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보궐정오 — 실록 권마다 붙은 정오표

숙종실록보궐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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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肅宗實錄)』을 펼치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한 권이 끝날 때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이어 붙어 있다. 그 글의 이름은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다. 빠진 것을 채우고(補闕, 보궐)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正誤, 정오)는 뜻이다.

한 책 안에 두 편찬자의 원고가 권마다 번갈아 묶여 있는 셈이다. 덧붙인 원고는 모두 726건이다. 그 가운데 144건에 사관의 논평이 들어 있다. 다섯 건에 한 건꼴이다.

지난 편에서는 『광해군일기』를 깨끗이 옮겨 쓰는 과정에서 사관의 말이 가장 먼저 지워지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방향이 거꾸로다. 이미 인쇄까지 마친 실록 뒤에, 사관의 말로 가득 찬 원고가 따라붙었다.

말풀이 · 실록을 읽기 위한 낱말

실록(實錄) · 임금 한 사람이 다스린 기간의 일을 날짜순으로 적은 나라의 공식 역사책이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다음 임금 때 만들었다.

사관(史官) · 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그때그때 적어 두던 관리다. 실록 안에서는 자신을 사신(史臣)이라고 부른다.

사론(史論) · 사관이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사신왈)”로 시작해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은 대목이다. 사실을 적는 부분과 달리 평가가 들어간다.

원편(原編) · 처음 완성된 『숙종실록』 본문이다. 뒤에 덧붙인 보궐정오와 구별하려고 이렇게 부른다.

I. 다시 찍을 수 없을 때 붙이는 종이

보궐정오는 개정판이 아니라 정오표(正誤表)다.

요즘도 책이 나온 뒤에 틀린 곳이 발견되면, 출판사는 책을 새로 찍는 대신 종이 한 장을 끼워 넣는다. “몇 쪽 몇째 줄의 이 글자는 저 글자로 고칩니다”라고 적은 종이다. 이것을 정오표라고 부른다. 보궐정오가 바로 그런 방식이었다. 책을 새로 짜지 않고, 이미 인쇄한 책 뒤에 고칠 곳을 적어 붙였다.

같은 임금의 시대를 두 번 기록한 예는 1화에서 본 선조(宣祖) 때에도 있다. 그런데 뒤에 다시 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아예 다른 책이다. 앞의 실록과 나란히 책장에 꽂힌다.

보궐정오는 그렇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제(解題, 책에 대한 해설)에 따르면, 보궐정오는 따로 책으로 묶이지 않았다. 『숙종실록』의 권마다 끝에 붙여서 함께 묶었다. 이렇게 따로 만든 원고를 한 책으로 함께 묶는 것을 합철(合綴)이라고 한다. 그래서 원편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권의 내용을 보태거나 반박하는 다른 사람의 원고가 곧바로 이어진다.

정리하면 이렇다. 수정실록이 새로 낸 책이라면, 보궐정오는 같은 책의 끝에 덧붙인 반론이다. 이 차이를 기억해 두면 뒤에 나올 숫자들이 쉽게 이해된다.

II. 인쇄를 마친 뒤에 바뀐 정권

보궐정오는 실록이 완성된 직후에 정권이 바뀌면서 생겼다. 그리고 만들어지기 전부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숙종실록』은 숙종(肅宗)의 아들 영조(英祖) 때 완성되었다. 편찬을 주도한 쪽은 노론(老論)이라는 당파였다. 영조 3년(1727)에 편찬과 인쇄가 끝났다.

그런데 바로 그해에 정미환국(丁未換局)이 일어났다. 노론 관료 백여 명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반대편 당파인 소론(少論)의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말풀이 · 당파와 환국

당파(黨派) · 생각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관료들의 무리다.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하지만, 선거가 아니라 임금의 신임을 두고 다투었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 숙종 때 서인(西人)이라는 당파가 둘로 갈라져 생긴 당파다. 나이 든 쪽과 젊은 쪽이 갈라졌다는 데서 이름이 나왔다고 전한다.

환국(換局) · 판을 바꾼다는 뜻이다. 임금이 조정을 이끄는 당파를 한꺼번에 갈아 치우는 일을 말한다. 숙종과 영조 때 여러 번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소론은 노론이 만든 실록에 일부러 비틀어 쓴 기록이 많다고 보았다. 전부 다시 쓰고 싶었지만, 막 인쇄를 끝낸 실록을 처음부터 고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른 방법이 정오표였다. 권마다 끝에 빠진 기사를 넣고, 잘못된 대목을 바로잡는 글을 붙이기로 했다.

이 일을 맡을 관청으로 실록보궐청(實錄補闕廳)을 세웠다. 책임자인 총재관은 이광좌가 맡았고, 윤순(尹淳)·송인명(宋寅明)이 그 아래에서 일을 이끌었다. 보궐정오는 이듬해인 영조 4년(1728) 3월에 완성되었다. 인쇄까지 마친 뒤 원편과 함께 묶어 여러 사고(史庫, 실록을 보관하는 창고)에 넣었다.

이 결정이 조용히 내려진 것은 아니다. 『영조실록』에서 보궐이라는 말이 나오는 기사는 딱 두 건인데, 둘 다 보궐에 반대하는 내용이다.

  • 1727년 9월 18일, 검열(檢閱) 정익하(鄭益河)가 상소를 올렸다. 실록을 보궐하자는 사람들을 의심할 만한 까닭 일곱 가지를 들었다.
  • 일주일 뒤인 9월 25일,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윤득징(尹得徵)·김약로(金若魯)·이성해(李聖海)가 실록을 보궐하려는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속셈이 있다고 아뢰었다. 그 결과 귀양을 간 것은 보궐하려는 쪽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이었다.

말풀이 · 관직과 처벌

검열(檢閱) · 예문관에 속한 정9품의 낮은 관직이다. 그러나 이 자리가 바로 전임 사관, 곧 기록을 전문으로 맡은 사관의 자리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 외교 문서를 맡던 관청의 젊은 관원이다.

상소(上疏) · 신하가 임금에게 자기 의견을 글로 적어 올리는 일, 또는 그 글이다.

귀양(정배, 定配) · 죄를 지은 관리를 서울에서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서만 살게 하는 벌이다.

실록을 고치는 일에 맞서 가장 먼저 붓을 든 사람 가운데 사관이 있었다. 뒤이어 반대한 젊은 관원들은 귀양을 갔다. 보궐정오는 그렇게 반대를 누르고 만들어졌다.

한 가지 덧붙인다. 원편을 만드는 동안에도 한 당파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편찬은 경종(景宗)이 즉위한 1720년에 시작되었다. 그 뒤 신임옥사(辛壬獄事)라는 큰 정치 사건과 영조의 즉위를 거치면서, 편찬을 이끄는 쪽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다시 노론으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다. 보궐정오는 그 줄다리기의 마지막 한 수였다.

III. 726건, 가장 긴 기사와 가장 많은 사론

보궐정오는 실록 전체에서 기사 한 건이 가장 길고, 사론이 차지하는 비율도 가장 높은 기록이다.

말풀이 · 이 글은 어떻게 헤아렸나

기사(記事) · 실록에서 하루치 기록 안에 들어 있는 글 한 꼭지다. 신문 기사 한 편과 비슷하다.

글자 수 · 한문 원문에서 한자만 헤아린 값이다. 문장부호와 띄어쓰기는 헤아리지 않았다.

사론 비율 · 전체 기사 가운데, 史臣曰이 한 번이라도 나오는 기사가 몇 퍼센트인지를 헤아린 값이다.

먼저 길이를 보자. 보궐정오 726건의 원문은 한자로 모두 212,994자다. 한 건에 평균 293자다. 원편 『숙종실록』은 한 건에 평균 135.8자다. 보궐정오의 기사가 2.16배 길다.

이 연재에서 헤아리는 실록과 판본은 모두 서른세 종이다. 그 가운데 기사 한 건이 가장 긴 것이 보궐정오다. 2위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277.3자), 3위는 『선조수정실록』(239.1자)이다. 1위부터 3위까지가 모두 나중에 고쳐 쓴 판본이다.

다음은 사론이다. 보궐정오 726건 가운데 144건에 史臣曰이 나온다. 19.83%다. 원편은 24,205건 가운데 231건으로 0.95%다. 보궐정오의 사론 비율은 원편의 약 스물한 배, 실록 전체 평균(1.31%)의 약 열다섯 배다.

지난 편에서 본 광해군일기의 숫자와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더 분명하다.

사론(史臣曰)이 들어 있는 기사의 비율 · 한문 원문 기준
0.91%0.34%0.95%19.83%광해군일기 중초본201건 / 22,121건광해군일기 정초본64건 / 18,805건숙종실록 원편231건 / 24,205건숙종실록보궐정오144건 / 726건

표로 풀면 이렇다.

기사사론이 든 기사비율기사당 평균 길이
광해군일기 중초본22,121건201건0.91%124.0자
광해군일기 정초본18,805건64건0.34%119.8자
숙종실록 원편24,205건231건0.95%135.8자
숙종실록보궐정오726건144건19.83%293.4자

중초본(中草本)은 고치기 전의 원고, 정초본(正草本)은 깨끗이 옮겨 쓴 최종 원고다. 광해군일기는 최종 원고를 만들면서 사관의 말이 든 기사를 셋 중 둘 덜어냈다. 숙종실록 원편의 사론 비율은 그 덜어내기 전 원고와 비슷하다. 그리고 보궐정오의 막대는 나머지 셋을 합친 것보다 아홉 배쯤 높이 솟는다.

2화에서는 중초본의 사론을 나온 횟수로 헤아려 203회라고 적었다. 이 글은 기사 수로 헤아렸으므로 201건이다. 한 기사에 사론이 두 번 이상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두 값이 다르다.

그렇다고 이 숫자가 곧바로 “소론의 사관이 말이 많았다”는 뜻은 아니다. 보궐정오는 처음부터 고칠 곳만 골라서 쓴 원고이기 때문이다.

원편은 날마다 있었던 일을 차례로 적어야 했다. 누구에게 무슨 벼슬을 주었다, 오늘 달무리가 졌다 같은 짧은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보궐정오에는 그럴 의무가 없었다. 할 말이 있는 날만 골라 썼다. 그러니 기사는 길어지고, 평가가 들어간 기사의 비율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원고의 형식에서 끌어낸 추론이다. 보궐정오가 실제로 무엇을 채웠는지는 기사를 직접 열어 보아야 안다.

IV. 512자와 8,397자

원편이 512자로 남긴 상소를 보궐정오는 8,397자로 되살렸다.

숙종 14년(1688) 6월 14일의 일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관리 인사를 맡은 부서의 장관) 박세채(朴世采)가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책자 하나를 덧붙였다. 나라가 당장 힘써야 할 일을 열두 가지로 정리한 제안서, 곧 시무(時務) 12조다.

이 일은 원편에도 있고 보궐정오에도 있다. 원편 기사는 512자다. 보궐정오 기사는 8,397자다. 열여섯 배가 넘는다.

8,397자는 보궐정오 기사 평균의 스물여덟 배다. 보궐정오 726건 전체 글자 수의 3.9%이기도 하다. 보궐정오 원문의 스물다섯 자 가운데 한 자가 이 기사 한 건에 들어 있다.

말풀이 · 상소를 읽기 위한 낱말

세주(細註) · 본문 사이에 작은 글씨로 두 줄로 나누어 넣은 설명이다. 이 글에서는 【 】로 표시했다.

비답(批答) · 신하가 올린 글에 임금이 내린 답이다.

붕당(朋黨) · 당파와 같은 말이다. 조선에서는 흔히 서로 편을 갈라 다투는 모습을 나쁘게 이를 때 썼다.

보궐정오 기사는 첫머리에 세주로 이렇게 적는다.

【大條小目見上。】 대강과 세목은 위에 실려 있다.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4년(1688) 6월 14일

그리고 긴 본문이 끝난 뒤에 다시 한 줄을 붙인다.

【批旨見上。】 임금의 비답은 위에 실려 있다.
— 같은 기사

여기서 “위”는 원편을 가리킨다. 열두 조목의 제목과 임금의 답은 원편 512자 안에 이미 있으니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보궐정오가 채운 것은 그 사이다. 박세채가 조목마다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하자고 했는지, 곧 주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원편은 무엇을 지웠는가. 이날에 한해서는 답이 분명하다. 제목과 결론은 남기고, 주장의 근거를 지웠다.

다만 보궐정오도 전부를 되살리지는 않았다. 조목마다 첫머리가 “대략 이르기를(略曰, 약왈)”로 시작한다. 요약해서 옮겼다는 뜻이다. 번호가 붙은 조목은 1·3·4·5·6·8·9·12조의 여덟 개다. 번호 없이 군사 제도를 논한 조목 하나를 더해도 아홉 개다. 열두 조목 가운데 셋은 보궐정오에서도 빠졌다. 되살린 원고 역시 줄인 원고였다.

되살린 본문에는 이 연재에서 이미 만난 이름들이 나온다.

  • 박세채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널리 기려야 한다고 적었다. 두 사람을 문묘(文廟, 공자와 이름난 유학자를 함께 모시는 사당)에 모신 뒤에도 반대하는 말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이는 졸기 1편의 주인공이다.
  • 훈련도감(訓鍊都監, 임진왜란 중에 만든 상비군 부대)과 산성 방어를 말할 때는 유성룡(柳成龍)의 이름을 든다. 유성룡은 졸기 6편에서 다루었다.
  • 수군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나온다. 임진년에 이순신이 바닷길에서 한 번 싸워 이긴 뒤로 왜적이 감히 돛을 올려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고 쓴다. 전투선을 마련하는 대목에서는, 요즘 장인들이 옛 방식만 따를 뿐 이순신처럼 거북선(龜船)을 새로 만들어 뜻밖의 승리를 거둘 줄은 모른다고 쓴다.

1화에서 두 실록이 서로 다르게 적은 그 이순신이, 백 년쯤 뒤 한 신하의 상소 안에서는 수군의 본보기로 다시 불려 나온다.

가장 눈여겨볼 조목은 붕당을 깨뜨리자는 대목이다. 박세채는 당파 싸움의 해가 깊으니 임금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적었다.

今當自上慨然以革弊爲心, 使儒臣作一大誥 … 同德建中爲心事 이제 마땅히 임금께서 개연히 폐단을 개혁하는 데 뜻을 두시고, 유신으로 하여금 하나의 큰 고유문[大誥]을 짓게 하여 … 덕을 함께하고 중도를 세우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4년(1688) 6월 14일

고유문(告諭文)은 임금이 온 나라 사람에게 알리는 글이다. 생략한 가운데 대목에서 박세채는, 그 글이 “양쪽이 모두 임금의 신하(兩邊俱是王臣, 양변구시왕신)”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적었다. 편을 가르지 말고 서로 뜻을 합쳐 공정한 기준을 세우자는 제안이다.

이 대목이 왜 원편에서 빠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상소 전체가 워낙 길어서 줄였을 뿐일 수도 있다. 노론이 편찬한 원편이 당파 싸움을 그만두자는 주장을 굳이 자세히 싣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뒤의 것은 해석이다. 이 기사 한 건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가를 수 없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도 보아야 한다.

疏凡累萬餘言, 而綱目俱擧, 本末該備, 且方留意於春秋大義, 故尤復眷眷於戰守備禦之策矣。 상소는 모두 만여 언에 이르렀으며 … 전쟁과 수비, 방어에 관한 계책이었다.
— 같은 기사

생략한 가운데에서 편찬자는 이 상소를 칭찬했다. 큰 줄기와 세부를 다 갖추었고, 앞뒤를 두루 챙겼으며, 춘추대의(春秋大義, 공자가 『춘추』에서 밝혔다는 큰 의리로, 조선 후기에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전쟁과 방어의 대책에 특히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칭찬에는 史臣曰이 붙어 있지 않다. III절에서 헤아린 144건은 史臣曰이라는 표시가 붙은 평가만 헤아린 값이다. 이렇게 표시 없이 본문 끝에 붙은 평가는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니 보궐정오에 담긴 평가는 실제로 144건보다 많다.

V. 1684년, 같은 날의 두 원고

사론이 가장 많이 몰린 1684년을 열어 보면, 보궐정오는 원편이 짧게 줄인 글은 늘리고 원편이 길게 실은 글은 짧게 다시 적었다.

보궐정오의 사론 144건을 해마다 나누어 보면, 가장 많은 해가 1684년(숙종 10)이다. 이 해의 보궐정오 기사는 25건인데, 그 가운데 15건에 사론이 있다. 60%다. 같은 해 원편은 557건 가운데 16건, 2.9%다. 기사 수는 스물두 배나 차이가 나는데 사론의 수는 거의 같다.

이 해의 보궐정오 기사 가운데 여덟 건은, 원편에도 같은 날 같은 일을 적은 기사가 있다.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1684년무슨 일인가원편보궐정오
2월 2일송광연(宋光淵)의 상소499자601자 · 사론
2월 30일윤세기(尹世紀)가 물러나기를 청함154자193자 · 사론
3월 27일한태동(韓泰東)의 상소와 그 처벌811자1,569자 · 사론 2건
4월 19일조지겸(趙持謙)의 변명 상소38자3,160자
4월 24일이유태(李惟泰)의 문인들이 올린 상소839자2,158자 · 사론
4월 29일최신(崔愼)이 윤증을 공격한 상소1,665자1,236자 · 사론
5월 13일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이 윤증을 비판함1,733자768자
8월 21일조정만(趙正萬) 등이 윤증을 배척한 상소6,434자960자

글자 수는 한문 원문에서 한자만 헤아린 값이다. 여덟 날 모두 원편 기사에는 사론이 없다.

이 표에서 두 방향이 함께 보인다.

하나는 늘린 쪽이다. 4월 19일, 형조 참의(刑曹參議, 법을 맡은 부서의 차관급 관리) 조지겸이 자신을 공격한 상소에 맞서 변명하는 글을 올렸다. 원편은 이 일을 38자로 적었다. 한 줄짜리 소식이다. 보궐정오는 그 글을 3,160자로 실었다. 여든세 배다. 3월 27일 한태동의 상소도 811자에서 두 건, 1,569자로 늘었다.

조지겸과 한태동은 비슷한 처지의 젊은 관료였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김익훈(金益勳)이라는 권력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노론의 원로들과 갈라섰고, 뒤에 소론의 한 축이 된다.

다른 하나는 줄인 쪽이다. 4월 29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 제자) 최신이 윤증(尹拯)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원편은 이 상소를 1,665자로 길게 실었다. 보궐정오는 1,236자로 오히려 짧다.

말풀이 · 스승과 제자의 다툼

송시열(宋時烈) · 숙종 때 서인과 노론을 이끈 가장 이름난 학자이자 정치가다. 제자가 매우 많았다.

윤증(尹拯) · 원래 송시열의 제자였던 학자다.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묘비 글 문제 등으로 스승과 사이가 틀어졌고, 뒤에 소론이 스승으로 받든 인물이 되었다.

양비론(兩非論) · 다투는 양쪽이 모두 잘못했다고 보는 의견이다.

보궐정오의 이날 기사를 열어 보면 왜 짧은지 알 수 있다. 상소가 올라왔고 임금이 좋은 말로 답했다는 한 줄 뒤에, 박세채 기사에서 본 것과 같은 세주가 붙어 있다.

원래의 상소와 비답은 위에 보인다.
—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0년(1684) 4월 29일

공격한 쪽의 글은 이미 원편에 실려 있으니 다시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궐정오는 그 자리에 세 가지를 차례로 놓았다. 편찬자의 평가, 사관의 논평, 그리고 공격을 받은 윤증이 쓴 편지다.

첫째는 史臣曰 표시 없이 본문에 들어간 평가다.

유학자의 문하에서 제자들을 내버려 두어 어지럽게 상소를 올리게 하고, 남을 욕하고 모욕하는 것을 일삼게 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이를 금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괴이한 무리들이 걸핏하면 ‘스승을 높인다’고 내세우며 상소를 잇달아 조정에 올렸고, 마침내 한바탕 싸움판을 이루었으니 군자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 같은 기사

둘째는 세주로 붙은 사론이다. 사관은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처음부터 풀어 놓는다.

처음에 윤증은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사람들은 모두, ‘훗날 도를 전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박세채는 그 편지를 받아 숨겨 두고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손자 가운데 박세채의 사위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박세채의 상자 속에서 그 편지를 찾아내어 조정 안팎에 퍼뜨렸다. 마침내 이것이 온 세상의 큰 시비가 되었다.
— 같은 기사

사론은 이어서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를 거세게 몰아세운 일을 적는다. 그리고 김익훈의 무리가 그 틈을 타 선비들을 헐뜯었다고 쓴 뒤, 이렇게 끝난다.

의심과 분노는 날로 깊어지고 틈은 날로 벌어져, 이미 갈라져 있던 형세가 더욱 다시 합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없는 화의 근원을 만들었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 때문에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는 ‘양비론’을 제기하였다.
— 같은 기사

셋째는 윤증의 편지다. 사론이 말한 바로 그 편지, 박세채의 상자에서 나와 세상에 퍼진 편지의 요약이 실려 있다. 박세채는 윤증에게 스승에게 몸을 낮추어 사과하라고 권했다. 윤증은 이렇게 답한다.

정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모두 이전과 같을 수 없는데, 제가 이것이 잘못이라고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령 몸을 낮추어 사과하려 한들 무슨 말을 만들어 사과할 수 있겠습니까?
— 같은 기사, 윤증이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원편은 공격한 사람의 글을 실었고, 보궐정오는 공격받은 사람의 글을 실었다. 원편만 읽으면 최신이 윤증을 무엇으로 비난했는지만 알 수 있다. 윤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궐정오가 이날 채운 빈칸이 바로 그것이다.

한 가지가 더 눈에 띈다. 이 기사에서 표시 없는 본문 평가는 송시열 한 사람을 탓한다. 그런데 史臣曰로 시작하는 사론은 사연을 길게 풀고, 김익훈의 무리를 나무란 뒤,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표시가 붙은 평가가 표시 없는 평가보다 오히려 조심스럽다. 사론의 수만 헤아려서는 보궐정오가 얼마나 한쪽 편을 들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8월 21일의 경우도 비슷하다. 관학(官學, 나라에서 세운 학교) 유생 조정만 등이 윤증을 배척한 상소를 원편은 6,434자로 실었고, 보궐정오는 960자로 적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이 있다. 위의 표는 한 해 가운데 여덟 날일 뿐이다. 보궐정오 726건 전체가 이런 모습이라고 말하려면 모든 쌍을 하나하나 맞대어 보아야 한다. 조지겸과 한태동을 소론 쪽으로, 최신과 조정만을 노론 쪽으로 나눈 것도 2차 자료에 기댄 구분이다. 다만 이 여덟 날만 놓고 보면, 보궐정오가 한 일은 새로운 사실을 알린 것이라기보다, 원편이 누구의 글을 얼마나 실었는지를 되돌려 놓은 것이었다. 이것은 숫자로 확인된다.

VI. 누가 다시 평가되었는가

해제는 보궐정오가 가장 비판적으로 고친 인물로 송시열을 꼽는다. 그런데 직접 헤아려 보니 윤증이 더 크게 늘었다.

해제에 따르면 보궐정오가 원편과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과정이다. 보궐정오는 노론의 지도자 송시열, 그리고 경신환국을 이끈 김석주(金錫冑)·김익훈의 행동을 매우 비판적으로 고쳐 적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뒤에 세자(뒤의 경종)를 어떻게 보호할지, 세자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서도 소론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을 많이 실었다.

이 설명이 맞는지 숫자로 확인해 보았다.

말풀이 · 밀도와 배율

밀도 · 전체 기사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가 몇 퍼센트인지를 뜻한다. 보궐정오는 원편보다 기사 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건수가 아니라 밀도로 견주어야 공평하다.

배율 · 보궐정오의 밀도를 원편의 밀도로 나눈 값이다. 3배라면, 보궐정오에서 그 이름을 만날 확률이 원편보다 세 배 높다는 뜻이다.

색인어(索引語) ·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사마다 붙여 둔 인명·지명 목록이다. 이름은 이 목록의 한자 표기로 헤아렸기 때문에,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 섞이지 않는다.

인물마다 이름이 나오는 기사의 비율을 원편과 보궐정오에서 각각 구했다. 1화에서 이순신의 밀도를 견준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인물원편보궐정오배율
윤증262건 · 1.08%67건 · 9.23%8.5배
김익훈80건 · 0.33%16건 · 2.20%6.7배
김석주39건 · 0.16%6건 · 0.83%5.2배
송시열817건 · 3.38%87건 · 11.98%3.5배
김창집(金昌集)475건 · 1.96%27건 · 3.72%1.9배

이 표를 읽으려면 기준선이 하나 필요하다. 보궐정오의 기사는 원편보다 평균 2.16배 길다. 기사가 길면 어떤 이름이든 그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배율이 2배 안팎이라면, 그 사람이 특별히 주목받았다기보다 기사가 길어서 생긴 차이로 보는 편이 안전하다.

원편 대비 보궐정오의 인물 등장 밀도 배율 · 점선은 기사 길이 차이(2.16배)
윤증김익훈김석주송시열김창집8.5배6.7배5.2배3.5배1.9배

이 기준선으로 보면 세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 해제가 이름을 든 세 사람은 모두 기준선을 넘는다. 김익훈 6.7배, 김석주 5.2배, 송시열 3.5배다. 송시열은 배율이 셋 가운데 가장 낮다. 하지만 원편에서도 워낙 자주 나오는 인물이라, 밀도 자체는 가장 높다. 보궐정오 기사 여덟 건 가운데 한 건에 송시열의 이름이 있다. 다만 김석주는 원편 39건, 보궐정오 6건으로 건수가 적다. 건수가 적으면 배율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둘째, 가장 크게 늘어난 사람은 해제가 이름을 들지 않은 윤증이다. 8.5배다. 보궐정오에서 그의 이름은 67건에 86번 나온다. 벼슬을 사양하는 그의 상소, 그를 공격하는 상소와 감싸는 상소, 그의 벼슬을 빼앗는 처분이 차례로 실렸다. 윤증의 졸기(卒記, 실록에 실린 부고)도 보궐정오 안에 있다. 송시열의 졸기 역시 보궐정오에 따로 실렸다. 보궐정오는 상대편 지도자를 고쳐 쓰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자기편 스승의 자리를 넓혔다. 해제는 비판 쪽에 무게를 두었지만, 숫자는 감싸는 쪽도 그만큼 컸다고 말한다.

셋째, 김창집은 1.9배로 기준선 아래에 있다. 김창집은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숙종 때 기사에서 보궐정오가 그를 따로 겨냥하지는 않았다. 이 대비는 당시 다툼의 중심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사론이 몰린 해도 대체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가장 많은 1684년(15건) 다음으로 1681년과 1683년이 각각 9건이다. 이 세 해를 합치면 33건으로, 전체의 4분의 1에 가깝다. 2차 자료에 따르면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비판한 편지 「신유의서(辛酉擬書)」가 1681년에 쓰였다. 그리고 이 편지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다툼이 조정 전체의 문제로 번진 것이 1684년이다. V절에서 본 최신의 상소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 흐름에 들어맞지 않는 해가 둘 있다. 1699년(13건)과 1712년(12건)은 사론이 두 번째, 세 번째로 많은 해다. 그런데 해제가 든 사건과는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사를 열어 보면 성격이 다르다.

  • 1699년에는 보궐정오 기사 19건 가운데 13건에 사론이 있다. 대부분 관리가 벼슬을 그만두거나 탄핵을 받은 기사에, 사관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한 것이다. 특정한 사건 하나에 몰리지 않았다.
  • 1712년에는 44건 가운데 12건에 사론이 있다. 거의 모두가 그해에 일어난 과거 시험 부정 사건, 곧 임진년의 과옥(科獄)을 다룬다.

해제는 이 과거 부정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궐정오의 사관이 세 번째로 많은 말을 남긴 자리가 바로 여기다.

VII. 헤아린 것과 읽은 것

마지막으로, 헤아린 값과 확인된 사실과 해석을 나누어 둔다.

헤아린 값은 이렇다. 726건, 사론 144건(19.83%), 기사당 293자, 512자와 8,397자, 1684년의 여덟 쌍, 인물별 밀도다.

확인된 사실은 이렇다. 보궐정오는 소론이 정미환국 뒤에 편찬해 원편 각 권의 끝에 합철했다. 그 결정에 사관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뒤이어 반대한 관원 셋은 귀양을 갔다. 해제도 이 원고가 소론의 입장을 반영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스스로 적는다.

그런데 해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원편 자체가 노론의 입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보궐정오가 읽는 사람에게 일종의 균형을 잡아 주는 추 노릇을 한다고 덧붙인다. 한쪽으로 기운 원고 뒤에 반대쪽으로 기운 원고가 붙었다. 둘이 한 책에 묶인 덕분에, 오늘의 독자는 두 편찬자의 판단을 한자리에서 견주어 볼 수 있다.

해석은 이 두 가지를 잇는 말이다. 사론 비율이 높은 까닭을 “소론이 원편의 평가를 뒤집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해석이다. III절에서 본 대로, 고칠 곳만 골라 쓰는 형식만으로도 이 숫자의 상당 부분이 설명된다. 또 IV절과 V절에서 본 대로 史臣曰 표시 없이 붙은 평가도 있어서, 144건은 오히려 적게 헤아린 값이다. 이 헤아림에는 이렇게 양쪽 방향의 오차가 있다. 그리고 V절의 최신 상소 기사가 보여 주듯, 사론이 많다는 것과 한쪽 편을 들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2화의 편찬자들은 원고를 줄이면서 사관의 말부터 덜어냈다. 보궐정오의 편찬자들은 원고를 다시 쓸 수 없게 되자 사관의 말부터 보탰고, 원편이 줄여 버린 글을 되살렸다. 두 무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적힌 사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의 글을 몇 자나 실을지, 그 뒤에 어떤 말을 붙일지는 사건을 읽는 방법 자체를 바꾼다.

편집장의 메모

책이 나온 뒤에 오류를 발견하면 출판사는 정오표를 끼운다. 정오표에는 몇 쪽 몇째 줄의 무엇을 무엇으로 고친다는 말만 적는 것이 원칙이다. 이유를 쓰지 않고, 평하지 않는다. 정오표가 반론이 되는 순간 독자가 본문보다 정오표를 먼저 읽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의 정오표는 그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고친 글자보다 붙인 논평이 많았고, 본문이 38자로 줄인 변명을 3,160자로 되살려 놓기도 했다. 그래서 삼백 년 뒤의 독자는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두 편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정오표가 본문과 다투는 책은 드물다. 그런 책이 대개 가장 오래 읽힌다.

이 글에서 인용한 기사

『숙종실록』 숙종 14년 6월 14일 · ksa_11406014_001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4년 6월 14일 · ksb_11406014_001
『숙종실록』 숙종 10년 4월 19일 · ksa_11004019_001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0년 4월 19일 · ksb_11004019_001
『숙종실록』 숙종 10년 4월 29일 · ksa_11004029_001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0년 4월 29일 · ksb_11004029_001
『영조실록』 영조 3년 9월 18일 · kua_10309018_003
『영조실록』 영조 3년 9월 25일 · kua_10309025_001
인용문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편찬 경위와 해제의 평가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왕대별 해제 「숙종보궐정오」에 따랐고, 윤증과 송시열의 갈등 연도는 2차 자료에 따랐다. 기사 수, 사론 비율, 인물 밀도는 실록 원문 DB에서 직접 헤아린 값이며, 글자 수는 모두 한문 원문에서 한자만 헤아린 값이다. 인물 밀도는 국사편찬위원회 색인어(한자 인명) 기준이다.
집계에 쓴 실록 원문 41만여 건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것이다.

「지워진 실록」 3화다. 1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2화 광해군일기 중초본에 이어, 다음은 광해군일기에서 통째로 지워진 827건이다. 연재 전체 목록은 목차 페이지에 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