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5 · 최영경 — 죽음에 붙은 네 가지 표현

최영경의 죽음에 붙은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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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조선의 사관(史官)이 사람이 죽었을 때 남긴 한 줄짜리 인물평인 졸기(卒記)를 다룹니다. 실록 전체에 2,179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편에 다루는 인물에게는 그 졸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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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경(崔永慶)입니다. 지난 편에서 정철(鄭澈)의 졸기를 읽을 때 그 주석 안에서 계속 나오던 이름입니다. 정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묻는 자리에서 사관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이 이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졸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는 그의 죽음이 실록에 어떻게 적혔는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이 최영경의 죽음에 쓴 네 가지 표현. 졸(卒)은 끝내 쓰이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이 최영경의 죽음에 쓴 네 가지 표현. 졸(卒)은 끝내 쓰이지 않았다.

I. 이 사람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본관은 화순(和順)입니다. 서울에서 났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입니다.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초시(初試)에는 여러 번 붙었으나 복시(覆試)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뒤로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받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실록에서 그가 처음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 대목입니다. 1573년, 삼공(三公) 이하가 초야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자리에 조목(趙穆)·이지함(李之菡)·정인홍(鄭仁弘)·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이름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뒤, 이지함과 함께 사직했다는 기사가 이어집니다.

나가지 않은 것이 그의 이력입니다. 그래서 실록이 그를 부를 때 쓰는 말은 전 사축(前司畜) 또는 전 지평(前持平)입니다. 사축은 사축서(司畜署)의 종6품, 지평은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입니다.

한 가지 짚고 갑니다. 『선조실록』은 그를 사축이라 부르고 『선조수정실록』은 지평이라 부릅니다. 같은 사람의 마지막 관직을 두 실록이 다르게 적었습니다. 이 편에서 두 실록이 갈리는 첫 번째 지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지점은 아닙니다.

II. 이름이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1589년(선조 22)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터졌습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입니다.

국문(鞫問)이 시작되자 자백 속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길삼봉(吉三峯). 역모의 상장(上將)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에 관한 진술은 처음부터 어긋났습니다.

길삼봉에 관한 공초(供招)
나이 예순쯤 · 낯빛이 검고 몸이 비대함
나이 쉰쯤 · 수염이 배까지 드리움 · 키가 큼 · 말할 때마다 기침
상장이 아니라 졸병
이름이 길삼봉이 아니라 최삼봉(崔三峯)
조정은 지리산 일대를 수색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진술이 방향을 바꿨습니다. 길(吉)이 아니라 최(崔)라는 말이 나오자,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는 수색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최영경이 걸렸습니다. 전라감사 홍여순(洪汝諄)이 장계를 올렸고, 진사 양천경(梁千頃) 등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여러 역적의 공초 가운데 최영경의 생김새와 비슷한 대목만 골라 엮은 것이었습니다.

길삼봉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체가 없는 이름에 실재하는 사람을 맞춘 것입니다.

1590년 5월 2일, 사간원이 그의 관작을 삭탈하기를 청했습니다. 그 뒤 그는 옥에 갇혔고, 그해 9월 옥에서 죽었습니다.

III. 선조실록이 적지 않은 날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최영경이 걸리는 기사는 47건입니다. 시간순으로 놓으면 이렇게 됩니다.

『선조실록』 최영경 언급 기사 47건의 연도별 분포
1573215831159011590년 9월 · 옥사기사 없음1591415941416013160215+생전 4건 · 사후 43건. 그가 죽은 해에 남은 기사는 그를 벌하자는 것 하나뿐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로컬 색인 조회

1590년 5월 2일, 「전 사축 최영경이 역적과 친했다며 삭탈 관작을 청하다」.

그다음 최영경 기사는 1591년 8월 8일입니다. 「부제학 김성일(金誠一)이 조강에서 최영경이 원통하게 죽은 일을 아뢰다」.

그 사이가 비어 있습니다. 한글 색인이 놓친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고 한문 원문까지 훑었습니다. 1590년 9월 전후에 그의 이름이 든 기사는 없습니다. 『선조실록』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적지 않았습니다.

47건 가운데 생전 기사는 4건입니다. 나머지 43건은 사후의 것이고, 마지막 언급까지 12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43건의 제목을 보면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파직을 청하고, 삭탈 관작을 청하고, 국문을 청하고, 사직을 청합니다. 최영경의 죽음이 아니라 최영경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입니다.

『선조실록』에서 최영경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여야 공평합니다. 옥에서 죽었기 때문에 졸기를 못 쓴 것은 아닙니다. 실록에는 제목에 아예 「옥중 졸기」라고 달린 기사가 넷 있습니다.

1453년 『단종실록』 — 이석장(李石丈)의 옥중 졸기
1722년 『경종수정실록』 — 이홍술(李弘述)의 옥중 졸기
1722년 『경종수정실록』 — 김운택(金雲澤)의 옥중 졸기
1724년 『경종수정실록』 — 윤각(尹慤)의 옥중 졸기

넷뿐이고 셋이 한 실록에 몰려 있으니 흔한 형식은 아닙니다. 다만 최영경보다 137년 앞선 1453년에 이미 선례가 있었습니다.

옥에서 죽은 사람에게도 졸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최영경에게는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IV. 죽음에 붙은 네 가지 표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그의 죽음이 적혀 있습니다. 「최영경이 옥사하여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다」입니다.

그 대목을 옮깁니다.

그러던 중 영경이 병이 위독해져 죽자 정서 등은 모두 풀려났다. 사간원은 여전히 앞선 주장을 고수하며, 영경의 단서가 드러나 궁지에 몰려 죽었는데도 의금부의 감옥 관리가 당직을 제대로 서지 않아 갑자기 죽게 했으니 파직하라고 아뢰었고, 그대로 따랐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짧은 대목이지만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세 번이 다 다릅니다.

표현 원문 누구의 말인가 무엇을 함의하는가
몰(歿) 病劇而歿 사관의 서술 병으로 죽었다. 판단하지 않는다
자진(自盡) 理屈自盡 사간원 (1590) 궁지에 몰려 스스로 다했다 — 죄를 인정한 셈
경폐(徑斃) 以致徑斃 사간원 (1590) 갑자기 죽게 했다 — 관리의 과실 문제로
유사(瘐死) 終至瘐死 대사간 정광적 (1602) 옥에서 병들어 죽었다 — 억울한 죽음
졸(卒) 아무도 벼슬한 이의 죽음. 끝내 쓰이지 않았습니다

폐(斃) 는 쓰러져 죽는다는 뜻입니다. 사간원은 최영경의 죽음에 이 글자를 골랐고, 문장의 주어는 최영경이 아니라 옥을 지킨 관리입니다. 그가 왜 죽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관리를 잘못했느냐가 됩니다.

그리고 사간원은 같은 문장에서 그가 궁지에 몰려 스스로 다했다고 적었습니다. 죽음을 자백으로 바꾼 것입니다. 무죄를 다투다 죽은 사람을, 죄를 인정하고 죽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12년 뒤 대사간 정광적(鄭光績)이 쓴 글자는 유(瘐) 입니다. 옥에 갇힌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죽음에 다른 글자가 붙었고, 이번에는 억울함이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고, 그 죽음을 부르는 이름이 넷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어느 것도 졸(卒)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넷 중 하나를 세어봤습니다.

유사(瘐死)는 실록 41만 건에서 111번 쓰였습니다. 드문 말입니다. 그런데 그 111번이 고르게 흩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유사(瘐死) 111건은 어디에 몰려 있는가
최영경 사건 40건 · 36%구성 옥사 28건나머지 43건최영경 사건 — 1591~1611년, 20년에 걸쳐 40건구성(具宬) 옥사 — 1604~1607년, 4년에 걸쳐 28건나머지 43건이 태조에서 순종까지 500년에 흩어져 있습니다.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한문 원문 전수 조회

실록 500년에서 이 말이 쓰인 세 번 중 한 번은 최영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가 중요합니다. 최영경이 죽은 1590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1591년 8월 8일, 부제학 김성일이 경연에서 처음 씁니다. 죽고 나서 열한 달 뒤입니다. 그 뒤로 20년 동안 반복됩니다.

유사는 이 사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고르는 것 자체가 입장 표명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려 스스로 다했다고 할 것인가, 옥에서 병들어 죽었다고 할 것인가.

V. 열일곱 해 사이에 바뀐 말

같은 기사는 죽음을 적은 뒤 곧바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로 넘어갑니다.

영경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행실이 독실했다. 조식을 존경하고 정인홍과 뜻을 함께했으며, 서로 칭찬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영남에 자리 잡은 뒤에는 많은 선비가 그를 우러러 따랐다. 조정에서도 그의 논의를 바탕으로 인물을 천거하고 물리쳤으므로 기세가 매우 컸고, 그의 집에는 찾아오는 이가 시장처럼 많았다. 영경은 의리를 중시하고 남의 잘잘못을 논하기 좋아했으며, 당론이 치우쳐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이것은 졸기입니다. 제목에 졸기라는 말이 없고 제 데이터베이스도 잡아내지 못하지만, 하는 일은 졸기와 똑같습니다. 죽음을 적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적고, 칭찬과 흠을 함께 놓습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에는 이 사람에 대한 인물평이 한 번 더 있습니다.

선조 6년(1573) 5월 조에 「최영경의 인품」이라는 제목의 독립 기사가 있습니다. 그가 마흔다섯 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최영경은 처음 한성에 살 때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을 기울여 장례 비용을 마련하고 석곽으로 장사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더디고 고집스럽다며 중히 여기지 않았다. (…) 얼마 뒤 진주로 물러나 조식을 따라 학문을 닦았으며,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고 토론을 좋아했다. 조식은 그를 인홍 다음으로 대우했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1573) 5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두 글을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같은 실록이 같은 사람을 열일곱 해 간격으로 두 번 평했습니다. 그리고 평하는 항목이 정확히 같습니다.

평한 항목 1573년 · 살아 있을 때 1590년 · 죽은 뒤
사람됨의 바탕 사친지효(事親至孝)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효우독행(孝友篤行)
효성과 우애, 독실한 행실
기질 상기절(尙氣節)
기개와 절의를 숭상
상기의(尙氣誼)
의리를 중시
말하는 태도 호의론(好議論)
토론을 좋아함
호장부(好臧否)
남의 잘잘못 논하기를 좋아함
미움받은 이유 우요(迂拗)
마을 사람들이 더디고 고집스럽다며
당론편벽(黨論偏僻)
당론이 치우쳐 미워하는 이도 많았다

아래 두 줄을 보아 주십시오.

의론(議論)이 장부(臧否)가 되었습니다. 의론은 논의하는 것입니다. 장부는 남의 좋고 나쁨을 가려 매기는 것입니다. 같은 성향을 가리키는데, 앞은 중립이고 뒤는 흠입니다.

우요(迂拗)가 당론편벽(黨論偏僻)이 되었습니다. 우요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고 한 말입니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집스럽다는 뜻으로, 성격에 대한 평입니다. 당론편벽은 다릅니다. 붕당의 논의에 치우쳤다는 것이고, 이것은 정치적 판정입니다.

열일곱 해 사이에 성격이 정치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기축옥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나누겠습니다. 두 기사는 편찬 시점이 같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1657년에 완성됐으므로, 1573년 기사도 1590년 기사도 같은 편찬자가 같은 시기에 썼습니다. 열일곱 해에 걸쳐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한 편찬자가 한 사람의 생애를 앞뒤로 나누어 다르게 적은 것입니다. 앞은 세상에 알려지기 전의 그이고, 뒤는 죽은 뒤의 그입니다.

VI. 제가 세지 않고 있던 말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제 도구가 걸렸습니다.

저는 졸기에 쓰인 인물평 어휘를 세는 사전을 따로 만들어 두고 매 편 돌립니다. 청백(淸白)·관후(寬厚) 같은 칭찬어와 탐비(貪鄙)·간사(奸邪) 같은 폄하어를 목록으로 갖고 있다가 졸기 2,179건 전체에서 몇 번 나오는지 세는 것입니다.

그 사전에 효우(孝友)도 독행(篤行)도 편벽(偏僻)도 장부(臧否)도 없었습니다. 최영경을 평한 말이 하나도 등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짐작이 갔습니다.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 벼슬로 평할 말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렴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붙는 말입니다. 나가지 않은 사람에게 사관이 남길 것은 집안에서의 행실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처신뿐입니다.

짐작에서 그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효행 갈래를 넣고 다시 돌렸습니다.

졸기 2,179건 · 칭찬 어휘 상위 두 개
효우(孝友) — 효성과 우애  41회
청백(淸白) — 청렴결백  40회
한 회 차이로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1편에서 저는 청백이 졸기 전체의 최다 칭찬어라고 썼습니다. 사관이 가장 많이 쓴 칭찬의 말인데 정작 청백리의 대명사인 이이(李珥)의 졸기에는 한 번도 안 나온다 — 그것이 1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청백은 최다 칭찬어가 아니었습니다. 제 사전에 효행 갈래가 없어서 세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청백은 청렴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것이고, 전체 1위는 효우입니다.

1편의 논지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이의 졸기에 청백이 없다는 사실도, 청백이 청렴 계열 최다라는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최다” 라는 수식입니다. 다만 그 한 마디가 틀린 채로 넉 달을 갔습니다.

그리고 왜 틀렸는지가 이번 편의 이야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제 사전은 관직에 있던 사람을 평하는 말로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의 사관이 그렇게만 쓴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만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졸기를 읽고서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 그 통계에 없습니다

사전을 고쳤으니 최영경을 평한 말도 이제 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벽(偏僻)과 우요(迂拗)를 넣고 돌려봤습니다.

둘 다 0회였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제 집계는 `졸기` 테이블에 든 2,179건만 셉니다. 그리고 그 테이블은 기사 제목에 ‘졸기’라는 말이 든 것만 담습니다. 최영경의 인물평은 「최영경이 옥사하여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다」라는 제목 아래 있습니다.

III절에서 확인한 것이 여기서 되돌아옵니다. 조선의 사관이 그를 졸기 형식으로 적지 않았고, 사백 년 뒤에 제가 만든 도구도 같은 이유로 그를 빠뜨립니다. 분류에서 빠진 사람은 계속 빠집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제목이 졸기가 아니어도 실질이 졸기인 기사를 따로 올리면 됩니다. 다음 편부터 반영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이 편에서는, 최영경이 통계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어두는 편이 정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VII. 목을 긋는 손

같은 기사가 이어서 놓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편에서 제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대목입니다.

그는 일찍이 박순과 정철은 모두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정철은 국청에서 영경의 공초를 받은 뒤 물러나 그를 풀어 주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자기 목을 그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늘 나를 이렇게 처벌하려 했소. 나는 군자인데, 오늘에 이르러 어찌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류성룡이 말하였다.

“이것은 농담으로 할 말이 아닙니다.”

정철이 말하였다.

“그렇소, 그렇소. 다만 훗날 이 말을 증거로 삼고자 할 뿐이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선조수정실록』은 서인(西人)이 편찬했고 정철은 서인의 영수입니다. 자기 진영의 실록이 자기 진영 영수의 이 장면을 적었습니다.

기사는 이어서 정철이 이항복(李恒福)과 상의해 최영경을 구제하는 차자를 초안했다고 적습니다. 다만 최영경이 풀려났으므로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닫습니다.

그러나 영경의 옥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여겨 말하였다. “정철은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구제하려 한 것이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변호하는 실록이 변호를 완성하지 않습니다. 차자를 썼다는 사실을 적고, 세상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을 그대로 뒤에 붙였습니다.

지난 편에서 저는 『선조수정실록』이 정철을 어떻게 감쌌는지를 봤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감싸다 만 자리를 봅니다. 실록은 그를 완전히 건져내지 않았습니다.

VIII. 구원하지 않은 죄

이 절은 원래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그것부터 밝히겠습니다.

저는 2차 자료에서 『선조수정실록』이 정철의 행위를 역구(力救) — 힘써 구원했다 — 로 적었다는 서술을 봤습니다. 지난 편에서 병국권(秉國權)이 실록 41만 건 중 단 한 번이었던 것과 짝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규탄에는 유일한 말, 변호에는 흔한 말.

세어봤습니다. 역구는 실록 전체에 226회입니다. 흔한 말인 것은 맞았습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으로 좁히니 열한 건이 나왔고, 그중에 최영경 기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 전제가 틀렸습니다. 원문을 열어보니 실록이 정철에게 쓴 말은 역구가 아니라 구해(救解) 였습니다. 풀어 준다는 뜻입니다. 차자를 초안한 대목에는 신구(伸救) 를 썼습니다. 펴서 구한다는 뜻입니다. 구해도 세어봤습니다. 480회입니다. 역구보다 두 배 넘게 흔합니다.

여기까지 세고 나니 지난 편과 이번 편의 어휘가 한 표에 들어왔습니다.

쓰인 자리 실록 전체
병국권(秉國權) 정철을 규탄하며 (4편) 1회
구해(救解) 정철이 풀어 주려 했다며 480회
역구(力救) 성혼이 힘써 구하지 않았다며 226회
유사(瘐死) 최영경의 죽음을 가리키며 111회 (36%가 이 사건)

규탄에는 실록에 하나뿐인 말을 골랐고, 변호에는 480번 쓰인 상투어를 썼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읽을지는 조심스럽습니다. 고심해서 고른 말과 손에 익은 말의 차이일 수도 있고, 규탄이 변호보다 언제나 더 많은 어휘를 요구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셀 수 있는 것은 빈도까지입니다.

그러면 역구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1602년 2월 7일, 최영경이 죽은 지 열두 해가 지난 뒤입니다. 대사간 정광적과 사간 강첨(姜籤) 등이 아뢰었습니다.

성혼에 이르러서는 당시 큰 명성을 지녔고 정철과 가장 가까웠으니, 정철의 속셈을 성혼이 모를 리 없습니다. 영경이 죽을 때 성혼이 힘써 구했다면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은 분명한데도, 팔짱만 끼고 바라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구하지 않았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 2월 7일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힘써 구했다면” — 여기가 역구(力救)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정철을 변호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혼(成渾)을 규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혼(成渾, 1535~1598)이 누구인지는 앞에서 읽은 1573년 기사에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줄임표로 넘긴 대목입니다. 이제 그 부분을 채웁니다.

선비 안민학이 그의 남다름을 살펴 성혼에게 말하니, 성혼이 찾아가 그의 맑고 엄정한 용모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뜻이 맞았다. 이 소문이 공경대부들 사이에 퍼지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1573) 5월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최영경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성혼입니다. 문을 닫고 살아 아는 사람이 없던 이를 찾아가 만났고, 뜻이 맞았고, 그 말이 공경대부들 사이에 퍼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1573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열일곱 해 뒤, 그 이름 때문에 그는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됩니다.

그리고 최영경이 옥에 갇혀 있던 그때, 성혼은 조정에 있었습니다. 관직 이력을 보면 1589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종2품), 1590년 동지(同知)입니다. 대간이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목은 최영경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계사에서 대간은 곧바로 스스로를 제어합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죄를 정하는 법도는 반드시 근거가 될 만한 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지금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죽음을 꾸며냈다는 죄명을 씌운다면, 사실에 따라 형률을 정하는 왕도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신들은 재국을 청한 대간만 논하고 성혼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 2월 7일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근거가 될 만한 자취(可據之迹)를 따라야 한다. 구하지 않은 것과 죽인 것은 다르다. 그러니 성혼은 논하지 않았다.

기축옥사가 무고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 뒤처리에서는 증거 없이 죄를 씌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편에서 가장 단단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자제를 나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IX. 임금이 그린 장면

선조가 답했습니다.

최영경은 정철을 본성이 간악한 소인이라고 지목하였다. 정철은 이를 갈고 입술을 움직이며 으르렁대듯 곁에서 엿보면서 하루도 마음에 잊은 적이 없었다. 역옥이 일어나자 정철은 손뼉을 치며 날뛰었다. (…) 영경이 죽던 날 정철은 반드시 술자리를 크게 열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꾸민 음험하고 흉악한 계책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 2월 7일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반드시(必). 임금은 이 글자를 두 번 씁니다. 술자리를 반드시 열었을 것이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는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목격이 아니라 상상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대간은 근거가 될 만한 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임금은 상상한 장면으로 답합니다.

그렇다면 성혼은 곧 정철의 분신이다. 정철 하나가 이미 죄를 받았다고 해서 또 다른 정철이 없겠는가?
—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 2월 7일 ·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김

임금은 성혼에게 살인의 형률을 씌우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분신(分身)이라는 말을 이미 놓았습니다. 그해 윤2월, 성혼의 관작이 삭탈됩니다.

성혼은 그때 이미 세상에 없었습니다. 1598년에 죽었으니 네 해 전입니다. 최영경이 죽고 열두 해, 성혼이 죽고 네 해가 지난 자리에서 두 사람의 일이 정리됐습니다. 둘 다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겠습니다.

셀 수 있는 것: 대간이 증거의 한계를 들어 성혼을 논하지 않았다는 것. 임금이 목격하지 않은 장면을 반드시라는 말과 함께 서술했다는 것. 그 뒤 성혼의 관작이 삭탈됐다는 것.

셀 수 없는 것: 정철이 그날 술자리를 열었는지. 성혼이 정말 힘쓰지 않았는지. 실록은 앞의 것을 임금의 말로 남겼고, 뒤의 것을 대간의 말로 남겼습니다. 둘 다 판정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말했다는 기록입니다.

X. 편집장의 메모

편집장의 메모

교정지에서 저는 같은 것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말에 표시를 해 둡니다. 저자가 어떤 대목에서는 사망이라 쓰고 어떤 대목에서는 별세라 쓰고 또 어디서는 사망하셨다고 쓸 때, 그것은 대개 문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저자가 아직 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최영경의 죽음에는 네 개의 말이 붙었습니다. 사관은 몰(歿)이라 적었고, 그를 죄인으로 본 사람들은 자진(自盡)과 경폐(徑斃)를 썼고, 열두 해 뒤에 그를 되찾으려던 사람은 유사(瘐死)를 썼습니다. 졸(卒)은 끝내 아무도 쓰지 않았습니다.

편집자라면 통일했을 것입니다. 표기를 하나로 맞추고 나머지를 지웠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읽기는 편해지고, 이 사람의 죽음을 두고 십수 년을 다퉜다는 사실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고르지 않은 표기가 그 다툼의 유일한 물증입니다.

그리고 넷 중 하나는 끝내 이겼습니다. 유사(瘐死)는 실록 오백 년에 백열한 번 쓰였는데 그 세 번 중 한 번이 이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관이 특별한 말을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스무 해 동안 반복해서 쓴 사람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한 단어를 끈질기게 고쳐 쓰는 일이 무엇을 바꾸는지, 저는 이 숫자를 세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한 가지가 더 남습니다. 이 편에서 저는 넉 달 동안 틀린 채로 써온 문장 하나를 고쳤습니다. 고칠 수 있었던 것은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관직자만 읽는 동안에는 제 목록이 관직자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교정지에서도 그렇습니다. 같은 종류의 원고만 보면 자기 눈에 뭐가 빠져 있는지 끝내 모릅니다.

출처 · 직접 번역해 인용한 기사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1일 — 최영경이 옥사하여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다 · 원문 보기

『선조수정실록』 선조 6년(1573) 5월 1일 — 최영경의 인품 · 원문 보기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 2월 7일 — 대사간 정광적 등이 최영경의 일에 대한 성혼의 죄를 아뢰다 · 원문 보기

제목과 서지사항만 확인한 기사 (본문에 인용문 없음)

『선조수정실록』 선조 23년(1590) 6월 1일 — 전 지평 최영경을 하옥하다 · 원문 보기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6월 25일 — 이석장의 옥중 졸기 · 원문 보기

『경종수정실록』 경종 2년(1722) 5월 7일 — 이홍술의 옥중 졸기 · 원문 보기

『경종수정실록』 경종 2년(1722) 12월 3일 — 원임 부제학 김운택의 옥중 졸기 · 원문 보기

『경종수정실록』 경종 4년(1724) 1월 10일 — 윤각의 옥중 졸기 · 원문 보기

인용문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기사 건수와 어휘 빈도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를 로컬 색인으로 만들어 직접 세었습니다.

성혼(1535~1598)의 생몰년과 관직 이력은 실록 부가정보 인물 데이터에서 확인했습니다.

II절의 길삼봉 관련 진술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길삼봉」 항목과 하옥 기사 국역에서 사실만 취해 새로 서술했습니다. 원문 인용은 없습니다.

인물 신상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영경」 항목을 참조했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5편. 다음은 유성룡입니다. 이번 편에서 정철에게 “농담으로 할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그 사람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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