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7 · 정인홍 — 사관이 미리 써둔 말

정인홍 졸기 글자 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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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는 정인홍은 지난 연재까지 소개한 여섯 인물 중 네 명과 직접 얽혀 있습니다. 이황(李滉)을 문묘에서 빼자고 했고, 정철(鄭澈)을 탄핵하는 편에 섰고, 최영경(崔永慶)과는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배웠고, 유성룡(柳成龍)과는 조정에서 갈라섰습니다. 영의정까지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실록 전체에서 그의 이름이 걸리는 기사는 1,095건입니다. 그런데 졸기는 없습니다. 한 건도 없습니다.

I. 이 사람

정인홍(鄭仁弘, 1536~1623). 자(字)는 덕원(德遠), 호(號)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 경상도 합천 사람입니다.

시호(諡號)는 없습니다. 시호란 죽은 뒤에 나라가 내리는 이름입니다. 실록 부가정보의 인물 항목을 보면 자와 호는 채워져 있는데 시호 칸만 비어 있습니다. 이 빈칸은 마지막 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관직을 순서대로 놓으면 이렇습니다. 1575년 황간 현감(黃澗縣監)으로 시작해 1580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정5품 감찰직), 1583년 장령(掌令, 정4품), 1599년 형조 참의(刑曹參議, 정3품), 1602년 대사헌(大司憲, 종2품 감찰기관장), 160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 종2품), 1608년 우찬성(右贊成, 종1품), 1612년 우의정(右議政), 그리고 1618년 영의정(領議政)입니다.

1602년 한 해에만 대사헌이 여덟 번 찍힙니다. 제수와 사직을 되풀이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벼슬을 받고도 서울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합천에 있으면서 조정 일에 관여했습니다.

죽을 때의 벼슬은 —— 없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3월 28일 한성부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4월 3일 처형됩니다. 여든여덟이었습니다.

II. 죽음을 적은 문장은 다섯 글자입니다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4월 3일, 네 번째 기사입니다. 제목은 「정인홍 등을 복주하다」입니다.

복주(伏誅)란 죄에 엎드려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형을 받아 죽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정인홍복주(鄭仁弘伏誅). 민흥·유세증·서국정·한정국·한정국·이정원·채겸길·홍요검·황덕부·이이반·유몽옥·이여계·이각·이수를 모두 이날 함께 죽였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3일 · 한문 원문에서 옮김

기사 전체가 53자입니다. 그중 그를 적은 부분은 앞의 다섯 글자, 정인홍복주(鄭仁弘伏誅)입니다. 이름 석 자를 빼면 남는 것은 복주(伏誅) 두 글자입니다.

나머지 열네 명은 이름만 늘어놓은 뒤 “모두 이날 함께 죽였다”로 처리됐습니다. 영의정을 지낸 사람의 죽음이 열다섯 명을 묶은 기사의 첫머리에 놓였습니다. 단독 기사조차 아닙니다.

1화 이이의 『선조실록』 부고가 12자였습니다. 4화 정철의 졸기 본문이 8자였습니다. 6화에서 사관이 유성룡에 대해 직접 내린 판단이 5자였습니다. 이번은 2자입니다.

나라가 걱정한 것

하루 전인 4월 2일, 승정원(承政院, 왕명 출납을 맡은 비서기관)이 임금에게 아룁니다. 의금부에 갇힌 죄수가 백여 명인데 국문이 여드레째 멈춰 있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뒤에 정인홍이 붙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정인홍의 죄악은 하늘과 땅에 닿을 만큼 커서 이이첨(李爾瞻)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데, 잡아온 지 사흘이 되도록 아직 목이 붙어 있다.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이 모두 저 늙은 간악한 자(老奸)가 형을 받기 전에 지레 죽어버릴까(徑斃) 두려워한다. 속히 법에 따라 죄를 정하고 종묘에 고하게 해달라. 임금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여기서 눈에 걸리는 것은 경폐(徑斃)입니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죄수가 지레 죽어버리는 일을 가리킵니다. 실록 전체에 486건이 나오는 행정 용어입니다. 옥에서 사람이 죽는 것이 그만큼 흔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정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을 갖추기 전에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든여덟 살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래서 서둘렀고, 다음 날 그대로 됐습니다.

국가가 쓴 인물평은 따로 있었습니다

같은 날 다섯 번째 기사는 이렇습니다. 열여섯 글자입니다.

이이첨과 정인홍 등의 죄악을 방(榜)으로 만들어 조당(朝堂)에 걸고 팔방에 반포하였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3일 · 한문 원문에서 옮김

방(榜)은 관청이 내거는 게시문이고, 조당(朝堂)은 조정의 관청가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작성한 정인홍 인물평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방문(榜文)이라는 형태로, 전국에 뿌려질 만큼 길게. 다만 그 텍스트는 실록 안에 없습니다. 실록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사실만 열여섯 글자로 적었습니다.

죄인이라서 못 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합니다. 처형된 죄인이라 졸기를 붙일 수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적었습니다.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인조실록』에는 졸기가 110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강홍립(姜弘立)입니다. 1627년, 정인홍이 죽고 4년 뒤입니다.

강홍립은 광해군 때 명나라를 돕는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후금(後金)에 항복한 사람입니다. 정묘호란 때는 적진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가 병으로 죽자 인조는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 물품을 내주라 명했고, 승정원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를 두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라의 명을 받아 국경을 나가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적에게 항복했고, 적을 이끌어 나라를 침범했으며, 그 뜻이 분수에 넘치는 데 있었으니 죄가 역적보다 무겁고, 실로 천하 난적 가운데 심한 자입니다. 나라에 법이 없고 바른 논의가 행해지지 않아 왕법이 미치기 전에 창 아래에서 지레 죽어버렸으니(徑斃牖下), 신과 사람의 분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1627) 7월 27일 · 한문 원문에서 옮김

여기에도 경폐가 나옵니다. 정인홍 때 조정이 그렇게 될까 두려워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런데 강홍립에게는 졸기가 붙었습니다. 312자짜리로. 죽음의 정황, 임금의 처분, 승정원의 반대, 대신들의 의논이 차례로 실려 있습니다.

같은 실록입니다. 같은 편찬진입니다. 4년 차이입니다. 천하의 난적이라 불린 사람에게 312자, 영의정을 지낸 사람에게 5자.

『경종실록』에서는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졸기 27건 가운데 여덟 건의 제목에 죄인이 붙어 있습니다. 「국청 죄인 홍계적의 졸기」, 「무고 죄인 권진성의 졸기」 하는 식입니다. 분량도 짧지 않습니다. 국청 죄인 김운택이 484자, 무고 죄인 권진성이 555자인데, 같은 실록에서 영의정 조태구는 285자, 좌의정 최석항은 181자입니다. 죄인의 졸기가 정승의 졸기보다 깁니다.

홍계적의 졸기는 국문 문목과 공초를 그대로 옮긴 뒤 사관이 이렇게 닫습니다. 역적의 공초는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흉역에 가담했다 하여 끝내 형틀 아래에서 죽게 했으니 참으로 원통하다(誠冤矣). 위관이 어지러운 의논을 눌러 앉히지 못한 탓이니 애석하다(惜哉).

다만 죄인 졸기라고 다 같은 물건은 아닙니다. 권진성의 555자는 인물평이 아니라 결안(結案), 곧 판결문 요약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무고했고 어떻게 자복했는지가 실리고 목을 베고 가산을 몰수한다는 처분으로 끝납니다. 형식은 졸기인데 내용은 조서입니다. 반면 홍계적과 윤각(尹慤)의 졸기에는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윤각의 졸기에는 숙종이 뜰에서 무사를 사열하다 그의 풍채를 보고 저 수염 난 자가 누구냐고 물어 발탁했다는 장면까지 남았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실록은 죄인에게도 졸기를 씁니다. 국문받다 죽은 사람에게도, 옥에서 병들어 죽은 사람에게도, 적에게 항복했다 병사한 사람에게도 씁니다. 때로는 정승보다 길게 쓰고, 원통하다고까지 씁니다.

그러니 정인홍의 부재는 제도가 아닙니다. 선택입니다.

이 물음은 이 편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름 뒤에 죽은 이이첨에게도 졸기가 없었고, 그보다 125년 앞서 처형된 사관 김일손에게도 없었습니다. 부재가 어떤 자리에서 만들어지는지는 두 편에서 이어 다뤘습니다.

III. 그런데 평가는 50년 앞쪽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이번 편의 본론입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1573) 5월 1일, 네 번째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이 그냥 「정인홍의 인품」입니다. 주제분류도 인물(人物) 하나뿐입니다.

그가 죽기 50년 전입니다. 서른여덟 살,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천거되어 6품직을 받던 무렵입니다. 벼슬길에 막 들어서는 자리에 인물평이 놓여 있습니다.

전반부 — 스승과 칼
정인홍은 합천(陜川) 사람이다. 어릴 때 조식(曺植)에게 배웠는데, 조식은 그의 뜻과 지조가 보통 아이들과 다름을 기이하게 여겨 경건한 마음을 지키도록[持敬] 가르쳤다. 그 뒤로 정인홍은 굳세게 고생을 견디며 공부해 새벽부터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식은 늘 방울을 차고 잠을 깨웠으며, 칼을 짚어 졸음을 경계했다. 말년에 방울은 김우옹(金宇顒)에게 주고, 칼은 정인홍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마음을 전한다[以此傳心].” 정인홍은 칼을 턱 아래에 받치고 꿇어앉아 평생 하루같이 실천했다.
후반부 — 성품
그러나 타고난 성품은 강퍅하고 제멋대로여서[剛戾自用], 남과 말하다가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곧 화를 내며 이기려 들었다. 헛소문을 만들고 해칠 일을 꾸미는 데[造言謀害] 음험하고 교묘해 헤아릴 수 없었으며[陰巧不測], 지극히 가까운 친족이나 두터운 벗에게도 문득 원수처럼 대했다. 수양이 깊을수록 드러나는 기세는 더욱 사나웠다. 그의 독서는 옛일을 깊고 넓게 탐구해 조식보다 뛰어났고, 특히 따지고 공격하는 글에 능했다.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알면서도 강함을 두려워해 맞서지 못했다. 이이(李珥)는 마음을 비우고 선을 좋아해 그의 명성을 듣고 크게 기울었으며, 마침내 그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가 임인(壬人)인 줄은 알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조정에 널리 알려졌다.
— 『선조수정실록』 7권, 선조 6년(1573) 5월 1일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구두점을 빼고 세면 183자입니다.

두 자리의 낙차

정인홍에 대해 사관이 쓴 글자 수 — 한문 원문 기준
등장 — 「정인홍의 인품」 (1573)183자죽음 — 「정인홍 등을 복주하다」 (1623)5자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36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뒤집혀 있습니다. 이 연재에서 지금까지 본 배율은 모두 죽음의 자리에서 잰 것이었습니다. 이번은 죽음의 자리가 거의 비었고, 대신 등장의 자리가 부풀어 있습니다.

임인(壬人)이라는 두 글자

마지막 문장을 다시 봅니다. 그가 임인인 줄은 알지 못했다(不知其爲壬人也).

임인(壬人)은 『서경(書經)』에서 온 말입니다. 말과 낯빛을 꾸며 임금을 홀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실록 41만 3,577건 전체에서 이 두 글자는 24건에 나옵니다. 4화의 병국권(秉國權)만큼 희소하지는 않지만, 아무 데나 쓰는 말도 아닙니다. 대개 상소문이나 탄핵 계사(啓辭,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문)에 실립니다.

인물평의 마지막 자리에 이 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는 정인홍이 아니라 이이입니다. 정인홍을 임인이라 부르는 대신, 이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1화에서 다룬 그 사람이 여기서 판단의 기준으로 쓰였습니다.

언제 쓰였는가

한 가지 반드시 짚어야 합니다. 이 인물평은 1573년에 쓰인 것처럼 놓여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은 1657년에 완성됐습니다. 그가 죽고 34년 뒤이고, 반정 이후 서인 정권 아래에서 편찬된 판본입니다.

즉 이 글을 쓴 사관은 결말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년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빼자고 한 사건)도, 폐모론도, 참형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1573년 자리에 써 넣었습니다.

측정값과 해석을 구분하겠습니다. 183자와 5자는 센 값입니다. 편찬 시점이 1657년이라는 것은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말을 알았기 때문에 시작 자리에 미리 써두었다는 것은 제 해석입니다. 실록은 왜 여기에 놓았는지 적지 않았습니다.

IV. 사관이 사관을 논박합니다

이번 편에서 가장 낯선 기록은 따로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35년(1602) 9월 25일 기사입니다.

경상도에 사는 오여은(吳汝檼)이 상소를 올려 정인홍을 변호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사관이 당시 사관이 쓴 논평을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옮겨진 논평은 이런 내용입니다. 정인홍은 조식의 뛰어난 제자이며 기절(氣節, 기개와 절조)로 자부했고, 많은 선비가 그를 높여 내암 선생(來庵先生)이라 불렀다. 조정은 어진 이를 높이는 뜻을 받들어야 하는데 정인홍이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산림에 숨은 선비들이 산이 깊지 않을까만 걱정하며 그를 경계로 삼게 되었다, 심히 애석하다.

명백한 칭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편찬자가 그 인용을 부숩니다.

정인홍은 산림에 자취를 빌려두고(假跡山林) 멀리서 조정 권세를 쥐었으며(遙執朝權), 사림을 해치는 것을 일삼았다. 이이와 성혼(成渾)을 원수보다 심하게 헐뜯었고, 이이첨 등 서너 사람과 결탁해 조정을 어지럽혔다. 그런데도 사신(史臣)이 제멋대로 찬양한 것은 아부하고 아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附會諂媚之心). 비루한 자와는 함께 임금을 섬기기 어렵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 구절은 『논어(論語)』에서 온 말입니다. 사관이 사관을 지목해 아첨했다고 쓴 것입니다. 이 연재에서 처음 보는 형태입니다.

6화에서 유성룡의 졸기를 볼 때, 사관은 남의 평가를 여럿 인용해 늘어놓고 자기 말은 다섯 글자만 붙였습니다. 여기서는 남의 평가를 끌어와서 그 자리에서 부숩니다. 인용의 목적이 정반대입니다.

한 가지 더. 요집조권(遙執朝權)은 실록 전체에 11건이 나옵니다. 정인홍만의 말이 아닙니다. 송시열(宋時烈)·허목(許穆)·홍국영(洪國榮)에게도 붙었고, 1589년부터 1779년까지 200년에 흩어져 있습니다. 상대를 칠 때 꺼내 쓰는 말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 기사에서는 정인홍에게 쓰였습니다. 둘 다 사실이므로 둘 다 적어둡니다.

V. 광해군일기 — 지우면서 남긴 사람

정인홍이 조정의 한복판에 있던 시기의 기록은 『광해군일기』입니다. 이 실록은 초고인 중초본(中草本)과 정서본인 정초본(正草本)이 둘 다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편찬 과정이 이렇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판본전체 기사정인홍 언급밀도
광해군일기 중초본22,121건370건1.67%
광해군일기 정초본18,805건347건1.85%

초고를 다듬으면서 전체 기사는 15% 덜어냈습니다. 그런데 정인홍이 나오는 기사는 6%만 덜어냈습니다. 그래서 밀도가 올라갔습니다.

두 판본은 같은 사건을 담은 초고와 정서본이므로 합산하지 않고 나란히만 놓습니다. 그리고 이 실록 역시 반정 이후에 편찬됐습니다.

시즌1 5화에서 이순신의 밀도 역전을 봤습니다. 분량을 14분의 1로 줄이면서 밀도는 두 배로 올린 경우였습니다. 이번은 형태가 같고 방향이 반대입니다. 그때는 지워진 사람의 밀도가 올랐고, 이번은 남겨둔 사람의 밀도가 올랐습니다.

덜어내는 작업에서 무엇을 남기는지가 무엇을 지우는지만큼 말을 합니다.

VI. 남명 문하의 두 사람

5화의 최영경과 이번의 정인홍은 열다섯 무렵 같은 스승 밑에서 만난 동문입니다. 최영경·오건(吳健)·김우옹·곽재우(郭再祐)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남명(南冥)은 조식의 호입니다.

그리고 둘 다 졸기가 없습니다.

두 사람 주변에서 같은 낱말이 두 번 눈에 띕니다.

경폐(徑斃). 최영경은 1590년 옥에서 실제로 그렇게 죽었습니다. 정인홍의 경우는 조정이 그렇게 될까 봐 서둘렀습니다. 한 사람은 형식 없이 죽었고, 한 사람은 형식을 갖추기 위해 서둘러 죽였습니다.

임인(壬人). 24건 중 하나가 「정인홍의 인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1602년 사헌부 계사인데, 최영경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을 문책하라는 대목에 나옵니다. 하늘이 죄를 벌한다면서 임인을 물리치는 의리(難壬人之義)에 맞느냐고 묻습니다. 24건 중 둘이 남명 문하 두 사람의 주변에 있습니다.

우연일 수 있습니다. 표본이 작고, 두 사람이 같은 정치적 자장 안에 있었으니 같은 어휘장이 따라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어본 값이니 적어둡니다.

VII. 285년 뒤, 이름 하나

『순종실록』 순종 1년(1908) 1월 30일 기사입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이 융희(隆熙) 원년 11월 18일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죄적(罪籍)에 이름이 오른 자들의 죄명을 씻고 관작과 시호를 회복시키는 안(復爵諡案)을 올렸고, 그대로 하라는 답이 내렸습니다.

명단은 26명입니다. 한효순(韓孝純)이 첫 번째고, 정인홍이 두 번째입니다. 뒤이어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이광좌(李光佐)·조태구(趙泰耉)·조태억(趙泰億)·최석항(崔錫恒)·유봉휘(柳鳳煇)·김일경(金一鏡) 등이 이어지고, 갑오년(1894)에 신원됐으나 관작이 회복되지 않은 다섯 명이 따로 붙습니다.

285년 만에 이름이 돌아왔는데, 돌아온 방식은 개별 복권이 아니라 일괄 명단의 두 번째 줄이었습니다. 그를 따로 설명하는 문장은 한 줄도 없습니다.

여기서 2절의 죄인 졸기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경종실록』의 죄인 졸기들은 대개 신임옥사(辛壬獄事)에 걸려 죽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재평가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조 대에 신원됩니다. 사관이 원통하다고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재평가가 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건 짐작입니다.

정인홍에게는 그 예정이 없었습니다. 285년 동안 없었습니다.

명단의 제목은 관작과 시호를 회복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봤듯 그에게는 시호가 없습니다. 없는 것을 회복시킨 셈입니다. 명단 전체에 적용되는 관용구였을 것입니다. 이것도 짐작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이 실린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편찬된 것이어서, 앞선 실록들과 사료의 성격이 다릅니다. 그 점을 밝혀둡니다.

졸기는 끝내 쓰이지 않았습니다.

편집장의 메모

책을 만들 때 저자 소개를 어디에 넣느냐로 오래 다툰 적이 있습니다. 앞날개에 넣으면 독자가 읽기 전에 그 사람을 규정하고 들어가고, 뒤에 넣으면 다 읽고 나서 확인하게 됩니다. 같은 문장인데 놓는 자리에 따라 다른 글이 됩니다. 정인홍의 인물평은 앞날개에 놓였습니다. 그것도 결말을 다 아는 사람이 나중에 써서 앞에 꽂아 넣었습니다. 부고 자리가 두 글자로 비어 있는 것이 실수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할 말은 이미 앞에서 끝나 있었습니다.

출처

  • 『선조수정실록』 7권, 선조 6년(1573) 5월 1일 — knb_10605001_004
  • 『선조수정실록』 36권, 선조 35년(1602) 9월 25일 — knb_13509025_001
  • 『선조실록』 146권, 선조 35년(1602) 2월 6일 — kna_13502006_004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2일 — kpa_10104002_002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3일 — kpa_10104003_004, kpa_10104003_005
  •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1627) 7월 27일 — kpa_10507027_001
  • 『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1722) 10월 20일 — kta_10210020_002
  • 『경종실록』 11권, 경종 3년(1723) 1월 24일 — kta_10301024_002
  • 『경종수정실록』 5권, 경종 4년(1724) 1월 10일 — ktb_10401010_001
  •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1월 30일 — kzb_10101030_004
  • 글자 수·언급 밀도·어휘 빈도는 조선왕조실록 공공데이터(실록 원문·색인어)를 로컬 인덱스로 직접 집계한 값입니다. 한문 원문 기준입니다.
  • 인용문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7편. 다음은 이이첨(李爾瞻)입니다. · 연재 전체 목차 보기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