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란이 나기 나흘 전인 1882년 6월 5일(음력),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임금에게 아뢴다. 440자이다.
훈련도감 군졸들이, 받아야 할 곡식이 온전한 한 섬이 아니라 하여 두 손에 돌 하나씩을 들고 말하였습니다. “열세 달이나 밀린 급료를 이제 겨우 한 달 치만 주면서, 그마저도 이렇게 준단 말이냐?” 이어 창고지기를 때렸는데, 창고지기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 돌은 곡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실록은 겨나 모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두 손에 하나씩 들어 보일 만한 돌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 자리에서 무엇이 지급되었는지를 대신 말해 준다. 앞 구절에서 온전한 한 섬이 아니라고 한 것도 같은 이야기다. 쌀 한 섬은 채워지지 않았고, 채워진 것 가운데 일부는 쌀이 아니었다.
홍순목은 원인까지 짚는다. 같은 나라 군사인데 무위영 군사는 온전히 받고, 훈련도감 군사는 이렇게 받으니 한탄이 없겠느냐고 한다. 십 년을 기르는 것은 하루 쓰기 위함인데 그 사이에 두터움과 얇음이 있으면 평소 쌓인 원망이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고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저들이 우러러 먹고사는 것은 아홉 말 쌀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마저도 해가 지나도록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홉 말은 한 섬도 되지 않는 양이다. 조선에서는 열다섯 말을 한 섬으로 삼았다.
섬(石) 곡식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조선에서는 곡식이면 열다섯 말을 한 섬으로 삼았다.
말(斗) 열 되에 해당하는 부피 단위이다. 오늘날로는 6리터쯤 된다.
훈련도감(訓鍊都監)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중앙 군영이다. 1881년 군제 개편으로 밀려났다.
무위영(武衛營) 1881년에 새로 만들어 궁궐 수비를 맡긴 군영이다.
임금이 답한다.
그렇다. 군졸들이 감히 명을 어기지 않으니 또한 가상하다.
나흘 뒤 군란이 일어난다. 그날 실록이 쓴 글자는 269자이다. 6월 한 달 동안 실록이 쓴 글자는 8,570자이다. 하루 평균 286자이다. 난리가 난 6월 9일은 그 평균을 넘지 못한다.
기사 건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 기사 | 글자 | 기사 하나당 | |
|---|---|---|---|
| 6월 하루 평균 | — | 286 | 63자 |
| 6월 5일 · 나흘 전 | 5건 | 996 | 199자 |
| 6월 9일 · 군란 | 9건 | 269 | 30자 |
그날 기사는 9건으로 적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짧다. 기사 하나당 글자 수가 30자로, 6월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나흘 전 홍순목이 아뢴 날은 다섯 건에 996자였고 기사 하나가 평균 199자였다. 평상일의 기사가 난리 난 날의 기사보다 여섯 배 넘게 길다.
난리가 실록에 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짧게 실렸다. 그 짧음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다음 절에서 살펴본다.
그런데 이 편의 중심은 군란이 아니다. 1882년 6월 실록에서 가장 긴 기사는 791자짜리 장례 명령이고, 그 장례의 주인공은 죽지 않았다.
글자수는 모두 한문 원문을 헤아린 값이다. 한글 번역문이 아니다. 구두점과 띄어쓰기, 교정부호는 빼고 한자만 헤아렸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같은 기준으로 헤아렸다. 인용한 번역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I. 난리가 난 날, 아홉 건
6월 9일 실록의 기사는 아홉 건, 모두 269자이다. 첫 3건은 군란과 상관이 없다.
| 순번 | 자 | 기사 제목 |
|---|---|---|
| 1 | 17 | 인정전에 나아가 종묘의 기우제에 쓸 향축을 친전하다 |
| 2 | 9 | 찬배 죄인 한규직을 방송하라고 명하다 |
| 3 | 8 | 함녕전 역사를 정지하라고 명하다 |
| 4 | 29 | 무위 대장 이경하에게 동별영에서 소란을 일으킨 군졸들을 조사하도록 하다 |
| 5 | 89 | 군사들이 의금부에 돌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남간에 갇힌 백낙관을 데리고 가다 |
| 6 | 56 | 난민들이 청수관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살해하는 등의 변고가 발생하다 |
| 7 | 9 | 이재면을 무위 대장에 임명하다 |
| 8 | 32 | 무위 대장 이경하 등을 파직하도록 하다 |
| 9 | 20 | 주교사에서 받던 각곡을 각 영 등으로 하여금 종전대로 받도록 명하다 |
그날 아침 임금은 비를 빌고 있었다. 가뭄이 여러 달째였고 전날 기우제를 다시 지내라 명했으며, 그날 인정전에 나가 향과 축문을 손수 건넸다.
일곱 번째 기사는 9자이다. 以李載冕爲武衛大將(이이재면위무위대장)。 이재면(李載冕)은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이고 임금의 친형이다. 난리가 난 그날 안에 대원군의 아들이 궁궐 수비군의 지휘권을 받는다.
다섯 번째 기사에서 군사 수백 명이 의금부에 들이닥쳐 백낙관(白樂寬)을 데리고 나간다. 의정부는 다시 잡아 가두자고 청하고 임금은 윤허한다. 이튿날 조정은 그를 풀어 주라고 명한다. 11자이다.
남간에 갇힌 죄인 백낙관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잡으라는 명령이 하루 만에 풀어 주라는 명령이 된다. 이미 벌어진 일을 나중에 문서로 인정해 주는 꼴이다. 이 달 내내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기우제(祈雨祭) 비가 오기를 빌던 나라의 제사이다.
향축(香祝)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이다. 임금이 손수 건네는 것을 친전(親傳)이라 했다.
찬배(竄配)·방송(放送) 귀양 보내는 일과 풀어 주는 일이다.
동별영(東別營) 훈련도감에 딸린 군영이다. 군란이 시작된 곳이다.
의금부(義禁府)·남간(南間) 중죄인을 다루던 관청과 그 안에 있던 옥사의 이름이다.
청수관(淸水館) 서대문 밖에 있던 건물로, 당시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있었다.
II. 네 글자와 열세 달
6월 10일 실록의 첫 기사는 7자이다. 初十日(초십일)。 亂兵犯闕(난병범궐)。 날짜 세 자를 빼면 사건 자체는 네 글자다.
같은 날 가장 긴 기사는 319자짜리 기사인데,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만난 자리(소견·召見)를 적은 것이다. 나흘 전 홍순목이 아뢴 것이 거기서 그대로 되풀이된다.
淳穆曰: “向筵已有所仰達, 而未放之料, 今爲十三朔矣。”
임금이 말하였다. “군량을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홍순목이 말하였다. “지난번 경연에서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주지 못한 급료가 이제 13달입니다.”
向筵已有所仰達(향연이유소앙달), 지난번 경연에서 이미 아뢰었다는 말이 붙는다. 나흘 전의 그 자리다.
III. 같은 날, 임금은 두 번 말한다
같은 자리에서 임금이 이렇게 말한다.
임금이 말하였다. “중궁전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 대신들이 이에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같은 날 일곱 번째 기사에서 같은 임금이 교서를 내린다. 50자이다.
임금이 말하였다. “중궁전이 오늘 오시(낮 11시~오후 1시)에 승하하였다. 거애하는 절차는 전례대로 마련하고, 망곡할 자리는 명정전 뜰로 하라.” 또 말하였다. “총호사는 영의정이 맡으라.” 또 말하였다. “빈전은 환경전으로 하라.”
왕비의 소재를 모른다고 한 날, 왕비가 죽은 시각이 낮 열한 시에서 오후 한 시 사이로 못 박힌다. 50자 안에 임금의 명령(敎曰)이 셋이다.
여기서 바로 물어야 한다. 이 어긋남은 1882년 그날에 생긴 것인가, 아니면 1930년대 편찬실에서 생긴 것인가. 고종실록만 읽어서는 알기 어렵다.
중궁전(中宮殿) 왕비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승하(昇遐) 임금이나 왕비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거애(擧哀)·망곡(望哭) 상을 당해 소리 내어 우는 절차와, 멀리서 바라보며 곡하는 일이다.
총호사(總護使) 국장을 총괄하는 책임자이다.
빈전(殯殿) 장사 지내기 전까지 관을 모셔 두는 곳이다.
교서(敎書) 임금이 내리는 명령 문서이다. 원문에서는 敎曰(교왈), 곧 ‘임금이 말하였다’로 시작한다.
IV. 두 기록을 같은 날에 펼치면
『고종실록』은 조선의 사관(史官)이 쓴 책이 아니다.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에 이왕직(李王職)이 편찬했고, 원고는 일본인 교수의 감수와 일본인 장관의 결재를 거쳐 인쇄되었다. 견주어 볼 다른 판본도 없다. 그러나 대조할 기록이 하나 있다. 승정원일기다.
6월 10일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아 본다. 실록 319자, 승정원일기 500자이다.
| 고종실록 | 승정원일기 | |
|---|---|---|
| 사관을 좌우로 나누라는 지시 | 없음 | 上曰, 史官分左右 임금이 말하였다,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라 |
| 대왕대비전·왕대비전 안부 | 없음 | 문답 세 차례 |
| 임금의 몸을 묻는 말 | 없음 | 聖體驚動餘, 若何? 놀라신 뒤 옥체가 어떠하십니까 |
| 물러나는 장면 | 없음 | 命史官就座, 又命退 사관에게 자리에 앉으라 하고 물러가라 명하였다 |
| 임금의 말을 적는 방식 | 敎曰 (하교하기를) | 上曰 (임금이 말하기를) |
| 중궁전이 어디 있는가 | 中宮殿, 未知所在也 | 中宮殿未知所在也 중궁전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
실록은 안부 인사와 의례와 물러나는 장면을 쳐냈다. 임금의 말을 적는 방식도 바꿨다. 그런데 중궁전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문장은 양쪽에 똑같이 있다.
그 말은 1930년대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1882년 6월 10일 술시(저녁 7~9시), 창덕궁 유덕당에서 실제로 나온 말이다.
승정원일기와 실록 비교(6월)
본론이다. 승정원일기는 그날부터 왕비가 어디 있는지 날마다 적는다. 아래는 그 가운데 6월분만 옮긴 것이다. 이 기록은 왕비가 궁으로 돌아오는 8월 1일까지, 모두 마흔여섯 날 동안 이어진다.
| 날짜 | 승정원일기가 적은 것 | 고종실록이 적은 것 |
|---|---|---|
| 6월 10일 | 사어 윤태준의 집에 잠어하다 | 오시에 승하하다 (50자) |
| 6월 11일 | 윤태준의 집에 그대로 머물다 | 목욕과 습하는 시각을 정하다 |
| 6월 12일 | 익찬 민응식의 서울 집으로 옮기다 | 소렴을 미시(오후 1~3시)에 행하다 |
| 6월 13일 | 민응식의 집에 그대로 머물다 | — |
| 6월 14일 | 임천군수 이근영의 광주 시골집으로 옮기다 | 대렴 · 옷으로 장사지내라 (791자) |
| 6월 15일 | 이조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으로 옮기다 | 장례를 거두라 청하는 차자와 상소 |
| 6월 16~20일 | 여주에 그대로 머물다 | 장례를 거두라는 논쟁이 이어지다 |
| 6월 18일 | (여주) | 성복을 행하다 |
| 6월 21~30일 |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머물다 | 능호를 적은 문서를 도로 들이라 명하다 |
배종한 사람의 이름도 날마다 같다. 익찬 민응식(閔應植)과 진사 민긍식(閔肯植), 6월 21일부터는 오위장 민영기(閔泳驥)가 붙는다. 실록의 장례 기사 어디에도 이 이름들은 없다.
잠어(潛御)·이어(移御)·잉어(仍御)·환어(還御) 임금이나 왕비가 몰래 머무는 일, 자리를 옮기는 일, 그대로 머무는 일, 돌아오는 일이다.
익찬(翊贊)·사어(司禦) 세자를 호위하는 일을 맡은 세자익위사의 관직이다. 익찬은 정6품, 사어는 종5품이다.
배종(陪從) 모시고 따라가는 일이다.
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성복(成服) 시신을 씻겨 옷을 입히고, 싸서 묶고, 상주가 상복을 갖춰 입기까지의 절차이다.
능호(陵號) 왕이나 왕비의 무덤에 붙이는 이름이다.
차자(箚子)·상소(上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짧은 글과 긴 글이다.
장례를 맡은 30명 임명
6월 11일 첫 기사는 186자이다. 제목은 「이경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인데, 원문의 마지막 네 글자가 무엇을 위한 임명인지 말해 준다.
영평군 이경응, 완평군 이승응, 판종정경 이재면 … 금릉위 박영효, 행 병조판서 조영하 … 부호군 민영준을 모두 종척집사로 임명한다.
종척집사(宗戚執事)는 나라의 장례에서 왕실 친척과 외척이 맡는 자리다. 서른 명 가까운 이름이 하루 만에 배치된다. 장례는 말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 명단에서 두 이름이 눈에 띈다.
| 이름 | 1882년 6월 11일 | 2년 뒤 |
|---|---|---|
| 박영효(朴泳孝) | 금릉위, 종척집사 |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
| 조영하(趙寧夏) | 행 병조판서, 종척집사 |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 밤에 죽는다 |
정변을 일으킬 사람과 그 밤에 죽을 사람이 같은 명단에 나란히 있다. 그때 두 사람은 같은 장례의 집사였다.
이재면의 자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6월 9일에 무위 대장이 되고, 11일에 종척집사가 되며, 17일에는 빈전도감 제조로 나온다. 빈전도감은 관을 모신 곳을 관리하는 임시 관청이고, 제조는 그 책임자다. 대원군의 맏아들이 왕비의 빈소를 맡는다. 그리고 7월 13일, 그의 아버지 대원군이 천진으로 떠난다.
6월 14일, 두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
○ 中宮殿, 移御于林川郡守李根永廣州鄕第, 陪從, 翊贊閔應植, 進士閔肯植。
중궁전이 임천군수 이근영의 광주 시골집으로 옮기셨다. 모시고 간 사람은 익찬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이다.
고종실록 — 791자, 그달 가장 긴 기사
「중궁전의 옥체를 찾을 수 없으므로 옷을 가지고 장사지내도록 하다」
같은 조정이 한쪽 장부에는 거처를 적고 다른 쪽 장부에는 시신을 찾을 수 없다고 적었다. 같은 날이다.
V. 791자 — “그때의 일은 내가 보았다”
그달 가장 긴 기사를 열어 본다. 지금 자리에 있는 대신과 이전에 대신을 지낸 사람들이 예조의 책임자를 데리고 임금 앞에 들어온 자리다.
임금이 말하였다. “곤전의 체백을 사방으로 찾았으나 끝내 형체가 없어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또 그때의 일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옷으로 장사지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나흘 전에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고, 이날은 자기가 보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 붙은 세주는 이렇게 적는다.
【처음에 난군이 갑자기 대궐을 침범하였는데 그 기세가 몹시 흉악하여 궐 안이 놀라 떨고 위아래가 솥처럼 끓었으며, 끝내 중궁전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 기사 안에서 본문과 세주가 어긋난다. 본문의 임금은 보았다 하고, 세주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세주 끝에 云(운)이 붙어 있다. ‘~라고 한다’는 뜻으로, 전해 들은 말임을 표시하는 글자다. 세주는 본문을 설명하려고 붙는 것인데, 여기서는 본문을 무너뜨린다.
대신들이 반대한다. 반대의 내용이 중요하다.
홍순목이 말하였다. “지난날 일은 궐 안팎 백 보 안에서 일어났는데 어찌 찾을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겠습니까?”
古人之於亂軍中, 有失父母者, 經年呼泣於道路, 終得其遺骸。
옛사람 중에 난군 속에서 부모를 잃은 이가 해를 넘겨 길에서 울부짖어 끝내 그 유해를 얻었습니다.
아무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정성껏 찾자고만 한다. 논쟁의 대상은 왕비의 생사가 아니라 장례 절차를 언제 시작하느냐이다.
그리고 홍순목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하교를 받들면 당세의 죄인일 뿐 아니라, 사책에 적혀 만세의 죄인이 됩니다.
임금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到今萬無奈何矣(도금만무내하의), 이제 와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그리고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이것이다.
임금이 말하였다. “오늘 경연에서 한 말을 조지에 반포하라.”
조지(朝紙)는 조정의 소식을 적어 관청에 돌리던 문서로, 오늘날의 관보에 해당한다. 임금은 이 대화를 공개하라고 명한다. 그들은 기록될 것을 알면서 말하고 있었다.
체백(體魄) 죽은 이의 몸이다.
곤전(坤殿) 왕비를 이르는 또 다른 말이다.
세주(細註) 본문 사이에 작은 글씨로 끼워 넣는 주석이다. DB실록에서는 【 】 안에 들어간다.
하교(下敎)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말이다.
사책(史冊) 역사를 적은 책이다. 여기서는 훗날의 실록을 가리킨다.
조지(朝紙) 조정의 결정과 인사를 적어 관청에 돌리던 문서이다.
그리고 임금이 뒤집는다
7월 25일, 봉상시의 관원 서상조(徐相祖)가 왕비가 몸을 숨기고 있으니 모셔 오시라고 글을 올린다. 그에 대한 임금의 답, 곧 비답(批答)이다.
요사이의 변은 옛 문서에도 없던 일이다. 저잣거리의 소문은 본디 확실한 근거가 없었는데, 이제 네 상소를 보니 그 소문이 까닭 없이 나온 것은 아님을 알겠다.
소문에 근거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소문이 승정원 장부에 46일 내내 날마다 적혀 있었다. 8월 1일 왕비가 돌아오고, 8월 3일 의정부는 中宮殿奉迎, 乃國家大慶也(중궁전봉영, 내국가대경야), 중궁전을 맞아들이는 것은 나라의 큰 경사라 한다. 그래서 청나라와 일본에 알리자고 아뢴다.
13년 뒤 이 왕비는 실제로 죽는다. 그때 실록이 죽음에 쓴 글자는 191자로, 1882년 6월 14일 하루의 791자보다 적다. 그 이야기는 이 시즌의 다른 편에서 다룬다.
VI. 실록이 일기보다 길어지는 단 두 날
6월 전체로 보면 실록 8,570자에 승정원일기 59,725자, 7.0배이다. 날마다 그 배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본다.
| 날짜 | 실록 | 일기 | 배율 | 그날 실록이 쓴 것 |
|---|---|---|---|---|
| 6월 24일 | 19 | 2,151 | 113.2 | 사직 상소 하나 |
| 6월 22일 | 320 | 10,410 | 32.5 | 도고(독점 상권) 혁파 · 화폐 주조 중단 |
| 6월 9일 | 269 | 1,436 | 5.3 | 군란 당일 |
| 6월 10일 | 899 | 1,785 | 2.0 | 범궐 · 승하 반포 |
| 6월 17일 | 959 | 692 | 0.7 | 장례 철회 상소 23건 |
| 6월 14일 | 946 | 685 | 0.7 | 옷으로 장사지내라 |
실록이 당대 일지보다 길어지는 날은 6월 중에 이틀뿐이고, 그 이틀 모두 죽지 않은 왕비의 장례를 적은 날이다.
6월 17일은 더 선명하다. 실록 23건 959자가 거의 전부 장례 철회 논쟁인데, 같은 날 승정원일기 15건 692자에는 그 논쟁이 한 줄도 없다. 일기에는 변고가 났을 때 임시로 두던 기록관(사변가주서)의 보고, 인사 발령, 의금부의 일상 업무만 있다.
7월에도 같은 자리가 있다. 7월 17일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날이 0.9배이다. 반대쪽 끝에는 7월 7일이 있는데, 임금이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접견한 날로 실록 16자에 일기 1,321자, 82.6배이다.
다만 배율이 크다고 실록이 숨긴 것은 아니다. 6월 22일이 그 반례다. 일기 10,410자 가운데 7,301자가 문서 하나인데,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올린 글(합계·合啓)이다. 홍국영을 비롯한 옛 역적들을 처벌하라는 요청으로 군란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날마다 되풀이해 올리던 정해진 형식의 문서다. 배율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려 줄 뿐, 답을 주지는 않는다.
VII. 卒 한 글자의 무게
6월 10일에 세 사람이 죽는다. 실록은 둘과 하나를 다르게 적는다.
선혜청 제조 민겸호와 지사(전 혜당) 김보현이 난군에게 해를 입었다. 【겸호와 보현이 마침 대궐 안에 있었는데, 난군이 돌입하여 그들에게 해를 입었다.】
37자. 본문과 세주가 전부다.
영돈녕 이최응이 졸하였다. 난군에게 해를 입은 것이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대신의 부고가 홀연히 이르니 이 무슨 일인가. 평소의 곧고 단정한 자태와 어질고 후한 성품으로 보나, 더구나 처지가 각별한 것으로 보나. … 졸한 영돈녕의 상에 예장하는 절차는 전례대로 거행하라. 동원부기 한 벌을 보내고, 녹봉은 3년까지 그대로 주며, 성복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라.”
88자.
죽은 방식은 같다. 두 기사 모두 爲亂軍所害(위난군소해)이다. 실록은 이최응의 죽음을 감추지 않는다.
다른 것은 그 뒤에 무엇이 붙는가이다. 민겸호와 김보현에게는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이최응에게는 卒이라는 글자와 임금의 애도와 예장과 관과 녹봉 3년과 치제가 붙는다. 이최응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다. 處地之自別(처지지자별), 처지가 각별하다는 말이 그것을 가리킨다.
동원부기(東園副器)를 기억해 두자. 왕실에서 내려 주던 관이다. 2년 뒤 갑신정변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다시 나온다. 누구에게 가고 누구에게 가지 않는지, 같은 잣대가 두 사건을 가로지른다.
졸(卒) 벼슬아치의 죽음에 쓰는 말이다. 살해되었다고만 적는 것과 격이 다르다.
영돈녕(領敦寧) 돈녕부의 으뜸 벼슬이다. 왕실의 친척에게 주던 명예직에 가깝다.
예장(禮葬)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치러 주는 장례이다.
치제(致祭) 임금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 주는 일이다.
동원부기(東園副器) 왕실에서 공신이나 대신의 장례에 내려 주던 관이다.
VIII. 亂(난)에서 凶徒(흉도)로 — 조약문이 가져온 말
실록 원문에 실제로 쓰인 말을 순서대로 놓아 본다.
| 날짜·기사 | 원문의 말 | 누구를 가리키나 |
|---|---|---|
| 6월 9일 4·5 | 作鬧軍卒 (작뇨군졸) | 동별영에서 소란을 일으킨 군졸 |
| 6월 9일 6 | 亂民 (난민) | 청수관을 습격한 무리 |
| 6월 10일 1 | 亂兵 (난병) | 대궐을 침범한 무리 |
| 6월 10일 3·6 | 亂軍 (난군) | 대신을 죽인 무리 |
| 6월 10일 4 | 作鬧輩 (작뇨배) | 임금이 어루만지겠다고 한 대상 |
| 7월 25일 | 六月軍卒之亂 (유월군졸지란) | 한 달 반 뒤, 다시 군졸 |
모두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작뇨(作鬧)는 소란을 피운다는 뜻이다. 그 말이 난민으로, 난병으로, 난군으로 옮겨 간다. 난(亂) 자가 처음 붙는 지점이 기록이 이 일을 사건으로 인정한 지점이다. 임금이 직접 말할 때는 다시 작뇨배로 돌아온다. 어루만질 대상에게는 난 자를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7월 17일, 새 말이 들어온다.
조선의 흉도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직무를 보던 인원이 많이 화를 입었다.
제물포조약 본문 첫머리다.
조선의 기록은 亂 자 계열을 쓰는데, 일본과 맺은 조약문은 凶徒(흉도)를 쓴다. 그리고 배상 조항에 이 말이 다시 나온다.
제4조. 흉도의 난폭한 거사로 인하여 일본국이 입은 손해와 공사를 호위한 수륙 병비 가운데 50만 원을 조선이 메운다.
호위(護衛)라는 말이 여기 있다. 2년 뒤 갑신정변의 밤, 일본 공사가 병력을 거느리고 대궐로 들어오는 장면에 실록이 붙이는 글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 병력이 서울에 있을 수 있었던 근거가 제5조다.
제5조. 일본 공사관에 병원 약간을 두어 경비에 대비하는 일. 【병영을 설치하고 수선하는 일은 조선국이 맡는다.】
흉도와 호위, 두 낱말이 같은 문서 안에 들어 있다. 흉도(凶徒)는 흉악한 무리라는 뜻이고, 호위(護衛)는 지켜 준다는 뜻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조선 사람은 흉악한 무리가 되고 일본 군대는 지켜 주는 쪽이 된다. 이 조약은 646자이다. 2년 뒤 갑신정변 사흘 동안 고종실록이 쓴 글자가 658자이니, 조약 한 건이 정변 사흘과 거의 같다.
작뇨(作鬧) 소란을 피우는 일이다.
난민(亂民)·난병(亂兵)·난군(亂軍) 난리를 일으킨 백성, 군사, 군대를 이르는 말이다.
흉도(凶徒) 흉악한 무리이다.
호위(護衛) 곁에서 지켜 주는 일이다.
속약(續約) 이미 맺은 조약에 덧붙여 맺는 문서이다.
관(款) 조약의 조항을 세는 단위이다.
IX.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하다」
7월 13일 두 번째 기사의 제목이다. 305자인데, 본문은 일곱 자이다.
大院君行次天津(대원군행차천진)。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하였다.
나머지 298자는 전부 세주 안에 들어간 청나라의 효유문(曉諭文), 곧 백성에게 사정을 알려 타이르는 글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배에 실어 톈진(천진)으로 압송한 것이고, 그는 3년 넘게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데 끌고 간 쪽이 스스로 해명을 붙인다.
다만 거동이 창졸간이라 너희 상하 신민이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이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원나라가 고려 충선왕과 충혜왕을 잡아간 예로 여겨 황제의 높고 깊은 뜻을 크게 저버릴까 두렵다.
납치로 보지 말라는 말을, 데려간 쪽이 먼저 한다. 그것도 원나라가 고려 왕을 잡아간 전례를 직접 꺼내서. 실록은 그 문서를 그대로 싣고, 제목에는 행차라고 쓴다.
이틀 뒤 조선 조정은 조병호와 조우희를 호행사(護行使)로, 이건창을 호행관(護行官)으로 임명한다. 모시고 간다는 말이다. 護 자가 한 달 사이에 두 번 나온다. 조약문에서 한 번, 여기서 한 번.
이 물음은 시즌 끝까지 간다.
효유문(曉諭文) 백성에게 사정을 알려 타이르는 글이다.
호행사(護行使)·호행관(護行官) 먼 길을 모시고 가는 이에게 임명하는 벼슬이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없어진 날의 기사 제목은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이다. 주어가 조선이고 능동태다. 그 문장의 첫 판본이 1882년 7월 13일에 있다.
X. 8월 1일 기록
왕비가 돌아온 날이다. 실록은 9건 746자를 쓴다.
초하룻날 갑인. 중궁전이 환어하였다.
열 자이다.
같은 날 육상궁(毓祥宮)에 불이 난다. 영조의 생모를 모신 사당이다.
육상궁에 불이 났다.
네 자이다.
그런데 그 뒤가 다르다. 화재의 사후 처리에 실록은 239자를 쓴다. 신주를 꺼내지 못했으니 절차를 마련하라는 명, 임금의 초상화(어진)를 도로 모시는 일, 예조가 상복으로 갈아입고 곡하는 절차를 청하는 글, 원인을 캐라는 영의정의 아룀, 담당 내관을 파직하는 명령이다.
환어(還御) 임금이나 왕비가 궁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신주(神主) 죽은 이의 이름을 적어 혼을 모시는 나무패이다.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이다.
비답(批答) 신하가 올린 글에 임금이 내리는 답이다.
왕비가 살아 돌아온 일에 10자, 사당에 불난 일의 뒷수습에 239자이다.
그날의 마지막 기사는 서연관 이상수의 상소에 대한 비답 156자이다.
나의 부덕으로 유월의 변이 있었고, 의리가 땅을 쓸었으며 옷으로 장사지낸 것이 예가 아니었다는 것은 참으로 네 말과 같다. 그러나 천도가 밝게 돌아 왕법이 대강 펴지고 적위가 환어하였으니 다행이 이보다 크겠는가?
옷으로 장사지낸 일이 예가 아니었다고 임금이 스스로 인정한다. 6월 14일에 791자를 들여 밀어붙인 일을, 46일 후 비답 한 줄에서 시인한다.
같은 비답이 이어진다.
일본인이 개항장을 통해 내지에 들어오고 경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국제 공법상 허용되는 관행에 해당하며, 당시 형세에 따라 그렇게 된 일이므로 굳이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서울에 일본군이 주둔하는 것을 (국제) 공법상 통용되는 일이라 부른다. 2년 뒤 그 병력이 대궐로 들어온다.
XI. 셋을 갈라 두기
첫째, 헤아린 값이다. 6월 실록 136건 8,570자에 승정원일기 730건 59,725자, 7월은 84건 6,356자에 720건 31,859자이다. 6월 9일 269자, 6월 14일의 한 기사 791자, 7월 17일 조약 646자, 8월 1일 환어 10자. 배율이 1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6월에 이틀이다.
둘째, 확인되는 사실이다. 승정원일기가 6월 10일부터 7월 말까지 왕비의 거처와 배종자를 날마다 적었다는 것. 같은 기간 고종실록이 장례 절차를 적었다는 것. 中宮殿未知所在也가 두 기록에 똑같이 있다는 것. 6월 14일 기사의 본문과 세주가 서로 어긋난다는 것. 제물포조약 원문에 凶徒(흉도)와 護衛(호위)가 있다는 것. 청나라 효유문이 원나라의 고려 왕 압송을 스스로 거론했다는 것. 『고종실록』이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이왕직에서 편찬되었다는 것.
셋째, 해석이다. 앞의 둘을 원인과 결과로 잇는 순간부터가 해석이다.
이 편에서 한 가지는 해석을 넘어섰다. 소재를 모른다는 임금의 말은 두 기록에 모두 있으므로 1882년 일어난 사실이다. 편찬자가 넣은 문장이 아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열려 있다. 승정원일기에 거처가 적혀 있는데도 장례가 진행된 것을 두고 “조정이 알면서 속였다”고 쓰면 근거가 모자란다. 소재를 적은 기사는 날마다 29자짜리 한 줄이고, 임금이 그것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승정원이 적는 장부와 예조가 굴리는 장례 절차가 서로 닿지 않는 별개의 계통이었을 수도 있다.
6월 14일 본문과 세주의 어긋남도 그렇다. 세주가 1930년대 편찬실에서 붙인 것이라면 편찬자가 본문을 의심한 흔적이고, 1882년의 사료에 이미 있었다면 당대의 혼란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라고 한다’는 뜻의 云 한 글자만으로는 갈리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6월 14일에는 그 자리에 대응하는 기사가 없으므로 이 대조로는 판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배율이 크다고 실록이 숨긴 것도 아니다. 6월 22일의 32.5배는 일기에 관행으로 싣던 문서가 길게 실린 결과였다. 이 연재는 그런 반례를 감추지 않는다. 감추면 나머지 수치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다만 판별과 무관하게 남는 것이 있다. 한 왕조가 46일 동안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를 치렀고, 그 기록이 두 장부에 서로 다르게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장례가 그달 실록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가져갔다.
6월 한 달을 헤아리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군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난리를 일으킨 것은 군인들인데, 그들이 실록의 지면에 머무는 시간은 이틀이다. 6월 9일 269자, 10일 899자. 그 뒤로는 목욕과 습, 소렴과 대렴, 성복과 능호가 이어지고, 장례를 거두라는 차자와 상소가 줄을 잇는다. 열세 달 밀린 급료도, 아홉 말 쌀도, 이름이 적혀 옥에 갇혔다 풀려난 사람들도 더는 나오지 않는다. 그 자리를 죽지 않은 사람의 장례가 차지한다.
편집을 해 본 사람은 이 모양을 안다. 사건을 다루는 지면과 절차를 다루는 지면은 성질이 다르다. 사건은 취재해야 하고 사실 확인을 거쳐야 하며 틀리면 책임이 따른다. 절차는 다르다. 날짜를 받고 담당자를 정하고 전례를 찾아 붙이면 저절로 분량이 나온다. 쓰기 어려운 쪽이 줄고 쓰기 쉬운 쪽이 늘어난다. 의도가 없어도 그렇게 된다.
6월 14일이 그 극단이다. 그날 실록은 791자를 썼고 승정원일기는 685자를 썼다. 한 달 통틀어 실록이 당대 일지보다 길어지는 이틀 가운데 하나다. 무엇을 쓰느라 길어졌는가. 빈 관에 옷을 넣으라는 논의다. 그 논의에서 다툰 것도 왕비의 생사가 아니라 장례를 언제 시작하느냐였다. 아무도 다른 가능성을 말에 올리지 않는다. 전제가 한 번 깔리면 그것을 되묻는 사람은 회의를 지연시키는 사람이 되고, 남는 것은 일정 조정뿐이다.
이 편은 그 지면의 모양을 따라갔다. 그래서 군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못했다. 왜 열세 달이나 급료가 밀렸는지, 왜 무위영과 훈련도감의 대우가 갈렸는지, 난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다큐」 1화 임오군란에서 따로 다룬다. 실록이 줄인 자리를 채우는 일은 다른 기록으로 해야 한다.
그날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 한 말을 조지에 반포하라. 홍순목은 사책에 적혀 만세의 죄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록될 것을 알면서 말하고 있었다. 기록될 것을 알고 하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은 다르다. 회의록이 남는 회의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게 되는지, 편집자라면 다들 알고 있다. 실록에 남은 791자는 그 방에서 말해진 것의 전부가 아니라 남겨도 된다고 판단된 것의 전부다.
출처
고종실록 — 19권, 고종 19년(1882) 6월 5일 3 · 6월 9일 1 2 5 7 · 6월 10일 1 3 4 6 7 11 · 6월 11일 1 · 6월 14일 3 · 7월 13일 2 · 7월 15일 1 · 7월 17일 2 · 8월 1일 1 3 9
승정원일기 — 고종 19년(1882) 6월 10일 중궁전 소재 대신 소견 · 6월 14일 중궁전 소재 · 6월 15일 중궁전 소재 · 6월 21일 중궁전 소재 · 6월 22일 양사 합계 · 7월 25일 서상조 상소 · 8월 3일 봉영 자문
인용한 번역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글자수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띄어쓰기·교정부호를 제외하고 한자만 헤아렸다. 두 기록을 같은 기준으로 헤아렸다. 긴 인용에서 줄임표(…)로 표시한 곳은 중간을 생략한 것이다.
『고종실록』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 이왕직에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 사관이 사초를 바탕으로 만든 이전 실록들과 성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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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실록」의 첫 편이다. 다음 편은 갑신정변이며, 이 편에 나온 동원부기와 凶徒(흉도)와 護衛(호위)가 거기서 다시 나오고, 종척집사 명단에 있던 박영효와 조영하가 각각 정변을 일으키고 그 밤에 죽는다. 전체 목록은 연재 안내에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