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의 이이(李珥)는 부고가 아홉 자였습니다. 사관이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기로 해서 짧았습니다.
황희(黃喜)는 정반대입니다. 황희 졸기는 1,809자입니다. 문종실록에 실린 부고 열여섯 편 가운데 가장 깁니다. 그런데 그 1,809자에도 담기지 않은 기록이 따로 있었고, 그것을 지울 것인가를 두고 아홉 사람이 모여 다퉜습니다. 그 회의록까지 실록에 남았습니다.
I. 이 사람
황희(黃喜), 1363~1452년.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입니다.
재상으로 24년을 지냈고, 죽을 때 아흔이었습니다. 실록 전체에서 황희가 등장하는 기사는 1,305건입니다.
졸기는 시호를 그렇게 지은 까닭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생각이 깊고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 익(翼), 재상으로서 끝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성(成)입니다. 익성이라는 두 글자는 ‘멀리 내다보고 일을 잘 마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II. 문종실록에서 가장 긴 부고
문종실록에 실린 졸기는 모두 16편입니다. 황희 졸기가 1,809자로 가장 길고, 가장 짧은 졸기는 14자입니다.
이 분량이 곧 평가는 아닙니다. 오래 살고, 오래 벼슬한 사람은 적을 것이 많아집니다. 황희는 장수했고, 벼슬도 오래 했습니다.
여기서 1,809자는 헤아린 값입니다. 그러나 왜 이만큼 길어졌는지는 실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은 읽는 사람의 해석입니다.
III. 한 편의 부고 안에 든 두 개의 평가
황희 졸기는 칭찬으로 시작해서 비난으로 넘어갑니다. 끝에 한 줄 붙인 정도가 아니라, 두 평가가 각각 꽤 깁니다.
앞쪽에서 사관은 이렇게 씁니다.
喜寬厚沈重, 有宰相識度, 豐姿魁偉, 聰明絶人。 治家儉素, 喜怒不形 황희는 너그럽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무거워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풍채가 크고 뛰어났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을 검소하게 다스렸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2월 8일
그리고 못을 박습니다. 재상으로 지냈던 24년 동안 조정 안팎이 우러러보며 모두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고. “늙어서도 기력은 굳세고 건강하였으며, 얼굴은 붉고 머리는 희어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다”고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문단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신선 같았고 세상이 송나라의 명재상 문언박(文彦博)에 견주었다는 문장 바로 뒤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然性過於寬, 短於齊家, 乏廉介之操, 久典政柄, 頗有簠簋之誚。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너그러워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부족하였고, 청렴하고 절조 있는 지조가 모자랐다. 오랫동안 정권을 맡아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았다.— 같은 기사
모두가 어질다고 했다는 문장과, 비난이 적지 않았다는 문장이 한 문서 안에 있습니다. 둘 다 “사람들이 그랬다”는 형식입니다. 어느 쪽이 그 사람들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IV. 사관은 ‘뇌물’이라 쓰지 않고 제사 그릇을 빌렸다
부정을 가리킨 대목에는 뇌물이라는 말도, 부정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사 그릇 이름이 나옵니다.
앞에서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이라고 옮긴 대목의 원문은 파유보궤지초(頗有簠簋之誚) 입니다. 보(簠)와 궤(簋)는 제사 때 곡식을 담는 그릇이고, 초(誚)는 꾸짖음입니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제사 그릇에 대한 꾸짖음이 있었다”가 됩니다.
말풀이
보궤(簠簋) · 나라 제사에 쓰는 두 가지 그릇입니다. 보는 네모나고 궤는 둥근데 둘 다 곡식을 담습니다. 나라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자리에 쓰는 기물이라, 관리가 이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 공적인 자리를 더럽혔다는 뜻으로 통했습니다.
완곡어 ·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는 표현입니다. 듣는 쪽을 봐주려 할 때도 쓰고, 말하는 쪽이 책임을 덜려 할 때도 씁니다.
이 표현은 사관이 그 자리에서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출전이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의 신하 가의(賈誼)가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古者大臣有坐不廉而廢者, 不謂不廉, 曰 ‘簠簋不飾’. 옛날에 대신이 청렴하지 못한 죄로 쫓겨날 때에는 청렴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 “보궤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서(漢書)』 가의전
가의는 같은 방식의 표현을 세 벌로 제시합니다. 부정을 저지른 대신에게는 보궤불식(簠簋不飾), 남녀 관계가 문란한 대신에게는 유박불수(帷薄不脩, 휘장을 손보지 않았다), 무능한 대신에게는 하관부직(下官不職, 아랫사람이 직분을 못한다)이라 했습니다.
왜 돌려 말했는가. 가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서민에게는 예의를 따지지 않고, 대부(大夫)에게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높은 신하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다. 죄가 분명해도 그 죄를 곧이곧대로 부르지 않는 것이 대신을 대하는 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궤는 사관이 떠올린 비유가 아니라 1,600년쯤 묵은 관용 표현이자, 대신을 예우하는 공식 어법입니다. 사관은 황희를 비난하면서도 그 비난을 대신용 규격에 맞춰 넣었습니다.
세 벌의 완곡어는 조선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실록 전체를 헤아려 보면 세 표현의 쓰임새가 서로 다릅니다.
보궤(簠簋)는 130건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제사 절차를 적은 문서입니다.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무엇을 어떻게 늘어놓을지 정하는 기사에서 그릇 이름 그대로 쓰인 것입니다. 사람을 꾸짖는 뜻으로 쓰인 것은 탄핵 상소와 인물평에 몰려 있습니다.
유박(帷薄)은 40건인데 성격이 다릅니다. 거의 모두 누군가의 행실을 문제 삼는 기사, 곧 탄핵과 사법 관련 기사입니다. 그릇은 제사 문서에 나올 일이 있지만 휘장은 그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관부직(下官不職)은 4건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직접 이 어법을 입에 올린 기록이 있습니다.
성종 5년(1474) 8월 21일 저녁 경연이었습니다.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형벌은 받지 않는다는 대목을 읽던 중에 성종이 말합니다.
今云, 大臣有罪, 不指斥而曰: ‘簠簋不飾’, 曰: ‘帷薄不修’, 日者憲府疏云: ‘旱乾之咎, 正坐此輩爲之祟也’, 予以是言爲過也。 “지금 이르기를,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곧바로 지목해 배척하지 않고 ‘보궤불식’이라 하고 ‘유박불수’라 한다고 한다. 지난번 사헌부의 상소에 ‘가뭄의 재앙은 바로 이 무리들이 빌미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이 지나치다고 본다.”— 『성종실록』 성종 5년(1474) 8월 21일
성종은 에둘러 말하는 어법을 당연한 전제로 놓고, 오히려 직설적으로 몰아붙인 사헌부 쪽을 지나치다고 했습니다. 황희 졸기가 쓰인 지 스물두 해 뒤의 일입니다. 사관이 보궤를 꺼낸 것이 그 사람의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한 장면이 보여 줍니다.
말풀이
경연(經筵) ·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던 자리입니다. 하루에 여러 차례 열렸고, 저녁에 여는 것을 석강(夕講)이라 했습니다. 공부하는 자리이면서 정치를 의논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사헌부(司憲府) · 관리의 잘못을 조사하고 탄핵하는 관청입니다. 우두머리가 대사헌입니다.
지난 편을 떠올려 보십시오. 실록 전체 졸기 2,179건에서 칭찬어인 청백(淸白)은 40번이나 쓰였는데, 청백리 이이의 졸기에는 ‘청백’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울에 집이 없고 곳간이 비었다는 장면을 보여줬습니다.
V. 사관이 댄 근거는 셋, 모두 가족 문제였다
비난만 적고 끝냈다면 소문에 그쳤을 것입니다. 사관은 근거를 셋 댔습니다.
처남. 처남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자, 황희는 떠도는 말에서 나온 일이라고 글을 올려 그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아들. 아들 황치신(黃致身)이 나라에 몰수당한 과전을 다른 땅으로 바꾸어 받게 해 달라고 글을 올려 청했습니다.
황중생. 황중생(黃仲生)이라는 사람을 서자로 삼아 집에 드나들게 했는데, 중생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자 그제야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성을 조(趙)로 바꿔 버렸습니다.
말풀이
과전(科田) · 벼슬아치에게 나누어 준 땅입니다. 정확히는 그 땅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준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 권리를 거두어들였습니다.
서자(庶子) · 정식 부인이 아닌 여자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조선에서는 서자에게 벼슬길을 제한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신분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사관은 이 대목을 이 한 줄로 닫습니다.
人多惜之。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해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2년(1452) 2월 8일
애석하다는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황희가 안됐다는 뜻인지, 황희 같은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 안됐다는 뜻인지 문장만으로는 갈리지 않습니다.
VI. 같은 사관이 적어 둔 다른 장면
비난을 적은 그 사관은, 같은 문서 안에 정반대 장면도 여럿 적어 두었습니다.
옥사를 다룰 때 황희는 너그러움을 앞세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졸기는 적었습니다.
寧失於輕, 不可枉刑。 차라리 형벌을 가볍게 하여 잘못할지언정, 억울하게 형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같은 기사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雖老手不釋卷, 常互閉一眼, 以養目力, 雖細字亦讀之不憚。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늘 두 눈을 번갈아 한쪽씩 감아 시력을 보전하였다. 글자가 아무리 작아도 꺼리지 않고 읽었다.— 같은 기사
죽기 전에 자손에게 남긴 글도 실렸습니다. 장례는 『가례(家禮)』대로 하되 이 땅에서 하기 어려운 것은 억지로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형편에 맞게 하라고 했고, 불교식 의례는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이 한 줄을 남겼습니다.
虛文之事, 一切勿行。 형식만 갖추는 헛된 일은 일절 시행하지 말라.— 같은 기사
말풀이
『가례(家禮)』 ·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가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예법서입니다. 관례·혼례·상례·제례의 절차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 사대부 집안의 장례와 제사는 이 책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장례 장면이 이어집니다. 황희가 죽자 조회를 사흘 멈추고 나라에서 장례를 마련했습니다. 조선에서 이것은 신하에게 주는 가장 높은 등급의 예우입니다.
吏胥及諸司僕隷, 皆設奠以祭, 前古所無也。 관리와 아전, 여러 관청의 하인들까지 모두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같은 기사
전에 없던 일이라고 사관이 직접 적었습니다. 관청의 하인은 봉급이 넉넉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 돈을 들여 제사를 지냈다는 장면을, 재물을 탐한다는 비난을 적은 바로 그 사관이 함께 적었습니다.
이 부고는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어긋나는 재료를 나란히 놓고 끝냅니다.
VII. 졸기 맨 끝에 적힌 세 사람의 이름
부고는 인물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몇 줄에 이름 셋이 나옵니다. 이 이름들이 다섯 달 뒤에 다시 나옵니다.
황희가 죽고 닷새 뒤, 임금이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을 보내 의정부에 물었습니다. 황희를 세종의 묘정에 배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답한 사람이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 허후(許詡) 입니다. 황희는 재상을 스무 해 넘게 지냈고 전쟁의 공은 없으나 임금을 도와 이룬 공이 매우 크며 대신의 체모를 갖추었으니, 선왕에게 배향해도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따로 실린 기사가 아니라 황희 졸기에 있습니다. 비리를 적은 문장과 배향을 찬성한 세 사람의 이름이 같은 문서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풀이
배향(配享) · 임금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공이 큰 신하의 신주를 함께 모시는 일입니다.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였고, 한 임금에게 몇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묘정(廟庭) · 임금의 신주를 모신 사당의 뜰입니다. 여기서는 세종을 모신 사당을 가리킵니다.
도승지(都承旨) · 임금의 명령을 신하에게 전하고 신하의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는 승정원의 우두머리입니다.
VIII. 1428년 — 사직 상소 뒤에 붙은 고발
졸기보다 훨씬 센 기록이 실록에 따로 있습니다. 황희가 살아 있던 시절 기사 끝에 붙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6월 25일 첫 기사는 좌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한 일을 적고 있습니다. 황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今被浮言之劾, 幸賴日月之明, 辨白誣妄, 少釋群疑 이제 근거 없는 말로 탄핵까지 받았으나 다행히 해와 달처럼 밝으신 전하께서 거짓된 무고를 밝혀 주셔서 여러 사람의 의심이 조금 풀렸습니다. 臣雖貪昧, 豈以得免贓汚之名, 自慊於心, 而靦面周行, 叨居具瞻之地哉? 신이 아무리 어리석고 탐욕스럽다 한들, 장물죄를 저질렀다는 오명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스스로 만족하여 뻔뻔하게 조정에 얼굴을 내밀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자리를 어찌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6월 25일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고, 황희는 다시 나아가 물러났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벼슬자리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기사의 본문입니다.
그런데 기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관 이호문(李好問)이 쓴 글이 그 뒤에 이어집니다. 형식은 기사에 덧붙인 사관의 기록인데, 내용은 고발장에 가깝습니다.
이호문이 적은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하나 · 출생
황희는 판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黃君瑞)의 서자였다.
둘 · 황금 대사헌
김익정(金益精)과 잇달아 대사헌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승려 설우(雪牛)에게서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렀다.
셋 · 박포의 아내
반역죄로 처형된 박포(朴苞)의 아내가 자기 종과 간통하다가, 그 사실을 안 종을 죽여 연못에 빠뜨렸다. 시신이 떠올라 조사가 시작되자 서울로 달아나 황희의 집 북쪽 뜰 토굴에 여러 해 숨어 지냈고, 그동안 황희가 그 여자와 간통했다.
넷 · 노비
장인에게서 물려받은 노비는 세 명뿐이고 아버지에게 받은 것도 많지 않은데, 집 안에서 부리는 노비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노비는 매우 많다.
다섯 · 매관매직
황희는 여러 해 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벼슬을 팔고 송사를 거래하였다. (…) 그러나 그의 마음가짐은 바르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몰래 그 사람을 해치기도 하였다.
세로줄이 붙은 대목은 사초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나머지는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말풀이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우두머리입니다. 사헌부는 관리의 잘못을 조사하고 탄핵하는 관청이었습니다. 부정을 감시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금을 받았다는 것이 「황금 대사헌」이라는 별명의 뼈대입니다.
매관매직(賣官賣職) · 벼슬자리를 돈이나 물건을 받고 파는 것입니다.
공초(供招) · 죄를 조사받는 사람이 한 진술입니다. 그 진술을 받아 적은 문서도 공초라고 합니다.
한 기사 안에서 두 진술이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이호문은 마지막에 황희가 사직 상소를 올린 원인이기도 한 박용(朴龍)의 아내 사건을 꺼냅니다. 박용의 아내가 말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이 본래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겨 의금부가 그 뜻을 받들어 조사했고, 그 바람에 사헌부 관리들이 사실과 다르게 죄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일부는 좌천되고 일부는 자리가 바뀌었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황희 본인은 “근거 없는 말”이라 하고 임금이 무고를 밝혀 주었다고 했습니다. 황희는 사직 상소에서 자기 때문에 사헌부에까지 누가 미쳤다고, 그것이 부끄럽다고도 했습니다.
한쪽은 자기가 무고를 벗었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무고가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그 둘이 한 기사 안에 나란히 있습니다. 실록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지 않습니다.
IX. 1452년 7월 — 아홉 사람이 모였다
황희가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나서 24년 뒤, 이 사초를 지울 것인가를 두고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록이 실록에 남았습니다.
황희가 죽고 다섯 달 뒤였습니다. 조정은 『세종실록』을 만들려고 세종 때 사관들이 남긴 사초를 모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편찬을 지휘하던 지춘추관사 정인지(鄭麟趾)가 이호문의 사초를 발견합니다.
모인 사람은 정인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허후, 김조(金銚), 이계전(李季甸), 정창손(鄭昌孫), 신석조(辛碩祖), 최항(崔恒) 아홉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록을 정리하는 기주관으로 성삼문(成三問)과 이예(李芮)가 있었습니다.
말풀이
춘추관(春秋館) ·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실록을 만드는 일을 맡은 관청입니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 춘추관의 높은 직책으로, 실록 편찬을 지휘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관직을 가진 사람이 겸해서 맡았습니다.
기주관(記注官) · 실록 편찬에서 기록을 정리하고 옮겨 적는 실무 직책입니다. 이날 성삼문이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직필(直筆) ·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굽히지 않고 쓰는 것입니다. 사관에게 요구된 첫째 덕목이었습니다.
정인지가 먼저 말합니다.
此非吾所聞, 似過情不根, 當僉議乃定。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정하여야겠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검증이 조목별로 진행됩니다. 인정된 것은 첫째 조목뿐입니다. 황희가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말은 전부터 있었고 황희 본인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들은 바가 없다고 합니다.
허후가 조목을 하나씩 반박합니다. 노비 문제는 처가가 이름 있는 집안이니 노비가 없었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금 대사헌 대목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적어 놓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여덟아홉 사람 중 어째서 한 명도 들어 본 적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별명이 돌았다면 그 별명을 들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소문의 존재를 소문의 흔적으로 검증한 셈입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는 것도 밝힙니다. 그러면서 이호문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삭제하자고 합니다.
김종서도 거듭니다. 박포의 아내 일은 안방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이라 알기 어렵겠지만 나머지는 세상에 퍼졌을 텐데 왜 아무도 모르느냐고 합니다. 김익정은 자기 재종형인데 청렴을 지킨 사람이니 사헌부의 우두머리로서 남의 뇌물을 받았을 리는 결단코 없다고도 합니다.
정인지는 다른 근거를 댑니다. 세종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대들도 사신이니 다 아는 일은 뒤에 적어 넣어도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찬을 감독하는 대신이 훤히 아는 일을 쓰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근거 없음을 알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찌 직필이라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내린 말이 이렇습니다.
古今一揆, 史筆不可盡信, 類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같은 기사
사관들이 사관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 문장 또한 기록되어 실록에 들어갔습니다.
회의록의 요약과 사초의 실제 문면이 조금 다릅니다
작은 대목이지만 적어 둘 만합니다. 허후는 반박하면서 이호문이 “재물이 거만(鉅萬)에 이르렀다”고 썼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세종실록에 실린 사초 원문에는 벼슬과 송사를 팔았다는 말은 있어도 거만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반박하는 쪽이 상대의 주장을 조금 더 세게 옮긴 것입니다. 지우자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회의록만 읽고 사초에 뭐라 적혀 있었는지 짐작하면 어긋난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X. 그 방에서 아무도 밝히지 않은 것
이 회의에는 눈여겨볼 규범이 하나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자기와 관련 인물의 관계를 스스로 밝힙니다.
허후는 이호문이 자기 친척이라고 말한 뒤에 그의 사람됨을 평가했습니다. 김종서는 김익정이 자기 재종형이라고 말한 뒤에 그가 뇌물을 받았을 리 없다고 했습니다. 판단을 내놓기 전에 자기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인지를 먼저 대는 것, 이것은 이해관계를 미리 알리는 절차입니다. 그들은 그 절차를 알고 있었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밝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다섯 달 전, 황희를 세종의 사당에 배향하자는 데 찬성한 사람이 김종서, 정분, 허후였습니다. 그 이름은 황희 졸기 본문에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다섯 달 뒤, 황희의 비리 기록을 지우자고 앞장선 사람이 허후와 김종서입니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황희를 세종의 사당에 모셔야 한다고 공언한 처지였습니다. 그 기록이 사실로 굳으면 자기들이 올린 배향 건의가 흔들립니다. 판정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판정 대상에 이해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친척 관계는 밝히면서, 다섯 달 전 자신들이 황희를 사당에 모시자고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회의록 어디에도 그 말은 없습니다.
이호문의 기록이 근거 없다는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홉 사람이 아무도 들은 적 없다는 진술에는 무게가 있고, 곧 나올 성삼문의 관찰은 오히려 그들 편을 듭니다. 다만 검증의 형식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마저 기록에 남아, 우리가 지금 그것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XI. 종이 색깔, 그리고 그날 지워진 한 줄
삭제하자는 쪽이 우세했는데도 이호문의 사초는 남았고,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졸기 한 줄이 지워졌습니다.
최항과 정창손이 제동을 겁니다. 이 건은 명백하니 지워도 무방하지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나중의 폐단을 막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고치기 시작하면 어디서 멈추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황보인 등이 결론을 냅니다. 이런 큰일은 하나라도 불가하다는 의견이 있으면 정해진 법을 따라야 한다고. 그래서 지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이름 하나가 더 나옵니다. 찬성(贊成) 권제(權踶)가 죽었을 때 사관은 그를 두고 큰 줄기를 아는 사람이었고 대신다운 풍모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좋게 쓴 부고입니다. 김종서가 반박합니다. 권제는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했고 안살림에서 잃은 덕이 많았는데 어떻게 큰 줄기를 알고 대신다운 풍모가 있었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은 의논을 거쳐 지워졌습니다.
성삼문과 이예가 그 모순을 짚습니다. 사관이 쓴 것이 바른 논의라면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인지의 말이 옳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나쁘게 쓴 것은 역사책이라며 남기고, 좋게 쓴 것은 못 믿겠다며 지운다면 어째서 서로 반대인가.
그리고 성삼문이 물증 하나를 내놓습니다.
久埋烟塵, 紙色皆黃, 而惟此一紙, 潔白不類 … “오랫동안 연진(烟塵)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같은 기사
사초 뭉치는 세월에 절어 다 누렇게 변했는데, 문제의 그 한 장만 하얗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뜻입니다. 종이 색으로 위조를 잡아낸 셈입니다. 연진(烟塵)은 연기와 먼지를 말합니다.
이것이 이 회의에서 나온 유일한 물증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나는 못 들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증을 내놓은 쪽이 졌습니다.
XII. 두 번 적힌 다섯 글자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는 다섯 글자가 나오는 기사는 두 건입니다.
하나는 그 말을 처음 적은 이호문의 사초, 곧 『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6월 25일 기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말을 지우자고 모인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회의록입니다.
지우자는 논의가 그 다섯 글자를 실록에 한 번 더 새겼습니다. 무엇을 지울지 적으려면 지울 것을 옮겨 적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판정이 세 곳에 있습니다.
| 기록 | 연도 | 무엇을 말하는가 |
|---|---|---|
| 『세종실록』 사직 기사에 붙은 사초 | 1428년 | 황금 대사헌 · 벼슬과 송사를 팔았다 |
| 『문종실록』 졸기 (1,809자) | 1452년 2월 | 어진 재상 · 보궤의 꾸짖음이 있었다 |
| 『단종실록』 편찬 회의록 | 1452년 7월 | 그 사초는 근거가 없다 |
세 기록은 서로 어긋납니다. 실록은 그 어긋남을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말하지 않고 셋을 다 남겼습니다.
덧붙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초를 남긴 이호문은 그 자리에서 사람됨을 의심받는 데 그쳤습니다. 반대로 김일손은 사초에 무엇을 적었다는 이유로 46년 뒤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초를 둘러싸고 조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 그 두 끝이 실록 안에 함께 있습니다.
교정지를 앞에 놓고 이 문장을 뺄지 말지 정하는 회의는 지금도 있습니다.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빼는 순간, 다음번에는 무엇을 근거로 남길 것이냐는 물음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1452년의 그 방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지워도 되지만 한 번 열어 놓으면 막기 어렵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 본 적 없다는 「황금 대사헌」이 육백 년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실제로 지워진 것은, 남을 좋게 말한 한 줄이었습니다.
고치지 않기로 한 것도 편집입니다. 그날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출처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6월 25일 · kda_11006025_001 · 원문 보기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 2월 8일 ·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 kea_10202008_001 · 원문 보기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 kfa_10007004_003 · 원문 보기
『성종실록』 46권, 성종 5년(1474) 8월 21일 · kia_10508021_004 · 원문 보기
보궤불식의 출전은 『한서』 가의전이며, 해당 구절은 한문 원문에서 옮겼습니다.
본문의 실록 인용문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국역본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글자 수와 용례 집계는 실록 원문을 로컬 인덱스로 직접 헤아린 값입니다.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과 공백은 제외했습니다.
— 「졸기: 사관이 쓴 한 줄 인물평」 2편. 다음은 이황입니다. 연재 전체 목차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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