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달 밀린 월급에서 대원군 압송까지 — 임오군란

임오군란 당시 훈련도감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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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음력 6월 9일 아침.

가뭄이 계속되던 여름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다시 기우제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고, 그날 아침 고종은 인정전에 나가 종묘 기우제에 쓸 향과 축문을 손수 건넸습니다.

『고종실록』 음력 6월 9일의 첫 기사는 그 일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사도 군란과 상관없습니다. 군인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날 네 번째 기사입니다.

동별영에서 소란을 일으킨 군졸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서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양력 7월 23일, 음력 6월 9일. 우리가 역사책에서 본 임오군란이 일어난 날입니다. 48일 뒤 조선과 일본이 맺은 제물포조약 본문이 임오군란이 일어난 날을 나란히 적어 놓았습니다.

日本曆七月二十三日, 朝鮮曆六月初九日之變
일본력 7월 23일, 조선력 6월 9일의 변

—

13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 군인들

임오군란은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발단은 월급 지급 현장이었습니다.

전라도에서 세곡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밀린 월급 가운데 한 달치를 옛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나온 곡식이 문제였습니다. 자료에 따라 표현에 차이가 있지만, 양이 모자랐고 품질도 나빴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양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겨와 모래가 섞였다고 정리합니다.

군인들이 창고지기에게 항의했습니다.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창고지기는 크게 다쳤습니다. 음력 6월 5일, 영의정 홍순목이 이 일을 고종에게 보고합니다.

『고종실록』에 남은 그날 보고는 440자입니다. 군인들이 따진 말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十三朔未放之料, 今纔以一朔條分給者, 乃如是乎?
열세 달 주지 않은 월급을 이제 겨우 한 달 치로 나누어 주면서 이 모양인가?

홍순목은 원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위영 군사는 제대로 월급을 받는데 옛 훈련도감 군사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군인을 십 년 기르는 것은 하루에 쓰기 위함인데, 대우에 두터움과 얇음이 있으니 평소 쌓인 원망이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군인들이 바라는 것은 쌀 아홉 말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조차 해가 넘어가도록 주지 못했습니다.

고종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軍卒之不敢違令, 亦可尙矣。
군졸들이 감히 명을 어기지 않으니 또한 가상하다.

원인과 위험이 모두 보고된 자리였습니다.

나흘 뒤, 6월 9일 군란이 일어납니다.

말풀이
군료(軍料) 군인에게 지급하던 월급입니다. 당시에는 쌀 등 곡식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섬(石)·말(斗)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입니다. 열 되가 한 말이고, 조선에서는 열다섯 말 또는 스무 말을 한 섬으로 삼았습니다. 군인 한 사람이 바라던 아홉 말은 한 섬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입니다.
선혜청(宣惠廳) 대동법으로 걷은 쌀과 국가 재정을 다루던 관청입니다. 군인의 월급도 이곳을 통해 지급됐습니다.
동별영(東別營) 훈련도감 계통의 군영 시설입니다.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이 처음 모인 곳입니다.

—

왜 13달이나 밀렸나?

답도 같은 보고 안에 있습니다.

홍순목은 월급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다른 걱정을 말합니다. 올해 경기 지방은 흉년을 면하기 어렵고 서울 백성의 사정이 딱해질 텐데, 예전 같으면 나라가 곡식을 풀어 굶주림을 구제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見今惠廳, 有何蓄穀乎?
지금 선혜청에 무슨 쌓아 둔 곡식이 있습니까?

창고가 비어 있었습니다.

군인들 월급을 내주는 관청에 곡식이 없었습니다. 체불은 누가 떼어먹어서 생긴 일이 아니라 나라의 곳간이 바닥났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당시 선혜청 창고가 비어 서울 관리들의 봉급까지 지급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밀린 것은 군인들 월급만이 아니었습니다.

곳간은 왜 비었을까요. 세 가지가 겹쳤습니다.

첫째, 쌀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1876년 개항 때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고, 이어 무역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칙에는 곡물 수출을 막을 장치가 없었습니다. 관세도 없었습니다. 개항장을 통해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쌀값이 올랐습니다. 1882년의 쌀값이 개항 당시인 1876년에 비해 두세 배까지 올랐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라가 세금으로 걷는 것도 쌀이고, 군인에게 주는 것도 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쌀이 나라 밖으로 나갔습니다.

둘째, 흉년이 들었습니다.

1882년에는 경기·충청·전라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고종이 임오군란 당일 아침, 기우제를 지내던 그 가뭄입니다. 세곡이 제때 올라오지 않으면 창고는 더 빨리 빕니다.

셋째, 새로 시작한 일에 돈이 들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보내고, 청에 영선사를 보내고, 신식 군대를 새로 만들고 일본인 교관을 데려왔습니다. 모두 비용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관리들의 부패와 매관매직까지 겹쳤다고 여러 자료가 지적합니다.

나라는 새 일을 벌이면서 옛 군인들의 월급 지급을 미뤘습니다.

그 미룸이 13달이 되었을 때, 겨우 한 달치가 나왔고 그마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

같은 군인이 아니었다

홍순목이 고종에게 한 말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무위영 군사는 온전히 받는데, 훈련도감 군사는 이렇게 받으니 어찌 한탄이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나라 군인인데 받는 것이 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881년 4월, 조선 정부는 군제를 개편했습니다. 조선 후기 내내 서울을 지켜 온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 두 군영으로 줄였습니다.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용호영이 둘로 합쳐진 것입니다.

다섯이 둘이 되면서 상당수 군인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황현은 이때 노약자부터 쫓겨났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해에 신식 군대 별기군(別技軍) 이 만들어졌습니다.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으로 붙어 일본식 훈련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5군영 군인 가운데 80명을 뽑아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상류층 자제 100명으로 채웠다고 합니다. 별기군은 월급도 제때 나오고 옷차림도 달랐습니다.

정리하면 층이 셋으로 갈렸습니다.

어떤 군대인가대우
별기군1881년에 새로 만든 신식 군대월급과 의복 모두 우대
무위영궁궐 수비를 맡은 왕의 친위 군영월급이 제때 나옴
옛 훈련도감 출신5군영에서 밀려나 편입된 군인13달 체불

같은 무위영 안에서 옛 훈련도감 출신은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홍순목이 걱정한 것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10년을 기르는 것은 하루에 쓰기 위함인데 그 사이에 두터움과 얇음이 있으면 원망이 쌓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갈랐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새 군대에 예산을 몰아줄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쪽도 있고, 고종이 군사 주도권을 자기 손에 쥐려 했다고 보는 쪽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밀려난 군인들이 그것을 차별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생활고까지 겹쳤습니다. 군인들의 사정은 봉급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박봉 탓에 대부분 행상을 하거나 좌판을 벌여 생계를 이었고, 이태원과 왕십리 일대가 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정리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월급이 13달 밀렸습니다. 가족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군인들에게 이것은 군제 개혁에 대한 추상적인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훈련도감 군인들이 창고지기와 충돌한 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책임자인 민겸호가 주동자들을 체포해 엄하게 처벌하려 했습니다. 이때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이 붙잡혀 처형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군인들 입장에서는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13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겨우 한 달치를 받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된 곡식이 아니었습니다. 항의하자 동료들이 감옥에 갔습니다.

황현이 훗날 『매천야록』에 옮겨 놓은 말은 당시 분노를 이렇게 전합니다. 굶어 죽으나 처형당하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풀이
훈련도감·5군영 조선 후기 서울과 왕궁을 지키던 중앙 군영입니다. 군제 개편으로 무위영·장어영 중심의 체제로 축소되면서 많은 기존 군인이 자리를 잃었습니다.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 1881년 군제 개편으로 5군영을 합쳐 만든 두 군영입니다. 무위영이 궁궐 수비를 맡았습니다.
별기군(別技軍) 1881년에 만든 신식 군대입니다.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에게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1880년 개화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입니다. 초대 총리대신은 이최응이었습니다. 군란 이튿날 혁파되고 삼군부로 되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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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겸호는 왜 첫 번째 표적이 되었나

민겸호는 단순한 창고 책임자가 아니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였고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었습니다. 『고종실록』은 그를 선혜 당상 또는 선혜청 제조로 적습니다. 여러 인물 자료는 그가 당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고 정리합니다.

군인들의 월급 문제와 군정을 모두 책임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항의한 군인들을 잡아 처벌하려 했습니다. 군인들 눈에는 민씨 권력과 월급 문제가 한 사람에게 겹쳐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먼저 민겸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황현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집 안에 있던 값비싼 물건을 훔치지 말라며 한곳에 모아 불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매천야록』은 군란 당시 현장을 황현이 직접 보고 쓴 기록은 아닙니다. 후대에 전해 들은 이야기가 섞여 있으므로 장면 자체를 그대로 사실로 확정하기보다는 당시 민중에게 민겸호가 어떤 인물로 기억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군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붙잡힌 동료들을 풀어 주고 무기를 손에 넣었습니다. 『고종실록』에는 수백 명이 의금부에 들이닥쳐 옥문을 부수고 죄인 백낙관(白樂寬)을 빼내 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정은 다시 붙잡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에는 풀어 주라는 명이 내려갑니다.

命南間囚罪人白樂寬放送。
남간에 갇힌 죄인 백낙관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사건이 행정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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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교관도 표적이 되었다

군인들의 분노는 민씨 세력에게만 향하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표적이 됐습니다. 별기군을 훈련시키던 호리모토 레이조가 살해됐습니다.

그리고 군인과 서울 하층민들이 서대문 밖 일본 공사관으로 몰려갔습니다. 당시 일본 공사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실록에서는 청수관(淸水館)이라 기록했습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공사관을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일행은 인천으로 빠져나간 뒤 영국 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공격을 단순히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를 미워해서 벌인 일이라고만 보면 부족합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구식 군인들은 자신들이 해고되고, 월급을 받지 못하는 동안 새로운 군대가 일본식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개항 뒤 일본 상인과 일본 상품의 진출에 대한 서울 하층민의 반감도 이미 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의 월급 투쟁은 빠르게 반민씨·반일 운동으로 넓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사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몇몇 군인의 월급 분쟁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군인과 도시 하층민이 결합한 대규모 봉기가 됐습니다.

말풀이
청수관(淸水館) 당시 일본 공사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입니다. 서대문 밖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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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운현궁으로 갔다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갔습니다. 이 대목 때문에 임오군란 전체를 처음부터 대원군이 기획한 정변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군란이 처음에는 월급 문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했고, 이후 대원군이 개입하면서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해졌다고 설명합니다.

대원군에게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는 권력에서 밀려났습니다. 그 뒤 왕비와 여흥 민씨 세력이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왔고, 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대립은 계속됐습니다. 군인들이 찾아왔을 때 대원군에게는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가 열린 셈입니다.

그러나 군인들의 열세 달 밀린 월급이 대원군의 정치적 음모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군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불만과, 그 군란을 이용하려 한 정치 세력의 이해는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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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난병이 궁궐에 들어왔다

7월 24일. 음력 6월 10일입니다. 『고종실록』 첫 기사는 아주 짧습니다.

亂兵犯闕。
난병이 대궐을 침범하였다.

기사는 딱 4자입니다. 그 전날 민겸호의 집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던 군인들이 이제 궁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날 3명이 죽습니다.

민겸호. 김보현. 그리고 이최응입니다.

하지만 3명은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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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죽은 3명

민겸호 — 군인들 월급 문제의 책임자

민겸호는 군인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원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선혜청 당상으로 월급에 책임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항의한 군인들을 잡아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는 전날 자기 집을 빠져나와 궁궐로 피했습니다.

『고종실록』은 그가 대궐 안에 있다가 돌입한 군인들에게 해를 입었다고 적습니다. 월급을 지급하지 못한 국가 전체의 재정 문제와 군제 개편의 모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습니다. 민겸호는 그 모든 책임을 혼자 만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이 볼 때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책임자였습니다.

김보현 — 선혜청을 거쳐 간 또 한 사람

김보현도 월급 문제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판서직을 지냈고 선혜청 당상도 맡았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사적인 이익을 취해 원성을 샀다는 평가도 남아 있습니다.

임오군란 무렵에는 경기감사였습니다. 음력 6월 9일 실록에는 경기감사 김보현의 이름으로 올라온 장계가 실려 있습니다.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자신의 감영 무기고까지 털렸다는 보고였습니다.

다만 며칠 전인 6월 6일 조강하가 경기관찰사에 임명된 기사가 있고, 6월 10일 기사에서 실록은 그를 전 기백(前畿伯) 으로 적습니다. 교체가 막 이루어진 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식 군인들은 민겸호와 함께 그에게도 밀린 군료의 책임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최응 — 대원군의 친형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은 이최응입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습니다. 대원군 쪽 사람을 제거하려는 민씨 세력의 공격이 아니라면 죽을 이유가 없는 인물입니다.

정치적 성향도 단순한 쇄국파가 아니었습니다. 1880년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됐을 때 그 총리대신을 맡은 사람이 바로 이최응입니다.

개화 기구의 수장이 개화 정책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 대원군은 며칠 안에 그 기구를 없앱니다.

이 장면은 임오군란이 이미 누군가가 완전히 지휘하는 정교한 정변의 단계를 넘어섰음을 보여줍니다. 분노의 대상과 정치적 계산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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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은 세 사람을 같이 취급하지 않았다

『고종실록』은 세 사람의 죽음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습니다. 민겸호와 김보현의 기사는 37자입니다. 난군에게 해를 입었다는 짧은 기록과 세주가 전부입니다. 이최응의 기사는 88자입니다.

領敦寧李最應卒。 爲亂軍所害也。
영돈녕 이최응이 졸하였다. 난군에게 해를 입은 것이다.

죽은 방식은 같습니다. 두 기사 모두 위난군소해(爲亂軍所害), 난군에게 해를 입었다고 적습니다.

다른 것은 그 뒤에 무엇이 붙는가입니다.

이최응에게는 졸(卒)이라는 글자가 붙고, 임금의 애도와 예장, 3년치 녹봉, 성복하는 날의 치제, 그리고 왕실에서 내리는 관인 동원부기(東園副器)까지 이어집니다.

민겸호와 김보현에게는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기사 안에는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종은 이최응을 두고 처지지자별(處地之自別), 처지가 각별하다고 말합니다.

죽은 방식은 모두 난군에 의한 살해였지만 기록에서 죽음의 크기는 같지 않았습니다.

말풀이
동원부기(東園副器) 왕실에서 대신 등의 장례에 내려 주던 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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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궁궐에서 사라졌다

군인들의 또 하나의 목표는 왕비였습니다. 명성황후는 민씨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궁궐 안을 뒤졌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 왕비는 이미 궁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왕비가 궁을 탈출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윤태준의 집에 숨었고, 이후 광주와 여주를 거쳐 충주 장호원의 민응식 집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임오군란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상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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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살아 있었고, 실록은 장례를 시작했다

왕비가 궁을 빠져나간 그날. 고종이 대신들에게 말합니다.

中宮殿未知所在也。
중궁전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사에도 같은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즉 이 말은 1930년대 『고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1882년 그날 실제 조정 기록에 있던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 『고종실록』에는 다른 명령이 나옵니다.

中宮殿, 今日午時昇遐。
중궁전이 오늘 오시에 승하하였다.

왕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한 날, 왕비가 죽은 시각이 오시로 정해졌습니다. 거애하는 장소와 장례를 총괄할 사람, 빈전을 둘 장소까지 정해집니다.

이튿날에는 장례를 맡을 종척집사 서른 명 가까운 이름이 한꺼번에 임명됩니다. 그 명단에는 2년 뒤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박영효(朴泳孝)와, 그 밤에 죽는 조영하(趙寧夏)가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왕비는 죽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승정원일기』입니다. 그날부터 왕비가 어디에 머무는지 계속 적습니다.

음력 6월 10일에는 윤태준의 집. 12일에는 민응식의 서울 집. 14일에는 광주의 이근영 집. 15일에는 여주. 21일부터는 충주 장호원의 민응식 집.

모시고 간 사람의 이름까지 날마다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익찬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입니다. 같은 날짜의 『고종실록』에서는 목욕과 습, 소렴, 대렴, 성복 같은 장례 절차가 진행됩니다.

6월 14일에는 두 기록이 정면으로 마주칩니다. 『승정원일기』는 왕비가 이근영의 광주 집으로 이동했다고 적습니다.

같은 날 『고종실록』에서는 왕비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므로 옷으로 장사지내라는 논의가 벌어집니다.

坤殿體魄, 四處搜覓, 終無影形。
곤전의 체백을 사방으로 찾았으나 끝내 형체가 없다.

그날 기사는 791자입니다. 그달 『고종실록』에서 가장 긴 기사입니다. 영의정 홍순목과 판부사 김병국이 통곡하며 반대합니다. 다만 반대의 내용은 왕비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정성껏 찾아본 뒤에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이 기록만으로 조정 전체가 왕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거짓 장례를 치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승정원에서 왕비의 거처를 적은 정보가 고종과 예조의 장례 절차에 언제, 어떤 경로로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같은 조정이 남긴 두 장부에서, 한쪽에는 살아 있는 왕비의 이동 경로가 적혔고 다른 쪽에서는 그 왕비의 장례가 진행됐습니다.

그 상태가 46일 동안 이어집니다.

말풀이
잠어(潛御)·이어(移御)·환어(還御) 왕이나 왕비가 남몰래 머무는 일, 자리를 옮기는 일, 돌아오는 일입니다.
종척집사(宗戚執事) 국장에서 종친과 외척이 맡던 집사 자리입니다.
습·소렴·대렴·성복 왕실 장례에서 시신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염하며 상복을 갖춰 입는 절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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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궁궐까지 난병이 들어오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습니다. 대원군은 9년 만에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장 먼저 군제를 되돌렸습니다.

음력 6월 10일 하루에 두 기사가 이어집니다. 무위영을 훈련도감으로 되돌리고 각 군영도 옛 규례를 복구하라는 명, 그리고 기무아문을 혁파하고 삼군부로 되돌리라는 명입니다. 두 기사를 합쳐 38자입니다. 개화정책의 중심 기구가 38자로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맏아들 이재면(李載冕)을 군사와 재정에 직접 연결되는 자리에 앉힙니다. 변화는 군란 당일부터 시작됐습니다. 음력 6월 9일. 난리가 난 바로 그날 이재면이 무위대장에 임명됩니다.

以李載冕爲武衛大將。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삼는다.

9자입니다. 대원군의 아들이 궁궐 수비군의 지휘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며칠 뒤 왕비 장례의 빈전도감 제조까지 맡습니다. 대원군의 맏아들이 왕비의 빈소를 관리하게 된 셈입니다.

대원군은 군인들의 봉기를 이용해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조선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서 군대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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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군함을 이끌고 돌아왔다

서울을 탈출한 하나부사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빨랐습니다. 군함과 수송선, 보병대가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부사는 병력을 거느리고 다시 제물포에 나타났습니다. 『고종실록』 음력 6월 30일 기사에는 일본 공사의 배가 제물포에 정박했으므로 반접관 윤성진을 내려보내라는 명이 실려 있습니다. 양력으로 8월 13일입니다.

상륙한 일본 병력의 규모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정리되지만 대체로 1,000명대 규모로 봅니다. 하나부사는 그 가운데 호위 병력을 데리고 서울로 들어와 조선 정부에 사과와 처벌, 배상 등을 요구했습니다.

고종이 그를 접견한 것은 음력 7월 7일, 양력 8월 20일입니다. 『고종실록』은 이 접견을 16자로 적습니다.

월급을 받지 못한 조선 군인들이 일으킨 봉기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군사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일본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나라도 움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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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청에게는 일본이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다시 들어온 상황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결국 오장경(吳長慶)·정여창(丁汝昌) 등이 이끄는 청군이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서울에 진주한 청군 규모는 자료에 따라 3,000명에서 4,000명 사이로 정리됩니다.

마건충(馬建忠)과 원세개(袁世凱)도 이때 등장합니다. 1859년생으로 당시 23살이던 원세개는 이후 조선 정치에 오랫동안 깊숙이 개입하는 인물이 됩니다.

이제 서울에는 조선 군인들뿐 아니라 청군과 일본군까지 있었습니다. 군인들 월급 문제로 시작한 사건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 수도를 놓고 서로 계산하는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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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청나라 군함에 실렸다

청군이 가장 먼저 제거하려 한 사람은 군란을 일으킨 평범한 병사가 아니었습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음력 7월 13일, 양력 8월 26일입니다.

『고종실록』은 그날 첫 기사에서 오장경·정여창·마건충이 운현궁을 찾아갔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사에서 대원군이 답례차 청군 진영으로 갑니다. 그 자리에서 붙잡혀 그대로 배에 태워졌습니다. 실록은 둔지미(屯地尾)의 청군 진영이라고 적고, 여러 자료는 남양만 마산포에서 군함에 올랐다고 정리합니다.

대원군은 이후 톈진 보정부(保定府)에 3년 넘게 억류됩니다. 그런데 『고종실록』의 기사 제목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大院君行次天津。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하였다.

본문은 일곱 글자입니다. 나머지는 청나라 측이 보내온 설명입니다. 그 설명에는 놀라운 대목까지 있습니다.

但擧動倉卒, 恐爾上下臣民未諭斯意, 妄生疑懼, 以元代執高麗 忠宣王、忠惠爲例
다만 거동이 창졸간이라 너희 상하 신민이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이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원나라가 고려 충선왕과 충혜왕을 잡아간 예로 여길까 두렵다.

잡아간 쪽이 먼저 ‘왕을 잡아간 옛일과 같은 것으로 보지 말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강제 연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록의 제목에서는 대원군이 스스로 길을 떠난 것처럼 ‘행차’가 됩니다. 대원군의 재집권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군란을 이용해 9년 만에 권력으로 돌아왔지만 한 달 남짓 뒤 외국 군대에 붙잡혀 나라 밖으로 끌려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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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에게는 더 직접적인 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원군을 제거한 청군은 군인들의 거주 지역도 공격했습니다.

대원군이 끌려간 사흘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군인들이 많이 살던 왕십리와 이태원을 습격했습니다.

앞에서 본 군인들 집단 거주지입니다. 박봉 탓에 행상과 좌판으로 생계를 잇던 군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습니다. 어디를 치면 되는지 이미 알았던 셈입니다.

군인과 주민들은 돌을 던지고 총을 쏘며 맞섰지만 화력 차이가 컸습니다. 체포된 인원은 자료에 따라 160명에서 170명 사이로 정리되고, 이 가운데 주동자 10명 안팎이 뒤에 처형된 것으로 전합니다.

『고종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음력 7월 29일, 일본 공사관에 침입해 일본인을 살해한 죄인 손순길 등을 효수해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하라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조정은 그보다 11일 앞선 음력 7월 18일에 이미 윤음을 내린 바 있습니다. 변란과 관계된 문제는 일체 따지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편안히 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체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과 효수 명령 사이는 11일이었습니다. 임오군란은 조선 정부의 군대가 진압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서울의 조선 군인 거주지를 공격해 진압한 사건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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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

군인들이 요구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밀린 월급이었습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녹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별기군을 없앴으며, 5군영을 되살렸습니다. 통리기무아문도 혁파했습니다. 군인들이 밀려났던 자리가 그대로 복구된 것입니다.

그 약속은 한 달을 가지 못했습니다.

음력 7월 13일 대원군이 청군에 붙잡혀 톈진으로 끌려갔습니다. 사흘 뒤 청군이 왕십리와 이태원을 습격했습니다. 대원군이 되살려 놓은 군사제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군대는 이후 청나라 장교들에게 훈련받는 친군영 체제로 다시 짜입니다.

나라의 곳간은 그대로 비었습니다.

오히려 부담이 늘었습니다. 제물포조약으로 일본에 50만 원을 물어 주기로 했고, 피해자 유족과 부상자에게 5만 원을 따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쌀이 없어서 월급을 못 주던 나라가 갚을 돈을 새로 떠안았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군인들이 원한 것실제로 남은 것
밀린 월급 지급대원군이 약속했으나 한 달 만에 무효
별기군 폐지, 5군영 복구한 달간 복구됐다가 친군영 체제로 재편
민씨 척족 제거왕비가 돌아오고 민씨 세력이 복귀
—청군과 일본군의 서울 주둔
—배상금 55만 원
—주동자 처형, 160여 명 체포

쌀 아홉 말을 요구한 사람들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해 뒤,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궁궐에서 칼을 빼 듭니다. 이번에는 개화파 관료들이었습니다.

말풀이
친군영(親軍營) 임오군란 뒤 청나라 장교들의 훈련을 받아 새로 편성된 군영 체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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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내민 계산서 — 제물포조약

대원군이 사라진 뒤 일본과의 협상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1882년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조선과 일본은 두 건의 문서에 함께 서명했습니다.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속약입니다. 『고종실록』은 이날 기사에 두 문서를 나란히 싣습니다. 646자입니다.

제물포조약은 군란의 뒤처리였습니다. 일본은 공사관이 공격받고 일본인이 죽은 책임을 물었습니다. 조선은 피해자 유족과 부상자에게 5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제4관에서는 일본이 입은 손실과 파병 비용 가운데 50만 원을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매년 10만 원씩 5년에 나누어 갚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조항이 있었습니다.

第五, 日本公使館備兵員若干備警事。 【設置修繕兵營, 朝鮮國任之。】
제5관. 일본 공사관에 군사 약간을 두어 경비에 대비하는 일. 【병영을 설치하고 수선하는 일은 조선국이 맡는다.】

일본 공사관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을 둘 수 있게 했습니다. 병영 설치와 수선은 조선이 맡았습니다.

같은 날 서명한 속약은 다른 방향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부산·원산·인천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다닐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삼으며, 일본 공사와 영사 일행이 조선 내지를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약문에는 눈여겨볼 표현도 들어 있습니다. 일본 공사관을 공격한 사람들은 흉도(凶徒) 입니다. 일본이 보낸 군대의 비용은 공사를 호위(護衛) 하기 위해 들어간 돈입니다.

같은 조약 안에서 조선인은 흉도가 되고, 일본군은 호위병이 됩니다. 이 단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년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 공사는 병력을 이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고종실록』은 그때도 일본군의 행동에 호위(護衛) 라는 말을 붙입니다.

갑신정변의 김옥균 일행이 기대했던 일본군은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나타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임오군란 뒤 제물포조약으로 서울 주둔의 근거를 얻은 공사관 수비대가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첫 사건으로 맺은 조약이 두 번째 사건에 필요한 군대를 서울에 남겼습니다.

말풀이
제물포조약 임오군란 뒤인 1882년 8월 30일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입니다. 조선의 배상 부담과 일본 공사관 수비병 주둔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조일수호조규속약 제물포조약과 같은 날 맺은 문서입니다.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다닐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 양화진 개시와 내지 여행을 허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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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받아 간 것도 있었다

일본만 임오군란을 이용한 것은 아닙니다. 청은 군란을 진압한 뒤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오장경과 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이 서울에 남았습니다. 정치·외교 고문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됩니다. 이 장정의 전문에서는 조선을 청의 속방(屬邦) 으로 규정했습니다.

청 상인에게는 한양과 양화진에서 영업할 권리와 내지 통상권이 주어졌고, 청국인이 관련된 사건에는 청 측이 재판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특권도 인정됐습니다.

1870년대까지 조선과 청의 관계가 전통적인 조공 관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임오군란 뒤 청은 군대와 근대적 조약을 이용해 그 관계를 훨씬 직접적인 간섭 구조로 바꾸었습니다.

청군은 서울에 남았습니다. 일본군도 공사관에 남았습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조선 군인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결과가 되었습니다.

말풀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 뒤인 1882년 10월 청과 조선 사이에 체결된 통상 규정입니다. 전문에서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시하고 청 상인에게 여러 특권을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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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비가 돌아왔다

그 사이 장호원에 있던 왕비도 움직였습니다. 음력 7월 25일. 봉상정 서상조가 왕비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적은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의 답은 묘했습니다.

閭巷傳說, 本無確據, 今見爾疏, 知傳說之非無故而發也。
여항의 소문은 본디 확실한 근거가 없었는데, 이제 네 상소를 보니 그 소문이 까닭 없이 나온 것은 아님을 알겠다.

그리고 음력 8월 1일. 왕비가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종실록』은 이 일을 10자로 적습니다.

初一日, 甲寅。 中宮殿還御。
초하룻날 갑인. 중궁전이 환어하였다.

46일 동안 장례의 장본인이었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같은 날 고종은 서연관 이상수의 상소에 답하며 이렇게 인정합니다.

衣襨之非禮, 誠如爾言。
옷으로 장사지낸 것이 예가 아니었다는 것은 참으로 네 말과 같다.

같은 비답에는 다른 말도 함께 있습니다. 일본이 내지를 개항하고 서울에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공법에 통행되는 바이니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년 뒤 그 병력이 궁궐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왕비가 살아 돌아온 사실보다 더 긴 기록이 같은 날 있습니다.

육상궁에 불이 난 일입니다. 영조의 생모를 모신 사당에서 신주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왕비의 환어는 10자. 육상궁 화재는 4자. 그리고 화재 뒤처리에는 200자가 넘게 쓰였습니다.

절차를 마련하라는 하교, 어진을 다시 모시는 일, 예조가 거애 절차를 청하는 계사, 원인을 캐라는 영의정의 아룀, 담당 내관을 파직하는 명령입니다.

실록의 분량은 사건의 크기를 그대로 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행정 절차로 처리해야 했는지가 기록의 크기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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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요구는 아홉 말 쌀이었다

임오군란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군인들이 처음 요구한 것은 나라의 정권이 아니었습니다. 홍순목이 고종에게 보고한 표현을 그대로 따르면 쌀 아홉 말이었습니다. 13달 동안 받지 못한 월급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흘 뒤 군인들이 민겸호의 집을 공격했습니다. 붙잡힌 동료가 풀려났습니다. 일본인 교관이 죽었습니다.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았습니다.

다음 날에는 궁궐에 들어갔고 민겸호·김보현·이최응이 죽었습니다. 왕비는 궁을 빠져나갔습니다.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청군이 들어왔습니다.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왕십리와 이태원에서는 청군이 조선 군인들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50만 원을 부담시키고 서울에 자국 병력을 둘 근거를 얻었습니다. 청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한 통상장정을 관철했습니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이 근대화를 싫어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군제 개편으로 생계를 잃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군인에게도 월급을 주지 못하던 국가 재정이 있었습니다. 별기군과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민씨 척족을 둘러싼 권력 문제가 있었습니다. 개항 뒤 일본의 진출에 대한 도시민의 반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권력투쟁이 올라탔고, 마지막에는 청과 일본의 군대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임오군란을 한 문장으로 부르기가 어렵습니다.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했습니다. 도시 하층민의 저항이 합쳐졌습니다. 정권 교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국제적인 군사 개입으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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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이 끝난 자리

사건이 끝났을 때 서울에는 두 나라의 군대가 남았습니다. 청나라는 대원군을 끌고 갔습니다. 일본은 공사관 수비병을 남겼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돈을 내야 했고, 청과는 조선을 속방으로 적은 장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서울에 남아 있던 청군과 일본군은 다시 서로를 마주 봅니다. 이번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이 일으킨 갑신정변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를 가장 앞에 세운 데에는 1882년 이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시작을 1884년 우정국의 불에서만 찾으면 이야기가 절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두 해 전.

13달치 월급을 받지 못한 군인들이 겨와 모래가 섞인 조악한 쌀 한 섬을 들어 올리며 물었습니다.

“이제 겨우 한 달 치를 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그 질문에서 시작된 군란은 조선의 권력만 뒤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과 일본이 조선 정치 한복판에 군대를 세워 놓는 문까지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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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이 적지 않은 것

이 글은 군인들의 이야기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고종실록』만 펼치면 이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군란이 실록의 지면에 머무는 시간은 이틀입니다. 음력 6월 9일과 10일, 두 날에 1,168자입니다. 그 뒤로 6월의 지면을 채우는 것은 왕비의 장례입니다. 죽지 않은 왕비의 장례입니다.

같은 기간 승정원일기에는 왕비가 어느 집에 머무는지가 날마다 적혀 있습니다. 한쪽 기록에는 장례가 적히고 다른 쪽 기록에는 거처가 적히는 상태가 46일 동안 이어집니다.

그 어긋남을 글자 수로 따라간 글이 따로 있습니다. 「마지막 실록」 1화 「임오군란 — 왕비는 살아 있었고, 실록은 장례를 치렀다」입니다. 실록이 무엇에 지면을 썼고 무엇을 줄였는지가 그 글의 주제입니다.

이 글에서 본 것은 그 반대쪽입니다. 실록이 줄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가. 13달 밀린 월급, 비어 있던 선혜청 창고, 군대를 개편하면서 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왕십리와 이태원에서 붙잡힌 160여 명입니다.

이 글이 남긴 것 가운데 두 해 뒤로 이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제물포조약이 서울에 남긴 일본 공사관 수비병입니다. 1884년 겨울 그 병력이 궁궐로 들어갑니다. 그 사흘의 이야기는 「역사다큐」 2화 갑신정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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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로 보는 임오군란

음력양력일어난 일
6월 5일7월 19일홍순목이 월급 사태를 고종에게 보고
6월 9일7월 23일군란 발발. 호리모토 살해, 일본 공사관 습격
6월 10일7월 24일난병 범궐. 민겸호·김보현·이최응 사망, 왕비 탈출
6월 14일7월 28일옷으로 장사지내라는 명 (791자)
6월 30일8월 13일일본 공사의 배가 제물포에 정박
7월 7일8월 20일고종이 하나부사를 접견
7월 13일8월 26일대원군이 청군 진영에서 붙잡혀 톈진으로 압송
7월 16일8월 29일청군이 왕십리·이태원 습격
7월 17일8월 30일제물포조약·조일수호조규속약 체결
8월 1일9월 12일왕비 환어. 같은 날 육상궁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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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 고종 19년(1882)

『승정원일기』 고종 19년(1882)

참고 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임오군란」 · 「매천 황현이 기록한 임오군란」 · 「제물포조약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 · 「민겸호」 · 「김보현」 · 「이최응」 · 「제물포조약」
  •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제1유형

일러두기

  • 한문 인용은 원문을 기준으로 했고 번역은 원문에서 직접 옮겼습니다.
  • 사건 서술에는 양력을 함께 적었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사 날짜는 당시 기록의 음력을 따랐습니다.
  • 병력 규모와 체포·처형 인원처럼 자료마다 수치가 갈리는 항목은 한 숫자로 확정하지 않고 범위로 적었습니다.
  • 『고종실록』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 이왕직에서 편찬한 기록으로, 이전 왕대의 실록과 편찬 성격이 다릅니다. 이 글에서 『승정원일기』를 함께 본 이유가 그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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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 1화입니다. 다음 편은 갑신정변입니다. 같은 사건을 실록의 글자 수로 헤아린 글은 「마지막 실록」 1화에 있습니다. 전체 목록은 연재 안내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