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3 · 이황 — 39자, 그리고 1년 어긋난 자리

이황 졸기 글자 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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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1편에서 필자는 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선조실록』에 실린 졸기와, 뒷날 다시 쓴 『선조수정실록』의 졸기를 인물별로 나란히 놓고 분량이 얼마나 늘고 줄었는지 비교한 표입니다. 그 표에서 한 사람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이황(李滉)입니다.

이황은 남인 계열 학자들이 스승으로 받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인과 맞섰던 서인이 다시 쓴 실록에서 이황의 졸기는 13.5배로 늘어났습니다. 필자는 “예외”라 하고 넘어갔습니다.

이번에 그 13.5배의 기준이 된 원본을 직접 읽어봤습니다. 배율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읽어보니 다른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글에는 옛 벼슬 이름과 기록 용어가 여럿 나옵니다. 낯선 말은 글 끝의 「말풀이 사전」에 모아 두었으니 그때그때 내려가 보셔도 좋습니다. 연재 전체 목차는 조선왕조실록 다시 보기에 있습니다.

I. 이 사람

  •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 죽을 때 벼슬: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자는 어른이 되면서 받는 또 하나의 이름이고, 호는 흔히 스스로 짓거나 남이 붙여주는 이름입니다. 퇴계는 물러날 퇴(退)와 시내 계(溪), 두 글자를 쓴 호입니다.

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으뜸 벼슬입니다. 중추부는 맡은 실무가 뚜렷하지 않은 관청이어서 이 자리는 명예직에 가깝습니다. 이황은 말년에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고, 죽을 때도 서울이 아니라 고향에 있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습니다.

II. 39자가 전부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이황의 죽음을 적은 글은 39자가 전부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적습니다.

○辛丑/右贊成李滉卒, 字景浩, 七十。 贈領議政, 諡文純, 學者稱退溪先生。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
— 『선조실록』 선조 2년(1569) 12월 · 3권 43장 B면

맨 앞의 ○는 새 기사가 시작된다는 표시입니다. 신축(辛丑)은 그날에 붙은 날짜 이름이고, 그 뒤의 빗금은 날짜와 본문을 나누는 기호입니다.

그리고 둘째 줄, 대괄호 안의 열세 글자가 이 편의 첫 단서입니다. 선종소경대왕실록 권3 마침. 이 졸기 바로 뒤가 권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신축일. 우찬성 이황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이며, 일흔 살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순이며, 학자들은 퇴계 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

구두점을 빼면 한자 39자입니다. 무엇으로 이루어진 39자인지 덩어리로 나눠 헤아려 봤습니다.

졸기 39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날짜辛丑2자누가 죽었나右贊成李滉卒6자자와 나이字景浩, 七十5자추증과 시호贈領議政, 諡文純7자세상의 호칭學者稱退溪先生7자학문은 어디에 있나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12자 · 31%가장 긴 대목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평가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문장이다.

가장 많은 글자가 쓰인 곳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 적혀 있나입니다. 12자, 전체의 31%입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이황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입니다. 죽은 뒤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함께 모셔지고, 그를 기리는 서원이 전국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나라의 정식 기록에서 39자를 받았습니다.

III. 이상한 점 다섯 가지

짧은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이 39자가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 함께 보면, 짧은 것보다 더 이상한 점이 나옵니다.

첫째, 권의 맨 끝입니다. 앞서 원문에서 본 대로입니다. 이 기사는 3권 43장 B면에 있고, 43장이 이 권의 마지막 장입니다. 졸기 뒤로는 기사가 더 없습니다. 권을 닫기 직전,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 해가 1년 어긋나 있습니다. 이 졸기는 선조 2년(1569) 12월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죽은 것은 선조 3년(1570) 12월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도 이 기사의 날짜를 ‘미상’으로 처리해두었습니다.

셋째, 그런데 날짜 자체는 맞습니다. 조선에서는 날짜에 숫자 대신 예순 개의 이름을 돌려가며 붙였습니다. 갑자, 을축, 병인 같은 식입니다. 이것을 간지(干支)라 하고, 그날에 붙은 이름을 일진이라고 합니다.

원문 첫머리의 신축(辛丑)이 바로 그날의 일진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이 선조 3년 12월 초하루를 갑오(甲午)라고 적었으니, 갑오에서 차례로 헤아려 나가면 신축은 그달 8일이 됩니다.

이 계산은 검증이 됩니다. 뒤에 나올 추증 기사가 같은 달 19일이고 일진이 임자(壬子)라 적혀 있는데, 초하루를 갑오로 놓고 헤아리면 임자일이 정확히 19일입니다. 두 판본의 날짜 이름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니 졸기의 신축일은 선조 3년 12월 8일이고, 이는 이황이 죽은 날로 알려진 날과 같습니다.

날짜는 정확한데 해가 틀렸습니다.

넷째, 시호가 이미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분명한 흔적입니다. 시호는 죽은 뒤에 나라가 공적을 따져 내려주는 이름입니다. 졸기 본문에는 시문순(諡文純) 세 글자가 있습니다. 시호가 문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같은 『선조실록』을 따라가 보면, 이황이 죽고 3년이 지난 1573년 11월까지도 사헌부를 비롯한 양사(兩司)가 이황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거듭 청하고 있습니다. 시호는 그 뒤에야 정해졌습니다.

죽은 자리에 놓인 글이 3년 뒤의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이 39자는 죽음을 지켜본 사관이 그날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한참 뒤에 누군가가 쓴 문장입니다.

다섯째, 벼슬 이름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우찬성(右贊成)이라 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숭정대부 판중추부사라 했습니다. 우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벼슬입니다.

IV. 열하루와 1년

같은 『선조실록』 안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선조 3년 12월 19일자이고, 이것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壬子 / 都目政。 上特贈李滉領議政。 蓋追褒鉅儒名賢也。 임자일.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임금이 특별히 이황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이는 무릇 당대의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추모하여 높이 기린 것이었다.
— 『선조실록』 선조 3년(1570) 12월 19일 · 4권 23장 A면

도목정은 관원을 한꺼번에 심사해 자리를 정하던 정기 인사입니다. 그날의 인사 기록 끝에 이 세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둘째 문장 상특증이황영의정(上特贈李滉領議政)은 임금이 특별히 이황에게 영의정을 추증했다는 뜻입니다. 상(上)은 임금을 가리키고, 특(特)은 관례를 따른 것이 아니라 임금이 따로 내렸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의 벼슬을 올려주는 일이 그날 인사의 한 항목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셋째 문장 개추포거유명현야(蓋追褒鉅儒名賢也)는 사관이 그 일에 붙인 한 줄입니다.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뒤늦게 기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날이 12월 8일, 추증이 12월 19일입니다. 그 사이가 열하루입니다. 조정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기록과 이 추증의 기록이 실록에서는 이렇게 놓여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선조실록』에서 기록한 자리실제로 일어난 일사망과 추증1570년 12월 8일에 죽고, 열하루 뒤인 19일에 추증되었다실록에 놓인 자리졸기추증 기사1년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선조 2년(1569) 12월조 · 권3 맨 끝선조 3년(1570) 12월 19일 · 권4열하루 사이의 일이 실록에서는 권을 넘어 1년 넘게 벌어져 있다

권도 다르고 책도 다릅니다. 졸기는 2책 3권에 있고, 추증은 3책 4권에 있습니다. 그래서 추증 기사만 읽으면 무엇에 대한 추증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한 해 앞 권의 맨 끝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V. 왜 이렇게 됐을까

여기서부터는 확인되는 사실을 놓고 잇는 해석입니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사초를 잃었습니다. 사초는 사관이 그날그날 적어둔 기록이고, 실록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전쟁이 나자 사관 몇이 사초를 불태우고 달아났고, 선조 즉위년부터 왜란 직전까지 25년치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가 이 불균형입니다.

『선조실록』 221권은 어디에 몰려 있나임진왜란 이전즉위년~25년 3월 · 약 25년분26권임진왜란 이후25년 4월~승하 · 약 16년분195권다룬 기간은 앞쪽이 더 긴데 분량은 뒤쪽이 7.5배다. 왜란 이전의 사초가 사라진 결과다.

25년치가 26권, 16년치가 195권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열람 목록을 보면, 이황이 죽은 선조 3년에는 열두 달 가운데 다섯 달(4·5·7·8·12월)의 기사만 남아 있습니다.

실록을 엮는 관청인 실록청이 꾸려진 것은 1609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39년 뒤입니다. 편찬자들 앞에 그날의 사초는 없었습니다. 이황이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고, 신축일이라는 날짜도 어디선가 얻었고, 나중에 내려진 시호도 알고 있었지만, 그 신축일이 어느 해 12월인지는 확정하지 못한 채 39자를 적어 권 끝에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초를 잃었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고, 1년의 어긋남은 필자가 헤아린 값입니다. 다만 “확정하지 못한 채 권 끝에 붙였다”는 것은 필자의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그 자리에 기록했는지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VI. 사관이 가리킨 곳

39자 가운데 가장 긴 대목은 인물평이 아니라 다른 책을 가리키는 문장입니다. 그 마지막 대목으로 돌아옵니다.

其學問事業, 載在文集, 行于世(기학문사업, 재재문집, 행우세)

옮기면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입니다. 앞에서 헤아린 12자이고, 39자 가운데 가장 긴 덩어리이며, 전체의 31%입니다.

졸기는 인물평을 적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사관이 한 줄로 판정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판정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을 가리킵니다. 내가 여기 적지 않아도 그의 학문은 문집에 있고, 그 문집은 이미 세상에 전한다는 말입니다.

세 편이 쌓이니 결이 보입니다.

  • 이이: 청렴을 말할 자리에서 청백(淸白)이라는 칭찬어를 쓰지 않고, 빈 곳간을 보여줬습니다.
  • 황희: 부정을 말할 자리에서 보궤(簠簋)라는 제사 그릇을 빌려 에둘렀습니다.
  • 이황: 인물평을 쓸 자리에서 문집을 가리켰습니다.

앞의 둘은 쓸 말을 고르지 않은 것이고, 이황의 경우는 쓰기를 넘긴 것입니다.

다만 평가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본 추증 기사의 끝 문장이 그것입니다.

蓋追褒鉅儒名賢也(개추포거유명현야)

옮기면 “이는 무릇 큰 선비이자 이름난 현인을 뒤늦게 기린 것이다”입니다. 다만 이 문장을 인물평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개~야(蓋~也, 이는 ~이다)는 사관이 사태를 요약하거나 총평을 붙일 때 쓰는 상투적인 틀이고, 추포(追褒, 나중에 공로를 기리다) 역시 추증 기사에 으레 따라붙는 말입니다. 뼈대는 정해진 형식입니다.

사관이 고른 것은 그 틀 안에 넣은 두 낱말뿐입니다. 거유(鉅儒)와 명현(名賢). 벼슬도 공적도 아니고 학문으로 사람을 부른 말입니다.

작아 보이지만 졸기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졸기에서 사관은 “학자들이 퇴계 선생이라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라는 전언입니다. 여기서는 사관 자신이 큰 선비라고 적었습니다. 그 차이가 네 글자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이 자기 말로 이황을 부른 자리는 졸기가 아니라 여기입니다. 인물평을 적는 자리에서는 문집을 가리켰고, 대신 정기 인사 기록의 끝에 네 글자를 붙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두 기사가 이렇게 갈라져 있습니다. 죽음에는 판정이 없고, 예우에는 판정이 있습니다. 그 둘은 원래 열하루 사이의 일인데, 실록에서는 권을 넘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집을 가리킨 그 손짓이, 뒤에 뜻밖의 방식으로 되돌아옵니다.

VII. 87년 뒤, 그 문집으로

다시 쓴 실록의 재료는 사초가 아니라 사람의 기억과 집안에 남은 글이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이 완성된 것은 1657년입니다. 이황이 죽고 87년 뒤입니다.

수정하자는 말은 훨씬 앞서 나왔습니다.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 반정 넉 달 뒤의 경연 자리입니다. 경연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책을 읽고 논의하던 자리입니다. 거기서 이수광이 아룁니다.

宣祖朝實錄, 纂定於賊魁之手, 羞辱甚矣。 宜令改纂。 선조조실록은 역적의 우두머리 손에서 편찬되었으니 수치와 모욕이 심합니다. 마땅히 다시 편찬하게 하소서.
—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8월 18일

이어서 이정귀가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합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가 계축년(1613)의 옥사에 휘말려 쫓겨났는데, 이이첨이 정국을 잡은 뒤 초고를 모두 없애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묻습니다.

然則今欲改正, 將何所據? 그렇다면 이제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근거로 삼겠는가?
— 같은 기사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편에서 필자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대목입니다.

如《政院日記》, 可考。 且聞外間有朝報, 自戊辰至戊子云, 而間或缺失, 當參以聞見。 朝臣衰老, 漸忘故事, 須速改正。 《정원일기》 같은 것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들으니 민간에 조보가 있어 무진년부터 무자년까지의 기록이 있다고 하나, 간혹 빠진 곳이 있으니 견문을 함께 참고해야 합니다. 조정 신하들이 늙고 쇠해 옛일을 점차 잊고 있으니, 속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 같은 기사

정원일기는 승정원일기입니다.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이 날마다 적은 기록이고, 조보는 조정 소식을 적어 돌리던 관보입니다. 견문은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승정원일기가 있고, 민간에 도는 조보가 있고, 그것마저 빠진 데가 있으니 사람들의 기억을 보태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늙어 옛일을 잊어가고 있다.

나라의 정식 기록을 다시 쓰겠다는 자리에서 나온 답이 사람의 기억입니다. 1623년, 이황이 죽은 지 53년째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일은 빨리 되지 않았습니다. 수정이 실제로 결정된 것은 18년 뒤인 1641년, 대제학 이식이 올린 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식은 1643년 적상산성의 사고(史庫)에 내려가 고칠 곳을 뽑아 왔고, 1646년 파직된 뒤 이듬해 죽었습니다. 작업은 중단됐다가 1657년에야 다시 열려 그해 가을 끝났습니다. 이정귀가 “신하들이 늙어간다”고 말한 지 34년 뒤입니다.

무엇으로 썼을까요. 사초는 없었습니다. 편찬자들이 모은 것은 집안에 전하는 사초와 비문, 행장, 야사, 잡기 같은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선조실록』의 사관이 “그의 학문과 업적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한다”고 가리킨 바로 그 자리에서, 후대의 편찬자들이 재료를 가져왔습니다. 39자가 비워둔 곳을 채운 글의 출처가, 39자가 지목한 곳입니다.

덧붙임
그렇게 다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이황 졸기는 죽음과 조정의 예우를 적은 뒤, 이황이 병중에 아들에게 남긴 당부를 옮깁니다. 나라에서 예를 갖춰 치러주는 장례를 사양하라는 것, 무덤 길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 작은 돌 앞면에 여덟 글자만 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곧 늘그막에 도산에 숨은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입니다. 벼슬 이름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여덟 글자입니다. 비문을 줄이라고 한 사람의 기록이, 그 사람을 되찾으려는 실록에서 열 배 넘게 늘어났습니다.

VIII. 그래서 13.5배는

13.5배라는 숫자는 이황을 얼마나 높였는지를 재는 값이 아니었습니다. 상당 부분은 원본에 무엇이 없었는지를 재고 있었습니다.

처음 물었던 13.5배로 돌아갑니다. 이제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압니다. 사초 없이 적힌 39자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1편에서 필자는 이황의 원본을 74자로 헤아렸습니다. 그 숫자에는 졸기 뒤에 붙은 권말 표기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三終〕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권의 마지막 기사라서 생긴 일입니다. 졸기만 헤아리면 구두점까지 넣어 58자, 한자만 헤아리면 39자입니다. 배율을 재는 자리에 실록의 마침표가 섞여 들어간 셈입니다.

그러니 그 배율은 편찬자가 이황을 얼마나 높였는지를 재는 숫자가 아닙니다. 상당 부분은 원본에 무엇이 없었는지를 재고 있습니다. 이황이 예외로 보였던 것은, 필자가 그 숫자를 당파 하나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졸기1 이이편의 표를 원본 글자수 쪽에서 다시 보면 두 무리가 갈립니다. 크게 늘어난 이이·노수신·심의겸·이황은 원본이 10자에서 70자 남짓이었습니다. 반면 정철·김명원·최흥원·유성룡은 원본이 150자를 넘습니다. 앞쪽에서는 무엇을 쓰든 배율이 커집니다. 뒤쪽에서는 서인 정철이 7.8배로 늘고 남인 유성룡이 0.5배로 줄어든 것, 이게 선택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IX. 말풀이 사전

기록에 관한 말

사고(史庫) 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입니다. 전쟁에 대비해 여러 곳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권(卷)·장(張)·A면/B면 옛 책의 차례와 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이 한 장의 앞면이 A면, 뒷면이 B면입니다.

문집(文集) 한 사람이 쓴 글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행장(行狀)·비문 행장은 죽은 이의 생애를 차례대로 정리한 글이고, 비문은 무덤의 비석에 새긴 글입니다.

야사(野史)·잡기(雜記)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 사사로이 남긴 기록입니다.

조보(朝報) 조정의 소식을 적어 돌리던 관보입니다.

승정원일기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이 날마다 적은 기록입니다. 본문의 《정원일기》가 이것입니다.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함께 책을 읽고 논의하던 자리입니다.

벼슬과 예우에 관한 말

자(字)·호(號) 이름 말고 따로 쓰던 이름입니다. 자는 어른이 되면서 받고, 호는 스스로 짓거나 남이 붙여줍니다.

본관(本貫) 집안이 뿌리를 둔 고장입니다.

시호(諡號) 죽은 뒤에 나라가 공적을 따져 내려주는 이름입니다. 이황의 시호는 문순(文純)입니다.

추증(追贈) 죽은 뒤에 벼슬을 올려주는 것입니다.

예장(禮葬) 나라가 예를 갖추어 치러주는 장례입니다.

문묘 종사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함께 모시는 것입니다. 유학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예우입니다.

품계 관리의 등급입니다. 정1품이 가장 높고 종1품이 그다음입니다. 숭정대부는 종1품 품계의 이름입니다.

판중추부사·우찬성 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으뜸 벼슬로, 맡은 실무가 뚜렷하지 않은 명예직에 가깝습니다. 우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벼슬입니다.

도목정(都目政) 관원을 한꺼번에 심사해 자리를 정하던 정기 인사입니다.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잘못을 아뢰던 기관입니다.

대제학 학문과 나라의 문서를 총괄하던 벼슬입니다.

때와 사람에 관한 말

간지(干支)와 일진 날짜에 숫자 대신 붙이던 예순 개의 이름입니다. 갑자·을축·병인 차례로 돌아갑니다. 그날에 붙은 이름을 일진이라 합니다. 본문의 신축·갑오·임자가 모두 여기에 듭니다.

재위년 임금이 자리에 오른 다음 해를 1년으로 삼아 헤아리는 햇수입니다. 선조 3년은 1570년입니다.

남인·서인 조선 후기에 갈라진 정치 집단, 곧 붕당의 이름입니다.

인조반정 1623년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운 사건입니다.

X. 편집장의 메모
교정지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틀린 문장이 아니라 맞는 문장입니다. 교정지는 인쇄하기 전에 잘못된 곳을 잡으려고 뽑아보는 종이입니다. 틀린 문장은 눈에 걸리지만, 맞지만 이유가 틀린 문장은 그대로 인쇄됩니다. 졸기1편의 배율표가 그랬습니다. 숫자는 다 맞았고 결론도 대체로 맞았는데, 둘을 잇는 이유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39자를 읽으면서 오래 걸려 있던 대목이 있습니다. 사관은 쓸 수 없을 때 지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적었습니다.

87년 뒤의 편찬자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재료를 찾았습니다. 출처를 밝혀둔 문장은 당장은 초라해 보여도 나중에 길이 됩니다. 빈칸을 그럴듯하게 메운 문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39자가 오래 남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3권 43장 B면 · 원문 보기

『선조실록』 4권 23장 A면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4권 · 원문 보기

『인조실록』 인조 1년 8월 18일 · 원문 보기

본문의 번역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글자수는 구두점을 뺀 한문 원문을 기준으로 헤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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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3편. 다음은 정철입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두 실록이 정반대로 쓴 졸기를 나란히 놓겠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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