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편을 쓰는 동안 저는 한 방향만 봤습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늘 늘렸습니다. 이이(李珥)는 109.6배, 이황(李滉)은 13.5배, 정철(鄭澈)은 7.8배였고, 최영경(崔永慶)에 이르러서는 원본에 죽음 기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방향이 뒤집힙니다.
유성룡(柳成龍)의 졸기는 『선조실록』이 873자, 『선조수정실록』이 428자입니다. 배율은 0.49입니다. 나중에 쓴 쪽이 먼저 쓴 쪽의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이 편의 발견은 배율이 아닙니다. 긴 쪽을 열어 보고 나서 저는 다른 것을 세게 됐습니다. 그 873자 안에서 사관이 자기 입으로 내린 판정이 몇 글자인가입니다.
다섯 글자였습니다.
그리고 짧은 쪽을 열어 보고 한 번 더 놀랐습니다. 절반으로 줄어든 그 졸기가 더 날카로웠습니다.
—
I. 이 사람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뿌리는 안동 하회입니다.
이황의 문인입니다. 3편에서 다룬 그 이황입니다.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임진왜란 중에는 영의정으로 도체찰사를 겸했습니다. 훈련도감 설치를 청했고,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했으며, 화포와 성곽 수축을 건의했습니다.
1598년(선조 31) 겨울에 삭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조정이 다시 부르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곳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썼습니다. 1607년(선조 40) 5월에 죽었습니다.
졸기는 두 실록에 다 있습니다.
선조 40년(1607) 5월 13일 · 네 번째 기사
873자
태백산사고본 114책 211권 7장 B면
선조 40년(1607) 5월 1일 · 두 번째 기사
428자
그달 초하루에 몰아 적는 자리
날짜가 열이틀 어긋나 있지만 이것은 판본의 성격 차이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은 한 달치를 그달 초하루에 몰아 적는 방식을 씁니다. 3편에서 이황의 졸기가 한 해 어긋난 자리에 놓여 있던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기록해 둘 것은 이것입니다. 『선조실록』은 그가 죽은 날 가까이에 자리를 잡아 줬습니다. 5편의 최영경에게는 그 자리조차 없었던 실록입니다.
—
II. 배율이 처음으로 1 아래로 내려간 자리
1편에서 만든 표를 다시 꺼냅니다. 양쪽 실록에 졸기가 다 있는 인물 서른다섯 명을 놓고, 한문 원문 글자수의 배율을 잰 것이었습니다.
앞의 다섯은 모두 점선 오른쪽입니다. 유성룡만 왼쪽입니다.
그런데 이 표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는 3편에서 배웠습니다. 임진왜란으로 1592년 이전 사초가 대량으로 소실됐습니다. 그래서 전쟁 전에 죽은 사람은 『선조실록』 쪽 분량이 구조적으로 깎여 있습니다. 이이(1584년 몰), 이황(1570년 몰), 최영경(1590년 몰)이 전부 그 구간에 있습니다. 배율이 크게 나온 것이 편집자의 선택 때문인지 사료의 부재 때문인지, 그 구간에서는 갈라내기 어렵습니다.
유성룡은 다릅니다. 1607년에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아홉 해 뒤입니다. 사초가 정상적으로 쌓인 구간이고,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195권이 이 시기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0.49배는 부재가 만든 값이 아닙니다. 양쪽 다 쓸 재료가 충분한 상태에서 나온 차이입니다. 다섯 편 만에 처음으로 편집의 선택만을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4편과 나란히 놓으면 대칭이 보입니다.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
|---|---|---|
| 정철 (1593년 몰) | 8자 | 1,022자 |
| 유성룡 (1607년 몰) | 873자 | 428자 |
같은 두 실록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여덟 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873자를 줬습니다. 그리고 다시 쓴 쪽은 정확히 반대로 했습니다.
—
III. 졸기의 본문은 열여섯 자입니다
873자를 열어 보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구조였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한자로 열여섯 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史臣曰: “…”】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한자만 세면 사론이 588자, 전체의 97%입니다.
4편의 정철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때는 본문이 여덟 자였고 사론이 106자였습니다. 같은 실록이 같은 방식을 씁니다. 죽음은 한 줄로 적고, 하고 싶은 말은 전부 괄호 안에 넣습니다.
다른 것은 규모입니다. 106자와 588자는 다섯 배 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쪽은 형식부터 다릅니다. 428자 안에 史臣曰도 할주도 한 글자도 없습니다. 전부 본문입니다. 사관의 사적인 논평이라고 표시된 자리가 아니라, 실록의 공식 서술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마지막 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IV.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사론의 첫 대목은 칭찬입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선비들이 몰려들었으나 그를 곤란하게 하지 못하고 “서애 선생”이라 불렀다는 대목까지 들어 있습니다. 임금의 말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글을 쓴 쪽이 어디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이 주도해 편찬했고, 유성룡은 1598년에 바로 그 세력의 탄핵으로 조정에서 밀려났습니다. 4편에서 확인한 대로, 정철에게 실록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뿐인 秉國權 세 글자를 붙인 것도 같은 실록입니다.
그런 실록이 유성룡의 졸기를 이렇게 열었습니다.
—
V. 그러나
사론은 한 글자에서 방향을 바꿉니다. 然 입니다.
여기서부터 228자는 논죄입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산림의 선비들이 잇달아 죽었는데 한 사람도 구하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자신을 변명해 몸과 지위를 보전했다는 것. 임진·정유년에 화의를 강력히 주장하고 사신을 보내 환심을 구해 천고에 수치를 남겼다는 것.
5편을 읽으신 분은 이 대목이 낯익으실 겁니다. 기축옥사에서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는 죄목은, 같은 실록이 성혼(成渾)에게도 붙인 것이었습니다. 5편에서 力救를 찾다가 확인한 자리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같은 실록이 같은 형식의 죄목을 두 사람에게 씌웠습니다.
—
VI. 사관이 직접 하지 않은 말
여기까지 읽고 나서 저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판정들은 누구의 말인가.
세어 보니 이렇습니다.
| 이 졸기에 실린 판정 | 누구의 입에서 나왔나 |
|---|---|
| “공손홍”에 빗대어 배척함 | 정인홍(鄭仁弘) |
| 절교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 조목(趙穆) |
| 학식과 기상에 저절로 탄복한다 | 선조 |
| 재상의 그릇과 큰 신하의 기개가 부족하다 | 김우옹(金宇顒) |
| 이것이 정확한 평론이다 | 사관 |
칭찬도 논죄도, 결정적인 문장은 전부 남의 것입니다. 사관 자신이 쓴 판정은 마지막 한 줄, 한자로 다섯 글자뿐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평론이다.
4편과 정반대입니다. 그때 사관은 실록 전체에 한 번뿐인 말을 자기가 만들어 정철에게 붙였습니다. 이번에는 한 글자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남의 말을 모아 놓고 마지막에 도장 하나를 찍었습니다.
공손홍이라는 말을 세어봤습니다
실록 전체를 公孫弘 세 글자로 훑었습니다. 27건이 걸립니다. 그중 두 쌍은 광해군일기 중초본과 정초본에 같은 기사가 들어 있는 것이므로, 실제 사건 수는 25건입니다.
25건이 어디에 있는지가 재미있습니다. 대부분 상소·차자·경연입니다. 신하가 임금 앞에서 옛 고사를 끌어다 쓰는 자리, 누군가를 군자와 소인으로 가르는 자리입니다.
그 25건 가운데 졸기는 한 건뿐입니다. 유성룡의 것입니다.
(이 25건은 바닥값입니다. 이유는 다음 절에서 밝힙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그 한 건에서도 사관은 그 말을 자기 것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절을 쓰기 전에 정반대의 원고를 써 뒀었습니다. 국역본에 달린 각주만 보고 사관이 유성룡을 공손홍이라 규정했다고 짐작했고, 그 짐작 위에 절 하나를 세웠습니다. 원문을 열어 보니 주어가 달랐습니다.
5편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2차 자료를 믿고 力救가 최영경 기사에 있다고 썼다가, 원문 검색에서 그 말이 다른 사람 기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절을 통째로 들어냈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각주는 원문이 아닙니다.
—
VII. 두 해 뒤, 같은 이름
사관은 그 이름을 정인홍에게서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정인홍 자신은 그 이름을 어떻게 썼을까. 스물다섯 건 목록에 마침 그의 글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 10월 26일, 좌찬성 정인홍이 사직을 청하며 올린 차자입니다. 유성룡이 죽고 두 해 뒤입니다.
koa_10110026_004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방향이 반대입니다. 정인홍은 공손홍을 자기 앞에 놓지 않았습니다. 자기 주위에 놓았습니다.
원고(袁固)는 『한서』의 원고생입니다. 늙어서 조정에 불려 나갔을 때 공손홍이 그를 곁눈질했고, 원고생이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바른 학문으로 말하고,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지 말라.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정인홍은 자기를 원고생 자리에 놓고, 조정을 공손홍으로 채웠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라고 했습니다.
임금도 그 이름을 받아 썼습니다.
원문은 公孫子입니다. 원고생이 공손홍을 부를 때 쓴 바로 그 호칭입니다. 임금이 신하의 비유를 그대로 받아서 되돌려줬습니다.
여기서 갈라야 합니다
확인된 것 — 정인홍은 그 이름을 실제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가 쓰는 방식은 원고생 고사에 기대어 있습니다. 자기를 곧은 늙은 학자에 놓고, 상대를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는 자에 놓는 틀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 — 그가 유성룡을 공손홍이라 부를 때도 같은 뜻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선조실록』은 그가 그렇게 불렀다고만 적었지, 무슨 뜻으로 불렀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선조실록』 편찬은 1609년 7월에 시작됐습니다. 정인홍의 이 차자는 그해 10월입니다. 유성룡의 졸기를 쓴 사관이 이 차자를 봤는지는 알 수 없고, 실록은 그런 것을 적지 않습니다. 두 기록이 같은 해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 적어 둡니다.
그리고 한 겹이 더 있습니다
같은 기사에 사관의 할주(割註)가 붙어 있습니다.
이 할주를 단 것은 『광해군일기』의 사관입니다. 인조반정 뒤에 편찬된 실록이고, 정인홍은 그 반정으로 처형된 사람입니다.
대칭이 보입니다.
| 사관이 한 일 | |
|---|---|
| 『선조실록』 — 유성룡 졸기 | 자기 말을 하지 않음. 남의 판정을 늘어놓고 다섯 글자로 승인 |
| 『광해군일기』 — 정인홍 차자 | 직접 말함. 본문에 손대지 않고 괄호를 열어 속내를 지목 |
편찬 주체가 다른 두 실록입니다. 그런데 두 사관이 한 일은 같습니다. 남의 글을 그대로 두고, 그 글에 무게를 얹었습니다. 한쪽은 승인으로, 다른 쪽은 해설로.
저는 公孫弘 세 글자로 실록을 훑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 하나만 봐도 같은 사람이 公孫子로 두 번 더 불립니다. 검색어에 걸리지 않은 두 번입니다. 5편에서 어휘 사전이 효우(孝友)를 통째로 놓치고 있던 것과 같은 구멍일 수 있어, 검색어를 바꿔 다시 셌습니다.
公孫子는 실록 전체에서 2건입니다. 그리고 그 2건이 광해군일기 중초본과 정초본에 실린 같은 기사입니다. 바로 이 기사입니다. 앞 절에서 이미 센 한 건이므로 숫자는 스물다섯 그대로입니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지만 다시 세고 나서 하나가 더 보였습니다. 公孫子라는 호칭은 실록 전체에서 이 한 자리에만 있습니다. 정인홍이 한 번, 임금이 한 번. 원고생이 공손홍을 부를 때 쓴 그 호칭을 조선의 실록에서 쓴 사람은 이 두 사람뿐입니다. 세어보기 전에는 유일례인지 상투어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4편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
VIII. 구원 상소에서 꺼낸 한 문장
다섯 판정 가운데 하나를 더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관이 “정확한 평론”이라고 도장을 찍은 그 문장입니다.
원문은 申救疏 라고 적었습니다. 구원을 청하는 상소입니다. 김우옹은 유성룡을 살리려고 그 글을 썼습니다.
그런 글의 구조는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 그 사람의 값을 세우고, 그다음에 한 줄 물러섭니다. 물러서는 것은 변호를 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흠까지 인정하는 사람의 말이 더 믿기니까요.
사관은 그 구조에서 뒤쪽 반 줄만 꺼냈습니다. 앞의 “얻기 어려운 인물”은 조건절로 남고, “다만”이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섯 글자를 얹었습니다.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세어서 확인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 이 졸기의 판정이 전부 인용문이라는 것, 公孫弘이 실록에 25건이고 졸기는 이 하나라는 것, 인용된 문장이 원래 구원 상소의 일부라는 것. 사관이 왜 그렇게 썼는지는 실록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 앞은 제 짐작입니다.
—
IX. 줄어든 쪽이 더 날카롭습니다
이제 428자를 엽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이 다시 쓴 실록입니다. 4편에서 이 실록은 정철의 졸기를 1,022자짜리 변론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인 유성룡의 졸기가 절반으로 줄었다면 그를 덜 다루려 한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틀렸습니다.
428자도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이황의 문하, 병인년 급제, 경연 25년, 계사년에 수상으로 홀로 기무를 맡아 명나라 장수들의 문서를 물 흐르듯 처리했다는 것. 신흠(申欽)에게 받아쓰게 하니 미리 지어 둔 글 같았다는 일화까지 들어 있습니다. 신흠의 말도 그대로 옮겼습니다 — 그의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글자에서 돕니다.
분량은 절반인데 논죄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큽니다. 39%에서 60%로 올라갑니다.
같은 판정, 다른 글자
두 사관이 고른 말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規模少狹
도량이 다소 좁고
局量狹小
도량이 좁고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반대편에 선 편찬자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판정을 내렸습니다. 글자만 바꿔서.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것이 이번 편의 마지막 발견입니다.
無大臣風力
큰 신하의 기개가 없다
無大臣風節
대신의 풍절이 없다
한 글자 차이입니다. 력(力)과 절(節)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놓인 자리가 다릅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그 판정을 김우옹의 상소에서 꺼내 인용부호 안에 넣고 다섯 글자로 승인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같은 판정을 인용부호 없이, 자기 문장으로 썼습니다. 사론이 아니라 본문에 놓았습니다.
이 편의 제목은 여기서 완성됩니다. 한쪽은 빌렸고, 한쪽은 직접 했습니다. 판정은 같았습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빠졌나
| 선조실록 (873자) | 선조수정실록 (428자) | |
|---|---|---|
| 형식 | 본문 16자 + 사론 588자 | 전부 본문 300자 |
| 돌아서는 자리 | 然 · 61% 지점 | 然 · 40% 지점 |
| 도량 | 規模少狹 | 局量狹小 |
| 대신의 풍모 | 無大臣風力 — 김우옹의 말 | 無大臣風節 — 사관의 말 |
| 화의 | 力主和議 — 천고에 수치를 남김 | 主和誤國 —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침 |
| 기축옥사 | 있음 — 한 사람도 구하지 않았다 | 없음 |
| 퇴계 문하 세 사람 · 조목의 절교서 | 있음 | 없음 |
| 선조의 극찬 | 있음 | 없음 (대신 신흠의 말) |
| 『징비록』 | 없음 | 있음 —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덮었다 |
| 훈련도감 | 없음 | 있음 — 오늘날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
| 쫓겨난 배경 | 정인홍과의 불화 | 이산해·이경전의 모함 |
| 닫는 말 | 及是卒 — 이때 졸하였다 | 至今賴之 — 오늘날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첫째, 『징비록』은 짧은 쪽에만 있습니다. 873자를 다 읽어도 그 책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428자가 적었습니다. 그리고 좋게 적지 않았습니다.
knb_14005001_002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 원문 識者以其伐己而掩人譏之조선의 사관이 남긴 서평입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자기 말이 아닙니다. 식자(識者)들이 그랬다고 적었습니다.
둘째, 기축옥사가 통째로 빠졌습니다. 『선조실록』이 유성룡에게 씌운 가장 무거운 죄목 — 산림의 선비들이 죽어나가는데 한 사람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 — 이 『선조수정실록』에는 한 줄도 없습니다.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합니다. 빠졌다는 것은 세어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왜 빠졌는지는 실록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4편에서 확인한 것을 옆에 놓아둘 수는 있습니다. 기축옥사의 국문을 맡았던 사람은 정철이고, 『선조수정실록』은 그 정철에게 1,022자짜리 변론서를 써 준 실록입니다. 유성룡이 기축옥사 때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고 적으려면, 그 옥사가 사람을 죽인 옥사였다는 전제부터 세워야 합니다. 그 전제는 정철 쪽에 불리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말할 수 있는 데까지이고, 그다음은 짐작입니다.
닫는 문장
두 실록은 끝을 다르게 맺습니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끝납니다 — 임금이 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의원을 보냈고, 이때 죽었다. 及是卒.
『선조수정실록』은 이렇게 끝납니다 — 그가 물러난 뒤 그가 세운 방어책은 모두 폐지되었으나 훈련도감만은 남아 있고, 至今賴之, 오늘날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논죄로 60%를 채운 쪽이, 마지막 한 줄을 공적으로 닫았습니다.
—
서로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이 같은 원고를 따로 읽고 같은 자리에서 걸렸다면, 저는 저자에게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 그건 취향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두 실록은 같은 글자에서 돌아섰고 거의 같은 말을 골랐습니다. 다른 것은 그 말을 누구 이름으로 냈는가입니다. 한쪽은 남의 구원 상소에서 꺼내 인용부호 안에 넣고 다섯 글자로 승인했고, 다른 쪽은 자기 문장으로 본문에 썼습니다. 판정이 같아도 그 둘은 다른 글입니다. 이름을 걸지 않은 판정에는 반박할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
출처
1차 사료
-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13일 —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kna_14005013_004 - 『선조수정실록』 41권, 선조 40년(1607) 5월 1일 —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knb_14005001_002 - 『광해군일기』 중초본 22권 · 정초본 22권, 광해군 1년(1609) 10월 26일 — 좌찬성 정인홍이 올린 사직 차자
koa_10110026_004·kob_10110026_003.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되었습니다. - 한문 원문의 번역은 라이영이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센 값에 대하여
- 글자수(873자·428자)는 실록 원문 데이터의 문자열 길이이고, 사론 588자·본문 16자·수정실록 300자는 한자만 센 값입니다. 국역 기준이 아닙니다.
- 公孫弘의 등장 횟수는 같은 원문 데이터를 전수 검색한 값입니다. 27건 중 광해군일기 중초본·정초본의 중복 두 쌍을 제외해 25건으로 셌습니다.
- 公孫子는 실록 전체 2건이며, 중초본·정초본에 실린 같은 기사입니다. 별개 사건이 아니므로 스물다섯 건에 더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 원고생(轅固生)과 공손홍의 고사는 『한서』 유림전에 있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출전입니다.
- 인물 신상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성룡」 · 「징비록」 항목과 우리역사넷 「유성룡」 항목을 참조했습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6편. 다음은 정인홍입니다. 이번 편에서 유성룡을 공손홍이라 부른 사람이고, 두 해 뒤 같은 이름으로 자기 주위를 가리킨 사람이며, 열넷 해 뒤 반정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이 어느 실록에 어떻게 적혔는지는 아직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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