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 4일 밤.
서울 전동(典洞)에서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처음 세워진 근대식 우편 관청인 우정국의 개국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우정국을 맡은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했고 조정의 대신들이 모였습니다.
전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견지동입니다. 조계사 옆, 우정총국 건물이 서 있는 그 자리입니다. 원래 왕실의 의약을 맡던 전의감(典醫監)이 있던 곳이라 전동이라 불렸습니다.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담장 밖에서 불길이 올랐습니다.
『고종실록』은 이 순간을 짧게 적습니다.
宴將終, 見牆外火起。 잔치가 막 끝나 갈 무렵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이는 것이 보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불을 보고 먼저 밖으로 나간 사람은 민영익(閔泳翊)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밖에서 칼을 맞았습니다.
민영익은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잔칫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그러나 불도, 칼도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날 밤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정권을 뒤집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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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이 줄어든 때를 노렸다
그들이 노린 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만이 아니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뒤 청나라는 조선에 약 3,0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와 재정, 외교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조선의 독립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개혁도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기회는 1884년에 왔습니다.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 주둔군의 절반 가량을 빼냈습니다. 서울에는 여전히 청나라 군사 약 1,500명이 남아 있었지만 이전보다는 크게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그해 가을 서울로 돌아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는 김옥균과 접촉했고, 갑신정변을 앞두고 두 사람은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협의했습니다. 개화당이 자체적으로 확보한 사관생도와 군인, 장사(壯士)가 약 200명이었고, 일본군을 합하면 처음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300~400명 정도였습니다.
병력만 보면 청군을 압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크게 모으는 일이 아니라 왕을 확보하고, 군 지휘부를 제거하고, 왕의 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새 정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2월 4일 밤 전동에서 시작된 일은 바로 그 계획의 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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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맞은 민영익은 누구였나
가장 먼저 칼을 맞은 민영익은 단순한 고위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부는 민태호(閔台鎬)였습니다. 그런데 1874년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閔升鎬)가 폭발물로 목숨을 잃자 그 뒤를 이어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가 되었고, 민승호의 집인 죽동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개화를 거부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민영익은 개화파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1882년 일본을 돌아보았고, 1883년에는 조선 최초의 미국 공식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정사(正使)로 미국에 갔습니다.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고 철도와 전기회사, 병원,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농장, 공장을 돌아봤습니다. 이때 함께 간 부사가 홍영식, 종사관이 서광범이었습니다.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과 민영익이 함께 미국을 돌아다닌 셈입니다.
귀국한 뒤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갔고 개화파와 점차 멀어졌습니다. 1884년에는 친군영의 우영사(右營使)가 되어 실제 군권까지 쥐었습니다.
그러니 12월 4일 밤 첫 칼이 민영익에게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고, 민씨 권력의 핵심이었으며, 동시에 서울의 군대 한 축을 지휘하는 우영사였습니다. 갑신정변 세력이 없애려 한 기존 권력과 군권을 다 쥐고 있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민영익은 죽지 않았습니다.
온몸에 칼을 맞았지만 묄렌도르프 등의 도움으로 빠져나왔고,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를 받아 살아났습니다. 이 일은 고종이 서양식 병원 설립을 받아들이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듬해 광혜원(뒤의 제중원)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민영익은 일본으로 달아난 김옥균을 죽이려고 자객까지 보냈습니다. 한때 함께 서양을 돌아본 사람들과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은 조선 땅이 아니었습니다. 을사조약 뒤 상하이로 망명해 그림을 그리며 지내다가 1914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묵란(墨蘭)을 잘 그린 화가로도 이름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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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궁으로
우정국에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갑신정변 세력은 더 빨리 움직였습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궐로 달려가 고종에게 변란이 일어났다고 알렸고, 거처를 옮기시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에 모십니다.
경우궁은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었습니다. 1824년 계동에 세웠고, 규모가 작았습니다.
바로 그 점이 갑신정변 세력에게는 유리했습니다. 창덕궁처럼 넓은 궁궐보다 출입을 막고 왕 주변을 통제하기 쉬웠습니다.
왕이 경우궁으로 옮겨 간 순간, 갑신정변은 전동의 칼부림에서 정권 장악으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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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명령으로 일본군이 들어왔는가
이날 밤 가장 민감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일본군이 왕 주변으로 들어왔습니다. 『고종실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玉均等, 以上命求日本公使來援(옥균등, 이상명구일본공사래원원) 김옥균 등이 임금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도울 것을 요구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일본군을 불러들인 사람은 고종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끝난 뒤 이 문제는 외교 분쟁이 됩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갑신정변에 개입했다고 비판했고, 다케조에는 국왕에게서 호위하러 오라는 취지의 교지를 받았다고 맞섰습니다.
한문에는 남의 명령을 사칭한다는 뜻을 담는 글자가 따로 있습니다. 稱(칭)을 써서 稱上命(칭상명)이라 적으면 “임금의 명이라 일컫고”가 됩니다. 실록은 그 글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결과입니다. 그날 밤부터 고종 주변에는 갑신정변 세력과 일본군이 함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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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
자정을 넘기자 사람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경우궁으로 불려 온 군 지휘관과 대신들이 차례로 살해됐습니다. 『고종실록』은 일곱 사람을 한 문장에 적었습니다.
玉均等, 使生徒及壯士, 殺左營使李祖淵、後營使尹泰駿、前營使韓圭稷、左贊成閔台鎬、知中樞府事趙寧夏、海防總管閔泳穆、內侍柳載賢于前堂。 김옥균 등이 생도와 장사를 시켜,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해방총관 민영목, 내시 유재현을 앞채에서 죽이게 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8일
그 바로 다음에 고종의 말이 나옵니다. 왕은 거듭 소리 내어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실록은 적었습니다. 왕 곁에는 김옥균의 무리 십수 명만 남아 기거가 자유롭지 않았고 수라마저 제때 들지 못했다고 이어집니다.
이 장면은 갑신정변에서 고종의 위치를 잘 보여줍니다.
갑신정변 세력은 왕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왕명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왕명으로 관리를 임명하고, 왕명으로 개혁안을 발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왕의 뜻을 그대로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따르는 순간 자신들을 위협할 군 지휘관과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대로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왕의 권위를 이용해야 하지만 왕의 의사에는 복종할 수 없는 상태. 갑신정변의 모순은 첫날 밤부터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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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궁에서 죽은 일곱 사람
이들을 ‘옛것을 지키던 수구파 일곱 명’이라고 부르면 실제 모습과 꽤 달라집니다.
한 사람씩 보겠습니다. 직함은 실록이 그날 적어 놓은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조연 (李祖淵) — 좌영사
일본에 두 번 다녀온 군 지휘관이었습니다.
1880년 김홍집의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고 이듬해에도 다시 다녀왔습니다. 청나라 톈진에도 갔으며 기기국 총판과 협판군국사무를 지냈습니다. 신식 기계와 군사 제도를 직접 접한 관료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청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고, 급진개화파에게는 사대당 인물로 지목됐습니다. 우정국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리고 궁으로 향하다가 살해됐습니다.
10월 26일 임금의 교서에서는 그를 卒參判李祖淵(졸참판이조연), 곧 참판 이조연이 죽었다며 좌찬성을 추증합니다.
윤태준 (尹泰駿) — 후영사
청나라에서 신식 기술을 배워 온 사람이었습니다.
1881년 김윤식이 이끈 영선사를 따라 청나라에 가 신식 기술을 접했고, 조선에 근대식 병기 제조 시설인 기기국이 만들어지자 초대 총판을 맡았습니다. 농상 업무와 군제 개편에도 참여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씨 중심 정권 쪽에 서 있었고 1884년에 후영사가 됐습니다.
갑신정변 당일에는 우정국 잔치에 가지 못하고 숙직 중이었습니다. 고종이 경우궁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다가 살해됐습니다.
이조연과 마찬가지로 卒參判尹泰駿(졸참판윤태준), 곧 참판 윤태준이 죽었다며 좌찬성을 추증합니다.
한규직 (韓圭稷) — 전영사
문관이 아니라 오랫동안 군대를 이끈 무관이었습니다.
경상좌수사와 경상우수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총융사, 어영대장을 지냈습니다. 정변 직전에는 전영사였습니다.
개화당과 직접 부딪힌 일도 있었습니다. 박영효 등이 기르던 신식 군대가 한규직의 친군 전영으로 편입되면서 급진개화파가 군사적 기반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반목이 깊어졌습니다.
정변이 벌어지자 한규직은 병졸로 변장해서라도 왕을 만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경우궁 앞에서 살해됐습니다.
그가 제거된 이유는 추상적인 보수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서에서 卒判書韓圭稷(졸판서한규직),곧 판서 한규직이 죽었다며 좌찬성을 추증합니다.
민태호 (閔台鎬) — 좌찬성, 민영익의 생부
민씨 척족 정권의 대표적인 중진이었습니다.
통리군국사무아문 독판,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를 지냈습니다. 1884년에는 민영익·민영목·민응식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와 정면에서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민영익의 생부였습니다.
우정국에서 아들에게 칼이 향하고, 몇 시간 뒤 경우궁에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첫날 밤에 한 부자가 동시에 제거 대상이 된 것입니다.
임금의 교서 여섯 편 가운데 첫 번째가 민태호에게 내려집니다. 정승을 추증하고, 사흘 뒤 시호 충문(忠文)을 내리고, 3년치 녹봉까지 보냅니다. 일곱 사람 가운데 가장 두터운 대우입니다.
조영하 (趙寧夏) — 지중추부사
조선의 외교를 움직이던 실력자였습니다.
고종 초기부터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중진으로 병조판서,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개항 뒤에는 대외 교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1882년에는 일본 측과 교섭했고 영국·독일과의 수호조약 체결에도 관여했습니다.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맡았고,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가는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후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데려오는 일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에도 관여했습니다.
국제정세를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조선에서 외교를 가장 많이 다뤄 본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만 그가 선택한 길은 청과의 관계를 이용해 왕실과 민씨 정권을 지키는 방향이었습니다.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던 김옥균 세력에게는 정반대편에 섰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정승을 추증받고 시호 충문(忠文)을 받습니다.
민영목 (閔泳穆) — 해방총관
‘수구파 대 개화파’라는 구분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일찍부터 박규수 등과 함께 서양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1883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갑신정변에서 제거 대상이 됐습니다.
이유는 정치적 위치였습니다. 민영목은 민태호·민영익·민응식과 함께 민씨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라 있었습니다.
근대적인 기술이나 신문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급진개화파가 보기에 그는 자신들이 무너뜨리려는 기존 권력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정승을 추증받고 시호 문충(文忠)을 받습니다.
유재현 (柳載賢) — 내시
이 사람은 앞에서 나온 사람들과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고위 대신도 군 지휘관도 아니었습니다. 고종과 왕비의 신임을 받던 내시였습니다.
더 복잡한 점은 그가 처음부터 정변 세력의 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변 음모에 한때 가담했다가, 실제로 일이 시작되자 고종에게 알렸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경우궁에서 왕비와 세자가 환궁을 요구하는 등 움직임이 생기자 정변 세력은 그가 기밀을 밖으로 흘릴 수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실록은 죽인 주체를 玉均等, 使生徒及壯士(옥균등, 사생도급장사), 곧 김옥균 등이 생도와 장사를 시켰다고만 적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다큐에서 가장 조용한 장면이 나옵니다.
여섯 사람에게는 10월 26일에 725자짜리 교서가 내려갑니다.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고, 제문은 임금이 직접 짓고, 시호를 서둘러 내리고, 장례 비용을 넉넉히 보내고, 나라에서 만든 관인 동원부기(東園副器) 를 보내라고 합니다.
유재현에게는 하루 뒤 열네 글자가 내려갑니다.
命中官柳載賢身死, 棺板一部題給。 중관 유재현이 죽었으니 관 널 한 부를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7일
둘 다 관입니다. 둘 다 “한 부”로 셉니다.
이렇게 나눈 자리는 26일이 아니라 죽음을 처음 알린 18일에 이미 있었습니다. 여섯 사람 앞에는 좌영사·좌찬성·지중추부사 같은 관직이 붙고, 한 사람 앞에는 내시라는 신분이 붙습니다.
다만 여기서 끝은 아닙니다. 2년 뒤인 1886년, 민태호 등을 위해 제사를 지내라는 기사에 유재현의 이름이 다시 올라옵니다. 1901년과 1902년에도 충신을 표창하고 시호를 주자는 논의에 이름이 나옵니다.
네 영의 지휘관이 모두 대상이었다
일곱 사람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정변 세력의 의도가 분명해집니다.
| 사람 | 자리 | 그날 밤 |
|---|---|---|
| 민영익 | 우영사 | 우정국에서 피습, 생존 |
| 이조연 | 좌영사 | 경우궁에서 사망 |
| 한규직 | 전영사 | 경우궁에서 사망 |
| 윤태준 | 후영사 | 경우궁에서 사망 |
당시 서울의 친군영은 좌·우·전·후 4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네 영의 지휘관 네 명이 전부 대상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 몇을 죽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존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군대의 지휘부를 통째로 잘라내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 사람들을 4영과 포도청에 배치했습니다.
민태호와 민영목은 민씨 권력의 핵심이었고, 조영하는 왕실과 청을 연결하는 외교의 실력자였으며, 유재현은 왕과 왕비의 움직임을 가장 가까이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개화를 싫어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을 다녀오고, 신식 군대를 만들고, 병기공장을 세우고, 외국과 조약을 맺고, 신문을 발간한 사람들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갈림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누가 군대를 지휘할 것인가. 누가 왕을 움직일 것인가. 청의 힘을 이용할 것인가 끊어낼 것인가. 그리고 기존 권력 안에서 천천히 바꿀 것인가, 정변으로 한꺼번에 뒤집을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이들은 김옥균 일행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
아침이 되자 정부가 바뀌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끝난 뒤에는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홍영식은 우의정,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협판교섭사무, 서재필은 전영 정령관이 됐고, 김옥균은 재정을 다루는 호조참판이 됐습니다.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을 예조판서로 삼아 다른 개화계 관료와 종친도 끌어들였습니다. 정변을 소수의 반란이 아니라 새 정부의 모습으로 만들려 한 것입니다.
『고종실록』을 읽으면 이 전환이 기묘하게 보입니다.
바로 앞 기사에서는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다음 기사는 새 관직을 내리는 평범한 인사 발령입니다. 칼을 든 정변이 몇 줄 만에 인사 행정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여전히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경우궁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경우궁이 비좁다는 이유로 창덕궁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했습니다. 개화당은 창덕궁이 넓어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종친 이재원(李載元)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돌아갑니다. 실록은 이 이동을 「종친 이재원의 집에 이어하였다가 관물헌으로 환어하다」라는 열아홉 글자짜리 기사로 적었습니다.
이 이동이 중요합니다.
경우궁은 작았습니다. 창덕궁은 컸습니다. 정변 세력은 왕을 더 좋은 궁으로 옮겼지만, 군사적으로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공간이 몇 배로 넓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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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아침, 나라를 바꾸는 조항이 나왔다
1884년 12월 6일 아침, 정변 세력은 자신들이 만들고자 한 나라의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라 부르는 문서입니다. 『갑신일록』에 남아 있는 것이 14개 조항이고, 실제 발표된 정령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재필의 회고에는 80여 조항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내용은 상당히 급진적이었습니다.
- 대원군을 돌아오게 하고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없앤다
-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운다
- 관리의 부정을 줄이기 위해 지조법을 개혁한다
- 내시부와 규장각, 혜상공국을 없앤다
- 네 영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근위대를 만든다
- 국가 재정은 모두 호조에서 관리한다
- 불필요한 관청과 관직을 없앤다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고, 문벌과 특권을 줄이고, 재정과 군대를 중앙정부가 통합하며, 왕실과 외척 중심의 권력구조를 손보려 했습니다.
문제는 이 정강을 발표한 바로 그날 오후였습니다.
—
오후 3시, 청군이 들어왔다
서울에 남아 있던 청군 약 1,500명이 움직였습니다. 12월 6일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무렵, 청군은 창덕궁 동쪽과 남쪽에서 들어왔습니다. 일부 조선군도 청군에 협조했습니다.
정변 세력은 4영의 병사들을 궁궐 방어에 동원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무기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정변 당일 총을 정비하려고 열어 보니, 녹이 심해 분해해 소제해야 할 정도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고종실록』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是日申刻, 淸兵分入宮門, 放銃砲, 我左右營兵隨之, 日兵儘力禦之。 이날 신시에 청나라 병사가 궁문으로 나뉘어 들어와 총포를 쏘았고, 우리 좌영과 우영의 병사가 뒤따랐으며, 일본 병사가 힘을 다해 막았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청군은 들어와 총포를 쏘고, 일본군은 막습니다.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병력과 화력에서 밀린 일본군이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으로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고종은 거부했습니다. 결국 일본군과 김옥균 일행은 왕을 두고 철수했습니다.
여기서 정변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왕의 이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부가 왕을 잃었습니다.
12월 4일 밤 9시 무렵 시작된 정변은 12월 6일 저녁 무렵 끝났습니다. 약 46시간입니다. 우리가 삼일천하라고 부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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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을 이끈 사람들의 최후
같은 밤에 함께 칼을 들었지만 끝은 하나도 같지 않았습니다.
홍영식 (洪英植) — 사흘 뒤 그 자리에서
잔치를 주관했던 우정국 총판입니다.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었고,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을 다녀온 사람이었습니다.
정변이 무너지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일본 공사관 쪽으로 물러났습니다. 홍영식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박영교(朴泳敎)와 사관생도 일곱 명과 함께 왕 곁에 남았습니다.
『고종실록』에 짧은 문장이 있습니다.
英植等挽御衣, 請勿往。 홍영식 등이 임금의 옷을 붙잡고 가지 마시라 청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고종은 결국 청군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홍영식과 박영교, 사관생도 일곱 명이 살해됐습니다. 실록은 죽인 주체를 我兵(아병), 곧 우리 병사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이듬해 광혜원이 들어섭니다. 정변이 일어난 밤, 첫 칼을 맞은 민영익을 살려 낸 알렌이 세운 병원이, 정변을 일으킨 홍영식의 집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박영교 (朴泳敎) — 형과 아우가 갈렸다
박영효의 친형입니다. 홍영식과 함께 왕 곁에 남았고 함께 죽었습니다.
같은 집안에서 나온 형제가 그날 밤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우는 일본 공사관으로 갔고 형은 왕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아우는 이후 55년을 더 살았고 형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김옥균 (金玉均) — 10년 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계속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정치범을 넘길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다만 일본 정부도 그를 반기지는 않아 오가사와라 제도와 홋카이도로 사실상 유배하듯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흘렀습니다.
1894년 3월, 김옥균은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습니다. 3월 28일 홍종우(洪鍾宇)가 그에게 총을 쐈습니다. 김옥균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시신은 청나라 군함을 통해 조선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 다시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시신을 능지처참하고 머리와 사지를 여러 곳에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그해가 가기 전에 또 한 번 뒤집힙니다. 갑오개혁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의 죄가 벗겨졌고, 이듬해 사면됐습니다. 아관파천 뒤에는 그 조치가 취소됐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 두 달 전에 규장각 대제학이 추증되고 충달(忠達)이라는 시호가 내려집니다.
역적, 사면, 취소, 추증. 한 사람 앞에 붙은 값이 실록 안에서 네 번 뒤집혔습니다.
박영효 (朴泳孝) — 이름을 바꾸고 다시 돌아왔다
철종의 사위였습니다. 정변 때 스물넷이었습니다.
일본으로 달아나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개명(改名)하고, 메이지 학원(明治學園) 영어과에서 공부했습니다. 그후 1894년 갑오개혁 때 돌아와 내부대신이 됐습니다. 이듬해 역모 혐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달아났습니다. 1907년에 또 돌아와 궁내부대신이 됐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고 은행과 기업의 자리에도 앉았습니다. 1939년에 죽었습니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고종실록』이 편찬된 것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입니다. 그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서울에서 일본 귀족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서광범 (徐光範) — 미국에서 병으로
보빙사의 종사관으로 민영익·홍영식과 함께 미국을 돌아본 사람입니다.
정변 실패 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돌아와 법부대신이 됐고, 1895년에는 주미 공사로 미국에 부임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자리를 잃은 뒤에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897년 워싱턴에서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습니다.
서재필 (徐載弼) —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멀리 갔다
정변 때 스물이었습니다. 일본 사관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와 전영 정령관을 맡았습니다.
정변이 실패하자 가족이 화를 입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됐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입니다.
1895년에 돌아와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1919년 3·1운동 뒤에는 미국에서 지냈고, 해방 뒤인 1947년 미군정의 최고정무관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51년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죽었습니다. 정변에 가담한 사람 가운데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멀리 간 사람입니다.
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 —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병력을 이끌고 궁에 들어갔고, 물러날 때는 거류민을 데리고 성을 나갔습니다.
조선 정부는 그의 책임을 물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공직에서 물러나 한학자로 지냈고, 도쿄제국대학에서 한문학을 가르쳤습니다. 1917년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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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울에서 일본인이 쫓겨났다
정변이 무너지자 서울의 분위기는 곧바로 뒤집혔습니다.
12월 7일, 시민들은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습니다. 다케조에는 일본군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갔고 김옥균 일행도 그들과 함께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고종실록』은 그날의 서울을 이렇게 적습니다.
時城中軍民, 疾視日本人, 逢輒毆鬪, 多有殺傷。 이때 성안의 군사와 백성이 일본 사람을 미워하여, 마주치면 곧 때리고 싸워 죽거나 다친 이가 많았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0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채 인천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얼마 전까지 조선 정부의 인사를 바꾸던 사람들이 이제 자기 모습을 바꾸어 일본행 배를 타야 했습니다.
음력 10월 21일, 승정원은 다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 잡아 국문하고 형을 집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亟令拿鞫正刑焉。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즉시 붙잡아 엄히 국문한 뒤 법대로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0월 21일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에서는 흉역(凶逆)과 흉당(凶黨)이라고만 불렀지만, 처형을 요구하는 글에서는 이름을 정확히 적었습니다.
정변은 이제 개혁이 아니라 역적을 처리하는 사건으로 다시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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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서는 조선이 받았다
여기서 일이 한 번 더 뒤집힙니다.
조선은 일본에 항의하고 망명자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공사관이 불탔고 일본인이 죽거나 다쳤다는 책임을 조선에 물었습니다.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전권대신으로 보내면서 병력과 군함까지 동원해 교섭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1885년 1월 9일에 한성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조약문은 『고종실록』에 458자로 통째로 실려 있습니다. 다섯 개 조항입니다.
| 조 | 내용 |
|---|---|
| 제1조 | 조선은 국서를 닦아 일본에 보내 사의를 표한다 |
| 제2조 | 해를 입은 일본 인민의 유족과 부상자를 돕고 일본 상인의 화물 손해를 메우기 위해 조선이 11만 원을 낸다 |
| 제3조 |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죽인 흉도(兇徒)를 조사해 잡아 무겁게 처형한다 |
| 제4조 | 일본 공관을 새 터로 옮겨 짓도록 조선이 터와 가옥을 내주고, 수리와 증축 비용으로 2만 원을 더 낸다 |
| 제5조 |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지 안에 정하고 임오속약 제5관에 따라 시행한다 |
조약문 끝에는 별단이 붙어 있습니다. 돈은 일본 은화로 계산해 3달 안에 인천에서 치르고, 흉도의 처단은 조약을 맺은 뒤 20일을 기한으로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돈보다 사람을 죽이는 쪽이 더 급했습니다.
조약에 없는 사람들
일본군 대위 한 사람을 죽인 자를 잡아 처형하라는 조항이 하나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기한까지 20일로 못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궁에서 죽은 일곱 사람에 관한 조항은 없습니다. 홍영식과 박영교, 사관생도 일곱 명에 관한 조항도 없습니다. 이 조약문 어디에도 조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조약문은 일본 대위를 죽인 조선 사람을 兇徒(흉도)라고 부릅니다.
같은 두 글자를 우리는 이미 두 번 봤습니다. 우정국에서 민영익을 찌른 자들이 兇徒(흉도)였고, 10월 26일 임금의 교서에서 김옥균 일행이 兇徒(흉도)였습니다.
황제와 대군주
조약문 첫머리에 두 나라 임금이 나옵니다.
大日本大皇帝 … 大朝鮮國大君主— 『고종실록』 고종 21년(1884) 11월 24일 · 한성조약
일본 쪽은 대황제(大皇帝), 조선 쪽은 대군주(大君主)입니다.
서명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특파전권대사(大使), 김홍집은 특파전권대신(大臣)으로 적혔습니다.
날짜도 두 줄입니다. 조선은 개국 493년 11월 24일, 일본은 메이지 18년 1월 9일입니다. 한 장의 종이에 두 개의 연호와 두 개의 날짜, 그리고 두 개의 격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조선이 요구한 김옥균 등의 송환과 다케조에의 책임 추궁은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정변을 지원한 일본이, 실패한 뒤에는 피해를 입은 쪽에 서서 배상을 받아 갔습니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서로의 군대를 계산했다
갑신정변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직접 총을 겨눴기 때문입니다.
1885년 4월 18일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 두 나라는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고, 앞으로 조선에 큰 변란이 생겨 어느 한쪽이 군대를 보내야 한다면 상대국에 미리 알리기로 했습니다.
이 조항은 9년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청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통보했습니다. 일본도 군대를 보냈습니다. 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화약을 맺어 두 나라 군대가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일본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884년 개화당이 가장 먼저 끊으려 했던 것이 청의 군사적 간섭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일본군의 힘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한 뒤에는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 방법을 두 나라끼리 정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의도와 결과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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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는 사흘보다 그 뒤가 더 길다
『고종실록』을 펼쳐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정변이 실제로 벌어진 음력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의 기록은 기사 여덟 건, 한문 원문 658자입니다. 그해 음력 10월과 11월 두 달을 합하면 13,965자입니다. 정변이 일어난 사흘은 4.7퍼센트뿐입니다.
기록이 갑자기 많아지는 것은 정변이 끝난 뒤입니다. 우정국을 없애고, 새로 벼슬을 내리고, 사람을 잡으라고 명하고, 가담자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옵니다.
사건을 더 자세히 설명해서 분량이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끝난 뒤 행정이 다시 움직이면서 문서가 쏟아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실록에서 일본군이 등장하는 네 장면입니다.
| 장면 | 실록의 글자 | 뜻 |
|---|---|---|
| 궁으로 들어올 때 | 護衛 | 호위하다 |
| 청군과 싸울 때 | 禦 | 막다 |
| 궁을 떠날 때 | 辭 | 하직하다 |
| 서울을 떠날 때 | 保護 | 보호하다 |
모두 지키는 뜻을 지닌 동사가 붙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고종실록』은 다른 실록과 만들어진 과정이 다릅니다.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 이왕직에서 편찬됐고, 일본인 감수위원과 이왕직 장관의 검토를 거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탕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같은 조선 때의 기록입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갑신정변을 기록한 『고종실록』에서 일본군은 한결같이 지키는 쪽으로 적혔고, 그 문장들은 일제강점기의 편찬 과정을 그대로 통과했습니다.
그 표현이 1884년 원자료에서부터 있었는지 확인하려면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를 나란히 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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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 무엇이 바뀌었나
갑신정변은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빨리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삼일천하라는 말만 기억하면 오히려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
첫날 밤에는 왕을 옮기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둘째 날에는 정부의 인사를 바꾸고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는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 재정 통합과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담은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청군이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던 사람들이 일본의 군사력을 빌렸습니다. 왕의 권위를 이용해 새 정부를 만들었지만 왕의 뜻을 끝까지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문벌을 없애고 인민 평등을 말했지만 그것을 백성에게 설명하고 지지를 얻을 시간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밤, 전동의 담장 밖에서 불이 올랐습니다. 약 46시간 뒤 새 정부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날 시작된 이야기는 사흘 만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성조약으로 이어졌고, 톈진조약으로 이어졌고, 상하이에서 김옥균에게 발사된 총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1894년 조선에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으로 이어졌습니다.
삼일천하는 사흘이었습니다. 그 뒤 이야기는 60년 넘게 계속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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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풀이
우정국(郵政局) 1884년에 세운 근대식 우편 관청. 정식 이름은 우정총국(郵政總局)이고 실록은 우정국이라 적었다. 책임자를 총판이라 했다.
전동(典洞) 지금의 서울 종로구 견지동. 왕실의 의약을 맡던 전의감(典醫監)이 있던 자리라 붙은 이름이다.
낙성(落成) 건물을 다 지음. 낙성연은 그것을 축하하는 잔치다.
친군 사영(四營) 당시 서울을 지키던 군대. 전영·후영·좌영·우영 넷으로 나뉘었고 각 지휘관을 전영사·후영사·좌영사·우영사라 했다.
보빙사(報聘使) 1883년 미국에 보낸 조선 최초의 공식 사절단.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이차(離次)·이어(移御)·환어(還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그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궁궐이 아니다.
좌찬성(左贊成) 의정부의 종1품 벼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정2품 벼슬. 맡은 일 없이 품계를 유지하는 자리로도 쓰였다.
해방총관(海防總管) 해상 방어를 맡은 직책.
내시(內侍)·중관(中官) 궁중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관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두 표기다.
동원부기(東園副器) 나라에서 만들어 신하에게 내리는 관(棺).
관판(棺板) 관을 짜는 널빤지.
치제(致祭)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제사를 지내 주는 것.
추증(追贈) 죽은 사람에게 생전보다 높은 벼슬을 내리는 것.
시호(諡號) 죽은 뒤에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해 붙이는 이름.
능지처참(陵遲處斬) 죄인의 목숨을 끊고 시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여러 곳에 내거는 형벌. 가장 무거운 형이다.
지조법(地租法) 토지에 매기는 세금 제도.
혜상공국(惠商公局) 보부상을 관할하던 기구.
영선사(領選使) 1881년 청나라에 보낸 유학생과 기술자 사절단.
수신사(修信使) 개항 뒤 일본에 보낸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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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7일~27일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1월 24일 — 한성조약 조약문
- 『고종실록』 20권·46권 등 관련 기사
- 인용한 번역은 모두 한문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입니다
- 글자수는 한문 원문 기준이며 구두점·띄어쓰기·교정부호를 제외하고 한자만 셌습니다
- 인물 경력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2차 자료를 참조했고, 직책은 실록의 그날 표기를 우선했습니다.
- 김옥균과 개화당 동지들 사진은 한국학중앙연구원/공공누리 1 유형 이미지입니다.
『고종실록』은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강점기 이왕직에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 사관이 사초를 바탕으로 만든 이전 실록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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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데이터로 실록을 읽는 연재 조선왕조실록 다시 보기에서 갈라져 나온 역사다큐입니다.
출처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피습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8일 — 김옥균 등이 생도와 장사들을 시켜 이조연 등을 죽이게 하다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19일 — 밤에 북묘에 거처를 옮겼다가 청나라 오조유의 영방으로 옮기다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0일 — 군민들의 일본인 질시로 인해 일본 공사가 거류민을 보호하고 김옥균 등이 일본으로 도망치다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1일 — 승정원에서 김옥균과 홍영식 등을 처형하도록 아뢰다
-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1884) 10월 27일 — 중관 유재현이 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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