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정인홍(鄭仁弘) 졸기를 찾다가 찾지 못했습니다. 영의정을 지낸 사람의 죽음이 다섯 글자로 끝나 있었고, 대신 그가 벼슬길에 막 들어서던 자리에 183자짜리 인물평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편을 닫으면서 졸기의 부재는 제도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번에 다룰 인물 이이첨(李爾瞻)에게도 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형된 날의 기사를 열면 838자짜리 인물평이 들어 있습니다. 졸기라는 이름만 붙지 않았습니다.
I. 이 사람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자(字)는 득여(得輿), 호(號)는 관송(觀松)과 쌍리(雙里)를 함께 썼고, 본관은 광주(廣州)입니다.
시호(諡號)는 없습니다. 지난 편의 정인홍과 마찬가지입니다.
158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고, 1593년 광릉 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된 뒤 이듬해 별시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599년 이조 정랑(吏曹正郞, 정5품 인사 실무직)에 올랐습니다. 1608년 중시(重試, 현직 관원을 대상으로 한 승진 시험)에서 장원했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와 대제학(大提學)을 겸했습니다.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대제학은 달리 문형(文衡)이라 부릅니다. 글의 저울이라는 뜻입니다. 이 자리는 마지막 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죽을 때의 벼슬은 없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II. 졸기는 없습니다. 인물평은 있습니다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3월 19일, 네 번째 기사입니다. 제목은 「이이첨·정조·윤인 등을 복주하다」입니다.
복주(伏誅)는 죄에 엎드려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기사의 구조가 특이합니다. 앞부분 110자는 사무적입니다. 여섯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사실, 대신과 의금부 당상과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장관이 모여 여덟 사람을 그날로 처형하자고 아뢴 계사, 임금이 따랐다는 것, 다만 이대엽(李大燁)만은 특명으로 섬에 위리안치했다는 것. 여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사신왈(史臣曰)이 붙습니다. 1,046자입니다. 그중 838자가 이이첨 한 사람을 다룹니다.
헤아리는 기준을 밝혀둡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합니다. 이 연재가 다루는 졸기 2,179건은 제목에 졸기라는 말이 들어간 기사입니다. 실록의 편찬자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만 셉니다. 이이첨의 인물평은 제목이 「복주하다」입니다. 그래서 졸기 목록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 838자는 졸기가 아닙니다. 다만 졸기가 하는 일을 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처음부터 살피고, 성품을 규정하고, 마지막에 죽음의 정황을 적습니다. 형식은 졸기이고 이름만 다릅니다.
측정값과 해석을 구분하겠습니다. 1,156자와 838자는 구두점을 빼고 헤아린 값입니다. 이 기사에 졸기라는 제목이 붙지 않았다는 것은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졸기와 같다는 것은 제 판단입니다.
III. 보름 사이의 두 죽음
이이첨은 3월 19일에 죽었고, 정인홍은 4월 3일에 죽었습니다. 열닷새 차이입니다. 두 기사는 『인조실록』 1권 안에 나란히 있습니다. 같은 실록이고, 같은 편찬진의 손입니다.
지난 편에서 본 승정원(承政院)의 계사를 다시 꺼냅니다. 4월 2일, 승정원은 정인홍의 죄악이 이이첨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국가는 두 사람을 같은 급으로 놓았습니다. 4월 3일 조당(朝堂)에 내걸린 방(榜)에도 두 이름이 나란히 실렸고, 순서는 이이첨이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관은 한쪽에 838자를 쓰고, 다른 쪽에는 다섯 글자를 썼습니다.
167배가 넘습니다.
여기서도 측정값과 해석을 갈라두겠습니다. 두 숫자는 헤아린 값입니다. 두 기사 모두 같은 편찬진이 기록했습니다. 왜 한쪽만 길어졌는지는 실록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숫자만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분량의 차이가 죄의 경중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같은 급으로 판정한 두 사람인데, 기록의 무게는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IV. 첫 문장이 계보였습니다
졸기는 대개 이름과 본관, 자와 호, 아니면 마지막 벼슬로 시작합니다. 이이첨의 인물평은 다르게 시작합니다.
이름이 나오기 전에 조상이 먼저 나옵니다.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은 『성종실록』을 만드는 실록청(實錄廳)의 당상(堂上)이었습니다. 사초(史草)를 검토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초에는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써둔 기록이 들어 있었고,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이 일이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번졌고, 김일손을 비롯한 사관들이 죽었습니다. 그 사초가 어떻게 실록 안에 남게 됐는지는 9편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그 조상 이극돈에게는 졸기가 있습니다
찾아보았더니 있었습니다. 『연산군일기』 48권, 연산군 9년(1503) 2월 27일, 「광원군 이극돈의 졸기」입니다. 248자입니다.
이쪽은 아주 전형적인 졸기입니다. 안을 넷으로 나눠 세어보면 이렇습니다.
| 구간 | 분량 |
|---|---|
| 벼슬 이력 | 146자 |
| 시호 풀이 | 13자 |
| 칭찬 | 23자 |
| 그러나 이후 | 61자 |
절반 이상이 벼슬 이름입니다. 그다음 시호를 풀고, 칭찬을 놓고, 마지막에 연(然), 곧 그러나로 꺾어 흠을 적습니다. 졸기의 표준 골격입니다.
칭찬 쪽 23자는 이렇습니다.
그리고 꺾입니다. 도량이 좁고 성품이 가혹하며 세밀해서 일을 터럭 끝처럼 따졌다고 적습니다. 그 뒤에 사초 이야기가 붙습니다.
벼슬 이력 안에도 그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무오년에 사사(史事), 곧 사관에 관한 일로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는 한 줄입니다. 실록은 그의 경력 안에 사화를 한 항목으로 끼워 넣었습니다.
통설의 출처가 여기입니다
무오사화의 원흉이 이극돈이라는 통설은 후대의 추측이 아닙니다. 출처가 이 졸기입니다. 최근 학계에서 그 통설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은, 곧 이 몇 문장을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사초를 임금에게 아뢴 사람은 그가 아니었고 그 자신도 실록청 책임자로서 조사를 받는 처지였다는 반론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관 자신도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판정을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이라는 말에 얹었습니다. 으뜸가는 악인이라고 말한 주어는 사관이 아니라 당대 여론입니다.
6편에서 본 방식입니다. 유성룡의 졸기에서 사관이 직접 내린 판단은 다섯 글자뿐이었고, 무거운 평가는 모두 남의 입을 빌려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같습니다. 사관은 자기 손으로 사람을 매장하지 않습니다.
120년 뒤에 완충이 사라집니다
1650년대의 사관은 그 완충을 걷어냅니다. 간신 이극돈. 인용도 아니고 전언도 아닌 단정입니다.
두 글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 이극돈 | 이이첨 | |
|---|---|---|
| 분량 | 248자 | 838자 |
| 벼슬을 차례로 적은 대목 | 146자 | 없음 |
| 시호 | 익평(翼平) | 없음 |
| 칭찬 | 23자 | 없음 |
| 최종 판정의 주어 | 당시 사람들 | 사관 |
조상에게는 졸기라는 이름이 붙었고 후손에게는 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쓰인 글자는 후손 쪽이 세 배가 넘습니다. 이름이 붙은 쪽은 절반이 벼슬 목록이고, 이름이 붙지 않은 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평입니다.
사초 때문에 사관들이 죽은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집안에서 나온 후손을 사관이 기록으로 매장하면서, 맨 앞줄에 조상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 조상은 실록 안에 자기 졸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졸기도 그를 살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실록이 적은 것은 후손이라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몇 대손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V. 사관이 고른 단어
이 연재는 매 편 사관이 실제로 고른 한자를 헤아립니다. 국역은 번역자의 선택이 한 겹 덧씌워지기 때문입니다.
기사 전체 1,156자를 졸기 인물평 어휘 사전과 대조했습니다. 걸린 것은 세 가지입니다.
| 어휘 | 갈래 | 이 기사에서 |
|---|---|---|
| 탐묵(貪墨) | 폄하 · 탐욕 | 1회 |
| 간사(奸邪) | 폄하 · 간사 | 1회 |
| 종자(縱恣) | 폄하 · 포악·방종 | 2회 |
1,156자짜리 글에서 네 번입니다. 사전이 부실해서가 아닙니다. 이 글을 실제로 채우는 말들이 사전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힐(巧黠), 사독(邪毒), 간특(奸慝), 음흉(陰兇), 혼렬(昏劣), 탐학(貪虐), 도철(饕餮). 하나같이 졸기의 상투어 목록에 없는 말입니다.
여기에 이 연재의 관심사가 걸립니다. 1편에서 본 청백(淸白)은 졸기 2,179건에서 40회 나오는 최다 칭찬어였습니다. 2편의 보궤(簠簋)는 부정을 직접 말하지 않으려고 빌려온 제기 이름이었습니다. 사관은 대체로 정해진 말 몇 개를 골라 씁니다. 고르는 행위 자체가 판단이었습니다.
이 글은 고르지 않습니다. 매번 새로 만들어 붙입니다.
칭찬어가 두 번 나오는데
흥미로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 1,156자 안에 검(儉)이 한 번, 공(恭)이 한 번 나옵니다. 둘 다 졸기에서는 칭찬어 계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검소함과 공손함이 성품이 아니라 연출로 지목됐습니다. 정문(旌門)은 효자나 열녀의 집 앞에 나라가 세워주는 문입니다. 그것마저 꾸며서 받아냈다고 적었습니다.
1편에서 사관은 이이(李珥)에게 청백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이 비었다는 장면을 놓았습니다. 칭찬어를 아끼고 장면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칭찬어를 꺼내되, 그것이 연기였다고 못 박기 위해 꺼냅니다.
같은 글자를 정반대로 쓰는 방법입니다.
가장 강한 문장
사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고사를 둘 더 끌어옵니다. 진(秦)나라의 갱유(坑儒), 그리고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변고가 머지않았다고 말했다는 문장으로 그 대목을 닫습니다.
이것은 평(評)이라기보다 논박문입니다.
사관은 산 사람도 겨냥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신왈의 첫 84자는 이이첨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인조에 대한 것입니다.
여덟 명을 처형하자는 계사가 올라갔는데 임금이 이대엽 한 사람만 특명으로 살려 섬에 위리안치했습니다. 사관은 그 처분을 이렇게 받습니다.
죽은 자를 838자로 치는 글이, 살아 있는 임금을 84자로 칩니다. 반정으로 막 즉위한 임금입니다.
VI. 글을 맡은 자리
인물평 한가운데에 과거(科擧) 이야기가 길게 들어 있습니다.
강경(講經)은 경서를 외워 구술하는 시험이고, 제술(製述)은 글을 지어 내는 시험입니다. 앞의 것은 신호를 미리 정해 답을 맞춰주었다는 이야기이고, 뒤의 것은 문제를 미리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방법이 구체적입니다.
어로(魚魯)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은 물고기 어 자와 노나라 노 자가 비슷해 헷갈린다는 데서 온 관용구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글자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가 뒤쪽에 다시 나옵니다. 네 아들이 모두 어리석고 못나 글도 읽을 줄 몰랐다고 적습니다. 아들 넷의 이름은 원엽(元燁)·홍엽(弘燁)·익엽(益燁)·대엽(大燁)입니다. 모두 벼슬에 있었습니다.
과거를 관리하는 사람이 과거를 조작했고, 그렇게 뽑힌 사람들 가운데 자기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만든 실록이 있습니다
여기가 이번 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이첨은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냥 참여한 것이 아니라 도청 당상(都廳堂上)의 한 사람이었고, 계축옥사(1613년) 전후로는 기자헌(奇自獻)과 함께 편찬을 주관했습니다. 1609년에 시작해 1617년에 끝난 작업입니다.
그리고 1641년, 대제학 이식(李植)이 그 실록을 다시 쓰자고 건의합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이이첨이 좋아하던 사람은 성인처럼 적고 미워하던 사람은 매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657년에 『선조수정실록』이 나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앞선 실록을 통째로 다시 쓴 첫 사례입니다.
시즌 시리즈 「지워진 실록」 1화에서 이순신(李舜臣)의 판본별 밀도를 헤아렸던 그 두 실록입니다. 그리고 지난 편에서 읽은 「정인홍의 인품」 183자도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글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이첨이 만든 기록은 지워졌습니다. 그것을 다시 쓰려고 만든 실록에 정인홍의 인물평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이이첨 자신에 대한 838자는 또 다른 실록에 남았습니다.
기록을 관장하는 자리에 두 번 앉은 집안입니다.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이었고, 이이첨은 실록 편찬을 주관했으며 문형까지 잡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남의 기록을 다루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기에 대한 기록은 고르지 못했습니다.
원고를 반려하는 편지를 오래 썼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짧은 반려는 대개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긴 반려는 아직 다툴 것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끝난 원고에는 길게 쓸 말이 없습니다. 정인홍에게 다섯 글자를 쓴 사관과 이이첨에게 838자를 쓴 사관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침묵도 판단이고 장문도 판단인데, 두 판단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838자를 읽으면서 저는 이 글이 아직 싸우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출처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3월 19일 — kpa_10103019_004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2일 — kpa_10104002_002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4월 3일 — kpa_10104003_004, kpa_10104003_005
- 『연산군일기』 48권, 연산군 9년(1503) 2월 27일 — kja_10902027_004
- 『선조실록』 편찬진 구성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실록 왕대별 해제를 따랐습니다.
- 글자 수와 어휘 빈도는 조선왕조실록 공공데이터(실록 원문·색인어)를 로컬 인덱스로 직접 집계한 값입니다.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을 제외하고 헤아렸습니다.
- 인용문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8편. 다음은 김일손(金馹孫)입니다. · 연재 전체 목차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