지수는 윤광천과 윤구연의 일을 들어 임금에게 아뢰었기 때문이고, 남태제는 윤광천의 일을 변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7일
사흘 전에 “따르지 않았다”로 끝났던 일이, 사흘 뒤에 삭직의 까닭으로 돌아왔습니다. 실록은 여기서도 윤광천과 윤구연의 일을 “들어 아뢰었다(提奏)”고 적었습니다. 하루에 파직과 삭직이 겹친 셈입니다.
1767년 5월, “온 세상도 알고 있으니”
두 달 뒤, 정언(正言) 이종영(李宗榮)이 긴 상소를 올렸습니다. 가뭄이 극심한데 임금의 처분이 “오로지 격앙되고 성내는 데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는 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서지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또 전 영의정이 윤구연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하여 견책당하고 삭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대신이 한결같이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성명께서 이미 인정하셨고 온 세상도 알고 있으니, 산처럼 우러러보는 명망이 높습니다. 나라를 위해 붉은 마음을 다하는 재상이 결코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자는 논의를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그 본뜻을 헤아려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원보를 물리치는 일을 이처럼 쉽게 하실 수 있습니까?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5월 2일
말풀이
정언(正言) 사간원의 관리로,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것이 맡은 일입니다.
산두(山斗) 태산(泰山)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줄인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원보(元輔) 임금을 돕는 으뜸 신하, 곧 영의정입니다.
“단단무타(斷斷無他), 즉 한결같이 다른 마음이 없다”는 말을 눈여겨볼 만합니다. 한 해 전 1766년 7월, 서지수를 우의정에서 파직하면서 영조가 스스로 한 말, 기심단단무타(其心斷斷無他)과 같은 글자입니다. 이종영은 임금이 이미 인정한 말을 그대로 돌려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서지수의 됨됨이를 “일세역지지(一世亦知之), 즉 온 세상 사람들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지수가 살아 있을 때, 조정의 관원이 임금 앞에서 남긴 증언입니다.
영조는 이 상소에 “근본을 따져 보면 조급함 때문이었다”며 “늘그막의 좋은 약”이라고 답했습니다. 여섯 해 전 서지수가 경연에서 “때때로 지나친 경우가 있다”고 했던 바로 그 점을, 임금이 이번에는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다만 긴 비답 어디에도 서지수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1768년 6월 8일, 하루 사이의 인사
영조 44년(1768) 6월 8일은 영조의 분노가 하루 종일 이어진 날이었습니다. 그날 하루에 벌어진 일을 순서대로 적으면 이렇습니다.
1. 호위 장교들이 바로 대령하지 않았다며 병조판서 조운규(趙雲逵)를 잡아들이고 해임했습니다. 2.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시각을 너무 일찍 알렸다며, 관상감 제조를 겸한 조운규를 다시 잡아들이게 했습니다. 3. 이 일로 임금을 뵙기를 청한 교리 이득신(李得臣) 등을 모두 해임하고 의금부에 넘겼습니다. 4.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그들이 청한 것은 체통에 맞는 일이었다고 하자, 김치인을 영의정에서 면직했습니다. 5. 도승지 송영중(宋瑩中)이 김치인을 변명하자 그도 갈아 치웠습니다. 6. 그리고 서지수를 영의정에, 김양택(金陽澤)을 좌의정에 임명했습니다.
삭직된 지 1년 3개월 만에, 서지수는 이렇게 두 번째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또 한 번, 앞사람들이 한꺼번에 쫓겨난 자리였습니다.
1768년 6월 14일, 엿새
엿새 뒤 서지수는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영조의 답은 이랬습니다.
이미 하교하였는데도 이처럼 상소를 올린단 말인가? 영의정 서지수를 중도에 부처하라.
영조는 이어서 한 번 더 전교를 내렸습니다.
서지수가 비록 한심하기는 하지만, 내국의 일을 맡고 있으면서 이처럼 하는 것이 또한 옳겠는가? 아! 그의 임금이 건공탕을 마시지 않은 지가 며칠이나 되었는데,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 이제야말로 신하가 없는 날이라고 할 만하다.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1768) 6월 14일
말풀이
중도부처(中道付處) 유배지(목적지)로 가는 도중, 또는 정해진 유배지의 중간 지점 정도 되는 적당한 고을을 지정하여 머물게(부처) 하는 조치입니다.
내국(內局) 임금의 약을 짓고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입니다. 약방(藥房)이라고도 합니다. 도제조(都提擧)는 그 책임자로, 대개 영의정이 겸했습니다.
건공탕(建功湯) 이 무렵 영조가 먹던 탕약입니다.
영조는 이때 궁 밖에 나가 있었고, 약도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신들이 줄지어 궁으로 돌아오라고 청하던 때입니다. 영조가 보기에 약을 챙겨야 할 내국의 책임자가 사직하겠다고 나선 것은 임금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신하가 없는 날”. 1년 3개월 전 근정전 옛터에서 영조는 “조선에 대신이 없다”고 하며 서지수를 파직했습니다. 이번에도 거의 같은 말을 하며 그를 내보냈습니다.
같은 날 영조는 엿새 전에 면직한 김치인을 다시 영의정에 앉혔습니다. 엿새 사이에 영의정이 김치인에서 서지수로, 서지수에서 다시 김치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넉 달, 그리고 두 달 뒤
서지수가 정승 자리에 있었던 기간을 이번에 읽은 기사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의정은 20일이 채 안 되었고, 첫 번째 영의정은 3달 남짓, 두 번째 영의정은 6일이었습니다. 모두 합쳐도 4달 안팎입니다.
서지수의 정승 재임과 처벌, 1766년 6월~1768년 8월. 날짜는 실록의 음력 날짜이고 막대의 위치는 대략입니다. 1752년 울산 유배와 1761년 충주 부처는 이 그림 바깥에 있습니다.
중도부처를 당하고나서 한 달 반 남짓 뒤인 8월 1일, 서지수는 판중추부사로서 죽었습니다. 그 사이 언제 풀려나 판중추부사가 되었는지는 이번에 읽은 기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졸기의 “도성 백성이 저자를 닫았다”는 장면은 이 죽음에 붙은 것입니다.
VII. 백성은 무엇을 보았나
서지수의 벼슬살이를 모두 따라왔으니,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 일이 없다는 정승을 위해 도성 사람들은 왜 저자를 닫았을까요.
확인한 사실
먼저 서지수가 나오는 기사 16건을 정리하겠습니다.
| 날짜 | 그때 벼슬 | 영조의 처분 | 까닭으로 적힌 것 |
|---|---|---|---|
| 1752. 12. 8 | 대사간 | 체직, 울산 유배 | 선위를 말리며 한 말 |
| 1761. 9. 8~9 | 이조판서 | 파직, 충주 부처, 이튿날 대정현 위리안치 | 역모가 아닌 일에 친국은 지나치다는 말 |
| 1766. 6. 23 | (기사에 없음) | 우의정 임명 | “내가 생각한 재상” |
| 1766. 7. 11 | 우의정 | 파직 | 과거 인원을 줄이자는 말 |
| 1766. 12. 9 | 판부사 | 영의정 임명 | 삼공을 한꺼번에 내쫓은 날 |
| 1767. 3. 17 | 영의정 | 파직(추정), 삭직 | 근정전 입시, 윤광천·윤구연의 일을 아뢴 말 |
| 1768. 6. 8 | (기사에 없음) | 영의정 임명 | 영의정을 면직한 날 |
| 1768. 6. 14 | 영의정 | 중도부처 | 사직 상소 |
정승 임명은 3번, 유배나 파직을 당당한 사건은 5번입니다. 5번 가운데 4번은 그가 한 말이 까닭으로 적혀 있고, 한 번은 사직하겠다는 글이 까닭입니다. 그리고 졸기 75자에는 이 5번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을 더 살펴 보면
위 사실에 기록 세 가지를 더 놓아 보겠습니다. 모두 실록에 적힌 문장입니다.
첫째, 서지수의 바른말은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선위 소동을 말리는 말, 역모가 아닌 일에 임금이 직접 국문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말, 과거 인원을 줄여 절약하고 궁중의 특혜와 벼슬아치 자제의 특채를 막자는 말, 처형이 억울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것도 서지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임금의 처분이 지나치거나 특혜가 새는 곳을 짚은 말이었습니다.
둘째, 서지수의 명망은 그를 벌한 임금이 먼저 인정했습니다. 1761년 영조는 “벼슬이 총재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평가 또한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며, 뒷사람들이 서지수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걱정했습니다. 이튿날에는 신하들이 서지수를 감싸는 것을 나무라야 했습니다. 1767년에는 정언 이종영이 그의 됨됨이를 “온 세상도 알고 있으며” 산처럼 우러러보는 명망이 있다고 임금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가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죽은 뒤 사관의 칭찬만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그를 벌한 임금과 동료 관원의 말로도 남아 있습니다.
셋째는 윤구연의 일입니다. 서지수를 삭직한 까닭이었던 이 일은 서지수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윤구연이 죽고부터 직첩을 돌려받기까지 12년 동안, 실록은 이 일을 여러 번 다시 적었습니다.
윤구연을 둘러싼 12년
| 날짜 | 기록 |
|---|---|
| 1762. 9. 17 | 윤구연, 숭례문에서 참수되고 머리가 문밖에 내걸림. 구명한 세 정승 파면 |
| 1764. 9. 11 | 정언 박상로, 금주령의 폐단 10가지를 상소하며 “윤구연의 일은 금주령 전의 일이니 용서할 수 있다”고 청함. 관적에서 이름이 삭제됨 |
| 1767. 3. 14~17 | 영의정 서지수, 윤구연의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함. 파직과 삭직 |
| 1767. 5. 2 | 정언 이종영, 서지수가 이 일로 삭직된 것을 두고 임금에게 따짐 |
| 1768. 8. 1 | 서지수 죽음. 도성 백성이 저자를 닫고 조문 |
| 1768. 9. 29 | 이 무렵 금주령은 이미 풀려 있었음. 영조, 지평 권극의 앞뒤 다른 말을 꾸짖음 |
| 1769. 4. 21 | 권극, 흑산도로 유배 가던 길에 죽음 |
| 1774. 1. 27 | 윤구연에게 직첩을 돌려줌 |
이 흐름 속에서 사관은 3번, 조정 밖 사람들의 반응을 따로 적었습니다. 여기에 조정 안에서 나온 증언이 하나 더 있습니다.
1764년 박상로의 상소에 대해서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칭찬하였다”고 적었습니다. 1767년에는 정언 이종영이 서지수의 됨됨이를 “온 세상도 알고 있다”고 임금 앞에서 말했습니다. 1769년 권극이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윤구연이 죽은 뒤 세상 사람들은 권극을 화근으로 지목했다. 이때 권극이 형벌을 받고 죽으니, 비록 그 죄가 죽을죄는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겨 하늘의 도는 되돌아온다고 했다.
『영조실록』 112권, 영조 45년(1769) 4월 21일
권극은 윤구연이 술을 마신다며 그를 죽이라고 청했던 관리입니다. 그리고 1774년, 실록은 윤구연의 죽음을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겼다”고 적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윤구연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고, 그 억울함을 말한 사람을 칭찬했으며, 그를 죽이라고 한 사람의 죽음을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서지수가 죽고 도성 사람들이 저자를 닫은 1768년 8월은 이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금주령 자체도 도성 사람들의 일상에 닿아 있었습니다. 박상로가 꼽은 10가지 폐단 가운데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사는 이웃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이 셋째입니다. 포도청이 금주 단속을 주관하게 한 것이 넷째입니다. 관에서 보낸 관리와 하인들이 단속을 빌미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9월 11일
포도청은 도성의 치안을 맡은 관청입니다. 이웃이 술을 빚으면 옆집까지 벌을 받고, 단속을 나온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은 도성 골목과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것입니다. 서지수가 죽은 8월에 금주령이 아직 시행 중이었는지는 이 기사들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풀이입니다
여기까지는 기록입니다. 이것들을 이어 “그래서 백성이 저자를 닫았다”고 말하는 것은 풀이입니다. 도성 상인들이 서지수의 경연 발언이나 삭직 사유를 어떻게, 얼마나 알았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그래도 기록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서지수는 가난한 선비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지나치다고 말했고, 그때마다 쫓겨났습니다. 쫓겨날 때마다 그가 무엇을 말하다 쫓겨났는지 조정 밖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12년 동안 억울하게 여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금주령 아래에서 이웃의 술독 때문에 벌을 받을 수 있었던 도성 사람들에게, 빈 술항아리 하나로 목이 베인 장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억울함을 영의정 자리에서 말하다 쫓겨난 사람이 서지수였습니다.
사관의 글글을 다시 읽어 보면 이 풀이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바른말을 올렸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조정 안팎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바른말 다음에 백성의 기쁨이 옵니다. 그리고 “비록 크게 시행한 일은 없었지만, 신뢰는 끝내 줄어들지 않았다.” 백성이 기대한 것은 그가 무엇을 해 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임금 앞에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자리에 있다는 것,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짐작입니다.
졸기에서 지워진 것
그렇다면 졸기에서 빠진 다섯 번의 처벌은 그저 줄여 쓴 결과가 아닙니다. 75자 안에 다 담기 어려웠다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빠진 자리가 하필 이 사람이 신뢰받은 까닭과 겹칩니다.
사관은 바른말을 적었고, 백성의 기쁨과 저자의 문이 닫힌 일도 적었습니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것, 곧 바른말의 값으로 치른 유배와 파직과 삭직은 적지 않았습니다. 영조실록은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조 때 편찬되었습니다. 그래도 사관은 임금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이 졸기에서 지워진 것은 서지수의 허물이 아니라 임금의 처분입니다. 그리고 그 처분이야말로 도성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은 까닭에 가장 가까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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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약력은 대개 맡았던 자리와 이룬 일을 나열한 목록입니다. 사람들이 한 인물을 기억하는 까닭은 목록에 오른 벼슬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밀려났는지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도성 사람들은 서지수의 벼슬 목록은 몰랐겠지만, 그가 왜 번번이 쫓겨났는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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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차 사료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 12월 8일 — 대소 공무를 동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명이 있어 이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2812008_001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5일 — 한산 유학 이정을 친국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05_003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8일 — 주강에서 《중용》을 강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08_002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8일 — 서지수를 중도 부처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08_003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9일 — 이정을 친국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09_001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10일 — 서지수·황경원 등의 압송을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10_004
- 『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1761) 9월 11일 — 진전 전배로 인하여 이정 등의 추국을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709011_002
-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6월 23일 — 호조 판서 심수 등의 체차를 허락하고 좌의정 김상복의 사임을 허락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206023_002
-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7월 11일 — 과거의 설행에 대해 영의정·우의정 등과 의논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207011_001
-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1766) 12월 9일 — 승지·삼사 등을 파직하고 서지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212009_001
-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4일 — 도류안을 읽으라 하여 유무를 석방하게 하고 김주태는 감등하라고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303014_001
-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7일 — 근정전 구기에서 오래 부복하였는데 그때 입시한 대신을 모두 파직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303017_001
-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3월 17일 — 윤사국을 해남현으로 정배하게 하고 전 영상 서지수 등을 삭직하라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303017_005
-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9월 5일 — 대사헌 남태회가 남병사 윤구연의 파직을 청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809005_004
-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9월 17일 — 남병사 윤구연을 참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809017_001
-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1764) 9월 11일 — 금주령에 대한 폐단 등을 논한 정언 박상로의 상소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009011_001
-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5월 2일 — 정언 이종영이 심익운·이명오·이장오의 불법 행위 등에 대해 상소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305002_002
-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1768) 9월 29일 — 지평 권극이 주금령·설강령의 시행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9029_004
- 『영조실록』 112권, 영조 45년(1769) 4월 21일 — 잡아들인 시종 중에 권극에게 형벌을 가하고 흑산도에 찬배하니 도중에 죽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504021_002
- 『영조실록』 122권, 영조 50년(1774) 1월 27일 — 윤광신·윤구연에게 직첩을 지급하도록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5001027_001
-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1768) 6월 8일 — 신시를 일찍 알린 관상감 제조를 잡아들이고 구대한 자들도 체차시키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6008_001
-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1768) 6월 14일 — 영의정 서지수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중도 부처를 명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6014_001
- 『영조실록』 111권, 영조 44년(1768) 8월 1일 — 판중추부사 서지수의 졸기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4408001_001
- 이 글에 옮긴 실록 번역은 AI를 이용해 번역하고, 번역한 결과를 감수한 것입니다.
2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지수(徐志修)」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서지수」
- 우리역사넷, 「사도세자」
- 주영아, 박태보의 기사환국 관련 논문, 『동방학』(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헤아린 값에 대하여
- 졸기 글자 수 75자는 한문 원문에서 문장부호와 빈칸을 빼고 한자만 헤아렸습니다.
- 정승 임명 3번과 처벌 5번은 위에 적은 기사 가운데 서지수가 나오는 16건 안에서 헤아린 값입니다. 1761년 9월 8일의 파직과 충주 부처, 이튿날의 대정현 위리안치는 한 사건으로 쳤습니다. 서지수의 벼슬살이 전체를 살펴본 것이 아니므로, 다른 기사에서 더 나올 수 있습니다.
- 1767년 3월 17일의 파직은 기사에 이름이 나오지 않아, 같은 날 “전 영의정”이라는 호칭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 재임 기간은 실록의 날짜로 헤아린 대략의 값입니다.
연재의 다른 편은 연재 목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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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14편. 다음은 기대승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