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조선왕조실록 원문 기사 개수는 41만 3,577건입니다. 필자는 이 기록 전체를 컴퓨터에 담아 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파이썬 코드를 이용해 데이터를 정리한 결과를 바탕으로 연재를 씁니다.
그런데 세다 보니 이 숫자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대를 두 번 적은 것이 들어 있고, 실록이 아닌 자료집도 섞여 있고, 조선이 망한 뒤에 만들어진 것도 3만 건이 넘습니다.
이 글은 그 41만 건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갈라 보는 글입니다. 연재의 모든 숫자가 여기서 나옵니다.
I. 실록은 임금이 죽은 뒤에 만듭니다
먼저 실록이 무엇인지부터 봐야 합니다.
임금이 살아 있는 동안 사관은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날그날 적습니다. 이 기록이 사초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실록청이라는 임시 관청을 세우고, 사초와 여러 관청의 문서를 모아 한 임금의 시대를 정리합니다. 그것이 실록입니다.
말풀이
사관(史官) · 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그때그때 적어 두던 관리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 자리에도 따라 들어가 적었습니다.
사초(史草) · 사관이 적어 둔 기록입니다. 실록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실록청(實錄廳) · 실록을 만들려고 임시로 세운 관청입니다. 일이 끝나면 없앱니다.
세초(洗草) · 실록을 다 만든 뒤 사초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실록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정리된 기록입니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고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연재가 계속 묻는 것이 그 고름의 흔적입니다.
II. 다 만든 뒤에는 원고를 없앴습니다
실록이 완성되면 만들 때 쓴 재료를 없앴습니다.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우는 세초입니다. 종이를 다시 쓰려는 뜻도 있었고, 사초에 적힌 내용이 새어 나가 사람이 다치는 일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말풀이
초초(初草)·중초(中草) · 실록을 만드는 동안 거치는 단계입니다. 초초는 처음 뽑은 원고, 중초는 그것을 한 번 다듬은 원고입니다.
시정기(時政記) · 각 관청이 한 일을 사관이 정리해 둔 기록입니다. 사초와 함께 실록의 재료가 됩니다.
효종 8년(1657) 9월, 선조수정실록을 만들던 실록수정청이 임금에게 아룁니다. 4년 전 인조실록을 만들고 세초할 때 시정기만은 태우지 않고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할지 묻는 내용입니다. 아래 번역은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으로 따져 보면 여러 조정의 역사 기록이 두 벌로 나뉘어 함께 전해져서는 안 되므로, 전에 사국(史局)의 일을 맡았던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전에 사국에서 일했던 옛 신하 김신국·민형남·심액에게 물었으나,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섣불리 단정할 수 없으니 우선 창고에 비밀히 보관해 두었다가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효종실록』 8년(1657) 9월 21일
전례를 물었더니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 창고에 있었습니다.
실록수정청은 대신 선조 때의 하교를 근거로 끌어옵니다. 인쇄하면서 먹으로 지워 버린 종이가 예순 권 넘게 나왔을 때, 선조가 이렇게 답했다는 것입니다.
전에 들으니 세초할 때 태만하여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 사초가 그대로 창고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제는 다시 전의 잘못된 관행을 따라서는 안 되니, 하나하나 모두 불태우는 것이 좋겠다.
효종의 답은 짧습니다.
이미 선왕의 명을 받들어 시행해 온 일이니, 이번에도 역시 불태우도록 하라.
그래서 실록에 없는 것은 되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관이 적었지만 실록에 넣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해도, 그 원고는 물에 씻기거나 불에 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41만 건은 걸러진 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는 이 글의 다음 절과 곧바로 이어지는 말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같은 기록이 두 벌로 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이었습니다.
III. 같은 시대를 두 번 적은 것이 다섯 쌍
그런데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자리가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앞 정권이 만든 실록을 못 미더워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다시 씁니다. 이때는 앞의 것을 없애지 않고 둘 다 남겼습니다. 두 벌로 전해져서는 안 된다던 원칙이 여기서는 접힙니다.
말풀이
수정실록(修正實錄)·개수실록(改修實錄) · 먼저 만든 실록을 다시 쓴 것입니다. 이름만 다르고 하는 일은 같습니다.
보궐정오(補闕正誤) · 빠진 것을 채우고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실록 전체를 다시 쓰지 않고 고칠 데만 따로 묶었습니다.
중초본(中草本)·정초본(正草本) · 중초본은 다듬는 것을 진행중인 원고이고, 정초본은 그것을 정리해 깨끗이 옮겨 쓴 완성본입니다. 이것을 목판인쇄하여 4대 서고에 보관했습니다.
| 먼저 만든 것 | 기사 수 | 다시 쓴 것 | 기사 수 |
|---|---|---|---|
| 선조실록 | 26,679 | 선조수정실록 | 1,867 |
| 광해군일기 중초본 | 22,121 | 광해군일기 정초본 | 18,805 |
| 현종실록 | 9,291 | 현종개수실록 | 10,502 |
| 숙종실록 | 24,205 | 숙종실록보궐정오 | 726 |
| 경종실록 | 2,740 | 경종수정실록 | 431 |
다섯 쌍 가운데 넷은 다시 쓴 쪽이 작습니다. 고칠 데만 골라 묶었기 때문입니다. 선조수정실록은 26,679건을 1,867건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현종만 반대입니다. 원본 9,291건인데 다시 쓴 것이 10,502건입니다. 현종개수실록은 고칠 데만 묶은 것이 아니라 실록을 통째로 새로 만든 것입니다.
광해군일기는 성격이 또 다릅니다. 이것은 정권이 바뀌어 다시 쓴 것이 아니라, 다듬는 중인 원고와 깨끗이 옮겨 쓴 원고가 나란히 남은 것입니다. 앞 절에서 본 중초(中草), 곧 태워 없앴어야 할 그 원고입니다. 없어졌어야 할 것이 남았습니다. 중초본 22,121건이 정초본에서 18,805건이 됩니다. 옮겨 쓰는 동안 3,316건이 사라졌습니다.
숙종실록보궐정오는 726건으로 다섯 쌍 가운데 가장 작습니다. 숙종실록 24,205건에 견주면 3퍼센트입니다. 실록 하나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고쳐야 한다고 본 자리에만 따로 글을 붙인 것에 가깝습니다.
IV. 실록이 아닌 것도 들어 있습니다
세종실록을 열면 날짜가 붙지 않은 기사가 나옵니다.
“` 五禮 / 吉禮序例 / 祭器圖說 / 籩 樂譜 / 雅樂譜 / 朝會 / 黃鐘宮一 地理志 / 京畿 / 廣州牧 / 驪興都護府 “`
제사에 쓰는 그릇의 생김새를 설명한 글, 궁중 음악의 가락을 적은 악보, 고을마다 위치와 물산을 정리한 지리지입니다. 어느 해 어느 날의 일이 아니라 자료집입니다.
말풀이
오례(五禮) · 나라가 치르는 다섯 갈래의 의식입니다. 제사, 손님맞이, 군대, 혼례, 상례를 가리킵니다.
지리지(地理志) · 각 고을의 위치, 물산, 인구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이런 자료가 808건 있습니다. 세종실록에 750건, 세조실록에 58건입니다.
세종실록 쪽은 갈래가 셋입니다. 오례 361건, 지리지 291건, 악보 98건입니다. 지리지는 팔도의 고을을 하나씩 적은 것이고, 악보는 궁중 음악의 가락을 적어 둔 것입니다.
적어 보이지만 견줄 때 문제가 됩니다. 세종실록 31,698건에서 부록을 빼면 30,948건입니다. 왕대별 기사 수를 그냥 늘어놓으면 세종실록만 750건을 더 얹고 겨루는 셈입니다.
V. 마지막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덜 알려진 대목입니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조선이 망한 뒤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대한제국마저 1910년에 국권을 잃은 뒤의 일입니다. 실록을 만들려면 임금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고종은 1919년에 순종은 192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조선에는 실록청을 세울 조정이 없었습니다.
세 종이 남아 있고, 합쳐서 3만 2,797건입니다.
| 실록 | 기사 수 |
|---|---|
| 고종실록 | 27,939 |
| 순종실록 | 1,386 |
| 순종실록부록 | 3,472 |
고종실록 27,939건은 선조실록 26,679건보다 많습니다. 전체에서 다섯째로 큰 실록입니다.
이 세 종은 다른 실록과 같은 자로 재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사관이 사초를 모아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빼놓을 것도 아닙니다. 고종과 순종의 시대를 기록한 것은 이것뿐이고,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로 함께 전해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 연재는 세되, 셀 때마다 밝힙니다. 고종·순종실록에서 인용할 때는 본문에 그 사정을 적습니다. 통계를 낼 때도 따로 표시합니다.
고종과 순종께서 서거하셨을 때는 이미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 체제)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 전통의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할 수 있는 조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어떻게 편찬되었을까요?
1. 주관 기구: 일제 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폄하하여 관리하는 기구인 이왕직을 두었습니다. 순종이 서거한 지 1년 뒤인 1927년 4월, 이왕직 주관으로 고종과 순종 두 왕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편찬 작업은 1935년 3월까지 만 8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2. 편찬 주체: 일본인 관료와 식민사학자 중심
- 총책임자: 이왕직 차관이자 장관이었던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 실질적 주도: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대표적 식민사학자인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실록 감수 및 편찬 총책임자로 참여하였습니다.
- 한국인 학자 참여: 남궁영, 이능화 등 한국인 학자 및 전직 관료들도 찬술·필생 작업에 동원·참여했으나, 최종 수정과 검수는 일본인들이 독점·주도했습니다.
3. 자료 수집 및 편찬 방식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종 관청의 등록(謄錄) 및 관보 등 풍부한 원사료를 등사(복사)하여 기초 자료로 삼았습니다. 체재는 전통적인 실록의 편년체 방식을 본떴습니다.
요약 및 역사적 평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속에 담긴 《승정원일기》 등의 원사료 덕분에 근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활용됩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통치 기구의 주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권 침탈 과정이나 의병 투쟁, 일제의 침략 행위 등이 일제에 유리하게 왜곡·축소·은폐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두 실록을 “일제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편찬한 관제 역사서”로 보며, 국보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태조~철종, 25대 472년간)의 범주에서는 엄격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VI. 그래서 41만 3,577건은 무엇인가
성격별로 가르면 이렇습니다.
| 성격 | 기사 수 | 실록 종수 |
|---|---|---|
| 처음 만든 실록 | 345,133 | 25 |
| 일제강점기 편찬 | 32,797 | 3 |
| 광해군일기 중초본 | 22,121 | 1 |
| 다시 쓴 실록 | 13,526 | 4 |
기사 수가 많은 실록 열 종을 늘어놓으면 문제가 눈에 보입니다.
열 종 가운데 넷이 그대로 견주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41만 3,577건이라는 숫자 하나로 답할 수 있는 물음은 많지 않습니다.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세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 조선이 남긴 실록 기록의 총량은 얼마인가 → 41만 3,577건 전부
- 왕대별로 기록의 두께를 견주려면 → 부록 808건을 빼고, 광해군일기는 한 판본만
- 판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려면 → 두 판본을 모두 두고 짝으로 견줌
이 연재는 셀 때마다 무엇을 세었는지 밝힙니다. 숫자보다 그 문장이 중요합니다.
책을 만들 때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이 페이지 수입니다. 400쪽이라고 적힌 책에서 본문은 340쪽이고, 나머지는 목차와 색인과 판권입니다. 틀린 숫자는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셌는지 적지 않았을 뿐입니다.
41만 3,577건도 그렇습니다. 틀린 숫자가 아닙니다. 그 안에 제사 그릇 그림 설명이 들어 있고, 같은 해가 두 번 들어 있고, 조선이 없어진 뒤에 쓰인 것이 3만 건 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물에 씻기고 불에 탔습니다.
데이터로 역사를 읽는 일은 세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셀지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정을 독자에게 보여 주지 않으면, 숫자는 정확할수록 더 크게 속입니다.
출처
기사 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공데이터로 공개한 실록 원문 전체를 직접 집계한 값입니다. 2026년 9월 기준 41만 3,577건입니다.
『효종실록』 8년(1657) 9월 21일 · 원문 보기
본문의 인용문은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국역본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실록통계청」. 이 글은 연재 전체가 쓰는 숫자의 바탕입니다. 연재 전체 목차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