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만드는 절차에는 원고를 남기는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없애는 일도 절차에 들어 있었다. 편찬이 끝나면 초고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웠다. 세초(洗草)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실록은 언제나 마지막 원고다. 그 앞 단계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무엇을 덜어내기로 했는지는 남지 않는다. 딱 한 번 예외가 생겼다.
I. 없어져야 했던 원고
실록은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를 재료로 세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다. 초초본(初草本)으로 초벌을 잡고, 그것을 깎고 고쳐 중초본(中草本)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초본(正草本)을 정서한다. 편찬이 끝나면 앞의 둘은 세초해 없애고 정초본만 인쇄해 사고(史庫)에 넣었다. 기밀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절차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는 이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서 멈췄다. 중초본이 없어지지 않고 태백산사고에 그대로 들어갔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지우기 전 원고와 지운 뒤 원고가 둘 다 남았다.
초서로 쓴 원고 위에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지우고 고치고 덧붙인 자국이 그대로 있다. 종이쪽지(부전지)가 곳곳에 붙어 있고, 각 면의 위아래 여백에 보태 쓴 대목이 많다.
중초본에서 지우기로 한 것을 실제로 덜어내고 옮겨 쓴 최종 원고다. 이것이 광해군 시대의 공식 기록이다.
왜 없애지 않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확인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정초본은 끝내 인쇄되지 못했다. 재정이 바닥나 광해군 즉위년 2월부터 6월까지 5권과 그해 7·8월의 일부만 찍고 중단되었다. 조정은 인쇄를 포기하고 두 벌을 손으로 옮겨 써서 사고에 나누어 넣는 쪽을 택했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인쇄본 없이 필사본만 남은 실록은 이것뿐이다.
세초는 인쇄와 봉안이 끝난 뒤에 하는 마무리 절차였다. 그 절차가 통째로 어그러진 자리에서 중초본이 살아남았다. 폐위된 임금의 기록이라 굳이 없앨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설명도 있지만, 그것은 후대의 추정이고 실록에 적힌 말은 아니다.
II. 51만 자
중초본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종이에 남은 먹 자국만이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전산화한 원문에도 그 자국이 괄호로 남아 있다.
한 대목을 보면 바로 이해된다. 광해군 4년 9월 18일 조강 기사에서, 중초본은 이렇게 시작한다.
○壬子九月十八日己酉王(出御視事廳), 朝講。—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4년(1612) 9월 18일
정초본의 같은 기사는 이렇다.
○己酉/王朝講。— 『광해군일기』 정초본, 같은 날
괄호 안이 사라졌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판본 전체를 세어 보면 드러난다. 반각 괄호가 중초본에는 15,551곳, 정초본에는 457곳 있다. 서른네 배다. 반면 세주를 감싸는 【 】는 2,070 대 1,968, 〔 〕는 491 대 483으로 양쪽이 같다. 한쪽에만 몰린 기호는 괄호 하나뿐이다.
더 확실한 확인은 글자 수다. 양쪽에 기사가 한 건씩만 있는 날을 골라, 중초본에서 괄호 안을 걷어내고 정초본과 견주었다.
| 일자 | 중초본 원문 | 괄호를 걷어낸 본문 | 정초본 |
|---|---|---|---|
| 광해 7년 7월 5일 | 715자 | 175자 | 169자 |
| 광해 13년 1월 30일 | 647자 | 388자 | 381자 |
| 광해 14년 1월 3일 | 1,254자 | 963자 | 956자 |
괄호를 걷어낸 중초본이 정초본과 거의 정확히 맞는다. 남는 7~24자는 날짜 표기 방식의 차이다. 중초본은 연월일을 다 적고 정초본은 간지만 적는다.
괄호 안이 지워진 문장이다. 그러면 지워진 글자를 셀 수 있다.
510,803자. 조선의 편집자들이 덜어내기로 표시한 글자다. 원문의 15.1%이고, 기사 세 건 중 한 건에 그 표시가 있다. 원문의 95% 이상이 괄호에 들어간 기사, 곧 사실상 통째로 지우기로 한 기사도 827건이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이 있다. 여기까지가 센 값이다. 괄호가 산삭 표시라는 판단은 위의 대조로 뒷받침되지만, 그 자체는 여전히 해석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전산화 과정에서 어떤 규칙을 적용했는지는 별도의 문제이며, 이 글은 원문 텍스트에 남은 것을 근거로 삼는다.
III. 무엇이 먼저 지워졌는가
이 시즌이 편마다 던지는 질문이다. 이번에는 답을 셈으로 낼 수 있다. 괄호 안에 든 어휘와 괄호 밖에 남은 어휘를 갈라 세면 된다.
기준선은 15.1%다. 어떤 종류의 문장이든 평균 이만큼 지워졌다. 그보다 높으면 먼저 지워진 쪽이고, 낮으면 지키기로 한 쪽이다.
사신왈(史臣曰), 곧 사관의 논평이 59.1%다. 중초본에 203번 나오는데 그중 120번이 괄호 안에 있다. 기준선의 3.9배다.
표시가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초본을 세어 보면 안다. 표시대로라면 83번이 남아야 한다. 실제로는 64번이다. 열아홉이 더 줄었다. 정서 단계에서 한 번 더 손이 갔거나, 기사를 나누고 합치는 과정에서 빠졌을 수 있다. 어느 쪽인지는 기록에 없다.
두 수치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 중초본 | 정초본 | 남은 비율 | |
|---|---|---|---|
| 판본 전체 분량 | 3,376,945자 | 2,762,446자 | 81.8% |
| 사신왈(史臣曰) | 203회 | 64회 | 31.5% |
판본은 다섯 중 넷이 남았는데, 사관이 자기 이름을 걸고 쓴 대목은 셋 중 하나만 남았다.
아래쪽도 함께 봐야 한다. 상소(上疏)는 9.4%, 추국(推鞫)은 9.5%로 기준선의 0.6배다. 신하가 올린 글도, 역모를 심문한 기록도 평균보다 잘 남았다. 비변사(備邊司) 계사와 체차(遞差) 청원이 중간에 있는데, 이쪽은 되풀이되는 실무 문서라 분량을 줄이려는 손이 먼저 갔다고 볼 여지가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남기고, 그 일을 사관이 어떻게 보았는지가 먼저 지워졌다.
한 예가 광해군 1년 8월 20일 기사다. 삭령 군수 신응구(申應榘)를 인견한 기록인데, 원문 1,313자 가운데 1,303자가 괄호 안에 있다. 괄호가 두 겹이다. 인견 기록 전체가 하나, 그 뒤에 붙은 사관의 논평이 또 하나. 괄호 밖에 남은 것은 기사 구분 기호와 날짜, 합쳐 열 글자뿐이다.
○己酉八月二十日戊辰—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년(1609) 8월 20일 · 괄호 밖에 남은 전부
정초본의 그날을 열어 보면 이 기사가 아예 없다. 그런데 같은 날의 다른 기사 두 건은 남아 있다. 홍이상 등 열한 명에게 관직을 제수한 기록이 99자에서 61자로,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12자에서 6자로, 둘 다 날짜 표기만 줄어든 채 살아남았다. 누가 어떤 벼슬을 받았는지와 낮에 별이 보였다는 것은 남고,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은 말이 사라졌다.
지워진 대목을 읽어 보면 두 목소리가 겹쳐 있다. 먼저 신응구가 즉위 1년째의 임금에게 아뢴 말이다.
“즉위 초에 내리신 전교의 말씀은 백성의 귀에 밝게 들렸으나, 끝까지 시행한 실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위를 이으신 뒤 이미 1년이 지났지만 백성의 기대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나라에는 기강이 없고 인심은 그르며, 사대부들의 잘못된 행동도 이미 많습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년(1609) 8월 20일
그리고 그 뒤에 사관이 붙인 말이다.
“이번 인견 자리에서 올린 말은 달리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를 근거로 채택해 시행하겠는가? 더구나 윤휘(尹暉)는 몹시 무지하고 거친 사람이니, 어찌 진언하는 방도를 알겠는가?”— 같은 기사
임금을 향한 직언이 있고, 그 직언을 깎아내린 사관의 평이 있다. 둘이 함께 지워졌다. 어느 한쪽을 지키려는 손이었다면 나오기 어려운 모양이다.
한 달 전 6월 29일의 강인(姜絪) 인견 기사도 원문 1,636자 중 1,620자가 괄호 안이다. 이쪽 사론은 강인을 칭찬한 내용이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사관이 자기 목소리로 끼어든 대목이 함께 사라졌다.
앞의 표는 통계이고 이 두 기사는 사례다. 둘을 섞어 읽지 않는 편이 좋다. 사론이 기준선의 3.9배로 지워졌다는 것은 판본 전체를 센 값이고, 이 기사들은 기사 자체가 통째로 지워진 경우여서 사론만 겨냥한 삭제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통째로 지우기로 한 827건 안에 사관의 말이 유독 자주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IV. 한 기사 안에서
지금까지는 판본 전체의 셈이었다. 이제 기사 하나를 열어 본다. 광해군 4년(1612) 9월 18일이다.
먼저 함정 하나를 짚어야 한다. 이 기사는 중초본에서 5,866자인데 정초본의 같은 번호 기사는 204자다. 3.5%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날 정초본에는 기사가 여덟 건 있고, 합계가 4,025자다. 중초본에서 괄호를 걷어낸 본문이 4,034자다. 차이는 아홉 자다.
중초본은 하루치를 한 덩어리로 적었고, 정초본은 그것을 여덟 건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기사 하나만 놓고 분량을 재면 이런 착시가 생긴다. 셈은 언제나 무엇을 단위로 삼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면 괄호 안 1,832자에는 무엇이 있었나. 세 덩어리다.
첫째, 경연 문답이다. 시강관 유숙(柳潚)과 영사 이항복(李恒福)이 『상서(尙書)』 〈대고(大誥)〉를 놓고 주고받은 해석이 통째로 들어갔다. 왕이 “영승우려(靈承于旅)가 무슨 뜻인가”라고 물은 대목도 여기에 있다.
둘째, 국방 논의다. 왕이 이항복에게 북도의 장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이항복이 흉년과 전염병으로 큰 고을의 토병이 수백씩 죽는다고 답한 대목이다. 새 병사(兵使)로 이광영·이괄(李适)·이종일을 길러 쓰면 좋겠다고 천거한 대목도 함께 사라졌다.
셋째, 역옥 심문의 경위다. 김직재(金直哉) 옥사와 관련해 왕이 유공량(柳公亮)에게 캐물은 문답이 길게 이어지는데, 대부분 괄호 안이다.
그런데 그 심문 문답 가운데 딱 한 대목이 괄호 밖에 있다.
왕이 유공량에게 묻기를, “정인홍을 끌어들인 일이 과연 제세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하니, 유공량이 대답하기를, “이미 공초를 받아 보고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마땅히 처리할 일이므로 신은 다만 명을 기다릴 뿐입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4년(1612) 9월 18일
정초본에서 이 대목은 106자짜리 독립 기사가 되었다. 제목은 「유공량에게 김제세가 정인홍을 끌어들였는지를 묻다」이다. 심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누가 몇 대를 맞고 무엇을 자백했는지는 지워지고, 정인홍(鄭仁弘)의 이름이 나온 순간만 남아 따로 세워졌다.
정인홍은 이 연재의 다른 갈래인 「졸기」 7편에서 다룬 인물이다. 인조반정 뒤 여든여덟에 처형되었고, 사관은 그가 죽기 삼십 년 전부터 그를 어떻게 부를지 정해 두었다. 그 정해진 자리로 기록이 모이는 과정이, 이 한 기사의 편집에 남아 있다.
V. 누가 언제 다시 썼는가
『광해군일기』 편찬은 1624년(인조 2)에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듬해다. 편찬을 맡은 쪽은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이었다.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중단되었고, 임시로 묻어 둔 자료가 대부분 상했다. 1632년 2월에야 남별궁에 찬수청을 다시 설치하고 윤방(尹昉)을 총재관으로 삼아 네 방(房)으로 나누어 작업을 이었다. 1633년 9월까지 133개월분이, 그해 12월에 187개월분 전부가 중초로 작성되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등록관(謄錄官) 50인을 임명해 네 반으로 나누어 정서를 시작했고, 5월에 정초본 두 벌이 나왔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광해군 대의 기초 사료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 없어진 상태였다. 편찬자들은 개인이 가지고 있던 일기, 상소문, 조보(朝報), 문집 따위를 모아 채워 넣었다. 중초본에 적힌 내용이 모두 당대의 공식 기록에서 온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측정값과 해석을 갈라 둔다. 510,803자, 그리고 사관 논평이 203회에서 64회로 줄었다는 것은 센 값이다. 편찬 주체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라는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 둘을 이어 “정치적 의도로 사관의 말을 지웠다”고 말하는 것은 해석이다. 실록은 왜 지웠는지 적어 두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지운 자리가 남아 있다. 무엇을 감당하고 무엇을 감당하지 않기로 했는지가 괄호 안에 있다. 그 앞에서 판단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교정지는 버린다. 저자가 고친 자국, 편집자가 그은 줄, 끝내 빠진 문단은 완성된 책에 남지 않는다. 남기려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절차가 어그러진 덕분에 교정지가 살아남는 일이 있다. 조선의 편집자들이 무엇을 지우기로 했는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허술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에 인쇄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그은 줄은 사실 위가 아니라 동료가 남긴 논평 위에 있었다. 원고를 보다 보면 알게 된다. 지우기 가장 쉬운 문장은 없어도 사건이 성립하는 문장이라는 것을.
「지워진 실록」 2화입니다. 1화 「이순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거리」도 함께 읽어 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